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14
00417 417화
“우리도 이미 생각했던 문제야. 이미 각 대학병원에 공문을 보낸 상태고.”
“반응이 없습니까?”
“한국 내 종합병원 중에서 값싸게 활용할 수 있는 레지던트들을 냉큼 보낼 곳이 과연 있을까?”
“그러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태수가 바로 수긍했다.
예전에 연성대학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끔찍하게 겪어 온 일들이다.
대학병원일수록 심하다.
어쩌면 저렴하고 24시간 병원에 상주할 수 있는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당연할지 몰랐다.
이 대목에 이르자 다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때 석정현 이사장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을 꺼냈다.
“최 선생이 졸업한 학교에 공문을 보낸 적이 있나?”
“네. 형식적인 답변이 돌아왔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를 거야. 신속대응센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공문을 보내도록 하고, 최 선생이 직접 다녀오도록 해.”
석정현 이사장의 물음에 태수가 멈칫했다.
“모교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쯤이면 학교에서 나름 유명 인사가 되어 있을 텐데,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한다면 대우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건…….”
태수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그사이 한민웅 병원장이 말했다.
“이사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최 선생의 인지도는 상당합니다.”
“학교 위상을 올리는 데 공을 세운 최 선생이라면 홀대하진 않겠죠.”
“직접 프레젠테이션까지 한다면 효과는 더 좋을 거 같습니다.”
박완용 센터장과 하석준 팀장도 합세하자 석정현 이사장이 아예 확정을 지었다.
“그럼 내일 바로 모교에 다녀와. 센터장이 직접 다시 공문을 자세하게 작성해서 보내 주도록 하고.”
“서울 명문 의대도 아닌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최 선생이 의술을 배운 학교인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석정현 이사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태수를 신뢰하니 모교 출신 의사도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눈치를 보던 박완용 센터장이 얼른 대답했다.
“일단 말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박완용 센터장은 먼저 대답하고 태수에게 눈짓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반박하고, 아니면 수긍하라는 눈빛이다.
태수는 대답 전에 잠깐 생각했다.
1년 차 때 환자 이송 때문에 모교에 방문했던 그때다.
때마침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그때 전문의들과 레지던트들이 하나가 되어 치료했다. 실력이 뛰어나고 뛰어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 뒤로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또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줬던 게 인상 깊었다.
이후 공주에서 발생한 대형 참사를 침착하게 처리한 것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도 물론 그럴 것이다.
모교에서 가장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게 의사의 마음가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태수가 대답했다.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지.”
그제야 석정현 이사장이 진한 미소를 보였다.
전엔 쉬쉬하며 태수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이 자리에 참여시킬 만큼 석정현 이사장이 태수를 신임하고 있다는 걸 공개적으로 알릴 정도였다.
그 점이 태수에게 부담도 됐다.
반면, 이렇게 믿어 주는 석정현 이사장에 대한 고마움도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침.
태수는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다행히 하석준 팀장과 새로 외과장으로 추대된 오재욱 과장이 일정을 빠르게 조율해 준 덕분에 출발 시간을 당길 수 있었다.
출발 전 하석준 팀장이 태수에게 따로 말을 전했다.
“이사장님이 최 선생에게 전권을 일임한다고 하셨어. 그리고 절대 우리가 사정하는 게 아니야.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알겠습니다.”
“그래. 할 말 다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뒤집어도 돼. 정 안 되면 레지던트들을 외국에서 수입이라도 해 온다고 하셨으니까.”
“그게 됩니까?”
석정현 이사장의 엉뚱한 상상에 태수는 기가 막혔다.
하석준 팀장도 어이없단 듯 툭하니 입을 열었다.
“이사장님이라면 해내실지도 모르지. 좌우간 나중 일은 그때 생각하고 소신껏 말하고 오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태수는 인사를 한 후 병원을 나섰다.
오랜만에 모교에 가는 길.
이젠 레지던트 최고참이 되어 있을 동기들.
또한 그동안 연락도 못했던 이정민 교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을 다시 본다는 설렘과 어깨 무거운 임무를 품은 긴장감이 태수의 얼굴에 가득했다.
학교에 도착한 태수는 흉부외과로 직행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라 그런지 약간은 들뜬 상태였다.
태수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복도를 걸어갈 때다.
“혹시 최태수 선배님 아니세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수의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낯설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보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태수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박민철?”
“네, 저 민철이에요.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민철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3년 후배로 의과대학 재학 중에 오가며 인사만 했던 사이다. 그런데 이렇게 반겨 주니 태수가 더 당황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여기서 레지던트 하고 있어?”
“아무래도 학교가 좋죠. 그보다 선배님, 저 악수 좀.”
“어, 그래.”
태수가 손을 내밀자 박민철이 양손으로 공손히 잡으며 황홀한 표정으로 변했다.
“내가 잡았어. 선배님 손을 잡았다고.”
“징그럽게 왜 이래.”
“선배님의 그 투철한 의사 정신, 솔직히 감동받았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갑자기 포부를 밝히는 박민철의 모습에 태수는 얼떨떨했다.
“그, 그래. 열심히 해.”
“오늘 이 순간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기억은 할 테니까 손은 좀 놓지?”
“하하, 조금만 더 잡고요.”
박민철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후배들도 태수를 보자 우르르 다가와 인사하고 사진을 찍거나 심지어 사인까지 요청했다.
이젠 전문의가 된 선배들도 지나가는 태수를 보자마자 다가와 먼저 인사했다.
“태수야.”
“선배님, 안녕하셨습니까.”
“많이 컸어. 너 인마, 그렇게 멋있으면 죄 받아.”
“하하.”
태수는 멋쩍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후에야 태수는 흉부외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거 지치네.”
보는 의사들마다 악수하고 인사했다.
그게 이렇게 지치는 일인지는 태수도 처음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간호사실로 다가서자 저 멀리 의사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민머리가 인상적인 도성민이었다.
도성민은 후배들을 야단치는 중이었다.
“최 선생, 요즘 아주 한가하지?”
“아닙니다.”
“아닌데 수술 환자 검사 시간을 놓쳐서 30분이나 늦었어?”
“……죄송합니다.”
바짝 긴장한 후배의 모습에도 도성민은 개의치 않고 다그쳤다.
“넌 창피하지도 않냐? 네 선배인 태수는 1년 차 때부터 외국에서 그렇게 죽어라 의료봉사를 했다는데, 이렇게 편하게 일하면서 뭐 느끼는 거 없어?”
“앞으로 실수 없게 하겠습니다.”
“지켜보겠어. 니들도 마찬가지야. 요즘 태수의 모교라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상당히 늘었어. 다들 선배 얼굴에 똥칠하지 말고 금칠해 주자. 알았나?”
도성민의 으르렁거림에 후배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뭐 해? 계속 내 얼굴 보고 있을 거야?”
“갑니다!”
후다닥.
후배들이 부리나케 사라지자 도성민의 앞이 휑했다.
도성민은 꽁지 빠지게 뛰는 후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푸념을 내뱉었다.
“나라고 니들이 싫어서 그러겠냐. 쪽팔리지는 말아야 할 거 아니냐고.”
“그렇게 마음 여리신 분께서 어떻게 앞에서는 잡아먹듯이 하시는지.”
태수가 슬쩍 옆에 다가서서 말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도성민이 깜짝 놀랐다.
“헉! 누…… 태수?”
“오랜만이야, 도끼 선생.”
태수가 손을 들며 환하게 인사하자 도성민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야, 이 자식이! 몇 년 만에 얼굴 보이면서 바로 도끼 타령이야?”
“인상 쓰지 마. 오금 저려.”
“이걸 진짜. 말이나 못하면.”
“그런데 나만 반갑나?”
태수가 찡긋거리며 묻는 순간이었다.
도성민이 얼른 인상을 환하게 펴며 태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식, 안 반갑겠냐? 미치게 반갑지.”
“컥컥! 나 숨 좀.”
“그냥 쉬지 마.”
도성민은 툴툴거리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격한 포옹을 나눈 후였다.
떨어진 도성민이 태수의 얼굴을 보며 신기한 눈빛을 내보였다.
태수가 외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날 보는 눈빛이 이리 게슴츠레해?”
“내가 알고 있던 최태수가 맞나 해서.”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물어? 그렇게 유명해져 놓고는 모르는 척하기야?”
도성민의 말에 태수가 멈칫했다.
“너도 그 이야기냐?”
“너 학보에도 실렸어. 충선대학교에서 배출한 진정한 의사라고 말이야.”
“뭘 그렇게까지. 그런데 혹시 교수님들도 아시나?”
태수가 묻자 도성민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한동안 기자들도 찾아왔었는데. 서로 교수님들을 인터뷰하시겠다고 난리였다니까.”
“이거 좋다고 해야 하나, 쑥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보다 여긴 진짜 어떻게 갑자기 온 거야?”
“이정민 교수님 뵈러. 계시지?”
태수는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알려졌다면 이야기가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도성민과 헤어진 태수는 이정민 교수실에 들어갔다.
“최 선생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이야.”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태수가 고개를 깊게 숙이자 이정민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해. 일단 앉지. 갑자기 찾아온 이유도 궁금하니까 말이야.”
이정민 교수의 권유에 태수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몇 마디 더 인사가 오간 뒤에야 태수는 비로소 용건을 이야기했다.
“사실 신속대응센터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아침에 새로 공문을 보낸다고 했는데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길 최 선생이 어떻게 알아?”
“동성종합병원에서 새롭게 준비하는 곳이라서요.”
“그래?”
이정민 교수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저희 학교와 업무 협약을 맺고자 하셔서 절 보내셨습니다.”
“그랬군, 그랬어. 이건 전혀 예상 못했는데 말이야.”
“전에도 공문을 보냈는데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태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이정민 교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듣도 보도 못한 센터를 건립하고 레지던트를 보내 달라는데 대뜸 보내 줄 병원이 어디 있나?”
“그럼 이번에도 힘들까요?”
“마침 내일 아침에 교수 회의가 있어. 최 선생이 직접 이야기한다면 교수들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교수님 생각부터 여쭤 봐도 됩니까?”
태수의 물음에 이정민 교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은 조건에 좋은 환경인 데다 최 선생이 있는 곳이라면 보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이정민 교수의 반응이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태수는 그에 희망을 봤다.
이정민 교수.
의대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가 호의적이라면 일이 잘 풀릴 확률이 높아진단 소리다.
태수의 입장에선 이번 일을 꼭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야 신속대응센터가 더욱 빨리 완성되고,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일 아침에 보기로 이야기를 마친 후 태수는 이정민 교수와 헤어졌다.
교수 진료실 밖으로 나오자 도성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가 오래 걸렸네?”
“나 기다리고 있던 거야?”
“물론이지. 가자.”
“어딜?”
“따라와.”
도성민은 태수를 이끌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리둥절한 태수였지만 이내 피식거리며 같이 걸어갔다.
도성민이 태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흉부외과 의국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빽빽할 정도로 의사들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