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60
00463 463화
그렇게 다들 축축 늘어져 있을 때였다.
끼익.
아주 작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수는 물론 하석준 팀장까지도 누가 들어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박성민이 엎드린 채로 입만 열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 건들지 맙시다. 진짜 피곤해서 미쳐 버릴 거 같으니까 용건 없으면 다른 데 가 보시라고.”
“음.”
“음은 무슨. 다른 빈방에서 컨퍼런스하세요. 나가시는 길에 불도 좀 꺼 주시고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작게 울린 목소리가 컨퍼런스 룸에 번져 갔다.
그런데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푸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요. 뭔지는 몰라도 그냥 가시라니까. 거 참, 진짜 피곤해 죽겠는데 더 피곤하게 하지 맙시다.”
박성민의 목소리가 점점 짜증으로 물들어 갈 때였다.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선생.”
“네, 제가 박성민입니다. 이렇게 엎드린 저를 알아봐 주셔서 정말 감사한데, 사인하고 사진 찍어 드릴 시간은 없으니까 다음에 하자고요.”
“이 사람이 진짜. 이사장님, 죄송합니다.”
그 말이 들린 후였다.
고개를 젖힌 채 쉬고 있던 태수가 번뜩 눈을 떴다.
이사장?
그 순간이었다.
하석준 팀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장님과 센터장님이 어떻게 이 시간에…….”
그 소리를 듣고야 태수를 비롯한 1팀이 번뜩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컨퍼런스 룸 입구에 푸근한 미소를 지은 석정현 이사장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박완용 센터장이 서 있었다.
“이사장님!”
“센터장님!”
두 사람을 확인한 1팀원들이 깜짝 놀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당탕.
컨퍼런스 룸에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1팀원들과 달리 박성민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이 슬쩍 손까지 비비며 억지 미소를 띠었다.
“아이고, 두 분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아차차! 방금 전에 제가 한 말은 조크였습니다. 농담 아시죠?”
“흠흠.”
박완용 센터장이 어색한 헛기침 소리를 냈다.
박성민은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어깨를 팍 움츠렸다.
“진짜 농담이었는데요. 재미 없으셨습니까? 아, 요즘 제 개그 코드가 영 예전 같지 않나 봅니다.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부터 바로 하겠습니다.”
턱턱.
박성민이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주절거렸다.
그 순간 석정현 이사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거두지 않고 박성민에게 말했다.
“성격은 여전하네. 오늘 많이 힘들었던 거 같군.”
“아닙니다, 힘들기는요. 언제나 보람과 성취를 느끼며 오늘도 열심히, 그리고 내일도 열심히 환자를 치료할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듬직해.”
“그럼요. 1팀 히어로인 박성민이가 의사의 본분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니죠, 아니고말고요.”
박성민의 잔소리가 길어지자 하석준 팀장이 결국 눈치를 줬다.
“박 선생, 그만.”
“…….”
박성민의 입이 바로 지퍼를 채운 것같이 딱 다물어졌다.
그제야 하석준 팀장이 석정현 이사장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다들 오늘은 무리한 스케줄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눈치 없이 찾아온 내가 잘못한 거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눈치는 없어도 센스는 좀 있으니까. 아, 잠시만.”
석정현 이사장은 끝까지 푸근한 미소를 보이며 컨퍼런스 룸을 나갔다.
그제야 박완용 센터장이 싱긋 웃으며 한마디 했다.
“박 선생, 아무리 피곤해도 상대는 확인했어야지.”
“잘못했다니까요.”
박성민이 모기 소리를 낼 때였다.
“센터장도 그만해요. 다들 얼마나 피곤했겠어.”
열린 문틈 사이로 석정현 이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석정현 이사장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달라진 점이라면 양손에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가까이에 있던 태수와 도성민이 얼른 다가가 하나씩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느낌에 태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게 도대체…….”
“우선 책상에 올려 놔.”
석정현 이사장의 말에 태수와 도성민은 일단 보따리를 책상에 올렸다.
쿵.
묵직한 소리가 울린 후였다.
석정현 이사장이 가운데 서서 하석준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쉬는데 늙은이가 눈치도 없이 들어와서 속으로 욕도 많이 하고 있겠지?”
“아닙니다.”
팀원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석정현 이사장은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나 같아도 욕할 거 같은데 말이야.”
“…….”
“자, 지금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서로 피곤한 일이고. 우선 오늘 하루 정말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팀원들이 대답하자 석정현 이사장이 이어서 말했다.
“할 말은 많지만 각설하고, 도시락을 좀 준비했으니까 같이 먹도록 해.”
“도시락이요?”
“생각 같아선 푸짐하게 가져오고 싶었는데 배달이라. 허허. 조만간에 시간을 한번 내도록 하자고. 피곤할 텐데 먹고 좀 더 쉬도록 해.”
석정현 이사장은 할 말만 마치고 그대로 컨퍼런스 룸을 나섰다.
박완용 센터장이 뒤를 따라 나가려 할 때 하석준 팀장이 얼른 불렀다.
“센터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도시락이라니요?”
“각 팀마다 직접 전달해 주시려는 모양이야. 1팀부터 챙기자고 하시더라고. 그럼 이만.”
다른 팀도 돌아봐야 하는지 박완용 센터장은 얼른 컨퍼런스 룸을 나섰다.
탕.
문이 닫히고 1팀만이 남았다.
다들 얼떨떨한 표정만이 가득했다.
석정현 이사장이 이 야심한 시각에 직접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 얼굴들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태연한 얼굴로 도시락으로 다가갔다.
브레드 김이었다.
그는 바로 보따리를 풀어 내용물부터 확인했다.
“뭐가 들었……. 와우!”
브레드 김의 놀란 목소리가 컨퍼런스 룸을 가득 울렸다.
그제야 태수와 다른 팀원들도 호기심에 슬쩍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와!”
도시락을 본 팀원들의 반응이 다양했다.
태수 또한 눈을 크게 떴다.
단순한 도시락이 아니라 일정식을 그대로 담아 놓은 모습이다. 반찬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장식되어 있어 내용물을 더욱 맛깔스럽게 보이게 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수준의 도시락이 결코 아니다. 일정식 전문점에 부탁해 만든 도시락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다들 멍하니 서 있자 브레드 김이 한 소리 했다.
“다들 왜 그래?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아닙니다. 드셔도 됩니다.”
“팀장님도 여기 하나 받으시고, 그런데 다들 왜 멍하니 서 있는 겁니까?”
브레드 김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하석준 팀장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감동한 모양입니다.”
“이건 좀 느낌이 오긴 하네요. 솔직히 제임스 박사님은 이런 디테일한 면이 좀 떨어지시거든요. 이사장님은 뭔가 좀 다르시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뭐 놀라실 분들은 계속 놀라시고, 전 먼저 먹겠습니다.”
브레드 김이 자리에 다시 앉아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하석준 팀장이 그제야 팀원들에게 물었다.
“다들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아닙니다.”
그제야 놀라움에서 깨어난 팀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여 각자 도시락을 가져갔다.
태수도 도시락 하나를 가져와 다시 앉았다.
다시 봐도 일정식 코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푸짐하고 화려한 도시락이었다.
음식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간 태수는 눈이 번뜩 뜨였다.
단맛과 짠맛이 은은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렇게 몸이 처졌을 때는 당분과 염분을 섭취하는 게 피로 회복에 좋다.
딱 한 입 먹었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는 게 대번에 느껴졌다.
태수는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맛이야.”
“그렇지! 바로 이 맛에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아니겠냐고. 내가 이사장님과 센터장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겠지?”
박성민이 얼른 끼어들자 태수가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센터장님 표정이 안 좋으셨는데요.”
“사실은 나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 어떻게 하지? 손편지라도 써서 사과드리고 내 마음을 전해야 할까?”
“알아서 하시고요. 전 도시락부터 먹어야겠습니다.”
“야, 이 매정한 새끼야, 넌 선배가 위기에 봉착했는데 지금 도시락이 목구멍으로 넘어…….”
박성민의 잔소리가 이어지려 하자 태수가 얼른 반찬 하나를 입에 넣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받아먹은 박성민의 걱정 어린 표정이 사르르 녹아 버렸다.
“죽이네. 진짜 끝내주는데?”
“일단 먹고 생각하시죠.”
“그래. 백두산도 올라가려면 밥부터 먹어야 한다는데 일단 먹고 보자. 먹고 죽은 귀신 때깔이 얼마나 좋은지도 알게 되겠지.”
걱정을 뒤로 미뤄 버린 박성민은 도시락에 파묻히듯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시작했다.
박성민이 잠시 소란을 떨었지만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모두가 도시락에 심취해 있었다.
맛있고 영양 높은 음식 앞에 피곤함은 서서히 지워져 갔다.
식사를 마친 후였다.
어느새 컨퍼런스 룸에는 인원에 맞게 보호자용 침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들 각자 침대에 누운 상태다.
모두 퀭한 얼굴로 초점도 없이 멍한 표정이다.
소화를 시키고 자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응급 수술이 밤 11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도시락까지 먹은 지금은 자정이 넘어선 상태다.
태수도 침대에 앉아 있다 슬쩍 배를 문질렀다.
더부룩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푸짐하게 먹은 만큼 소화가 더딘 모양이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하석준 팀장이 물었다.
“어디 가나?”
“소화 좀 시키고 오려고 합니다.”
“같이 가지. 끙.”
하석준 팀장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먼저 밖으로 나갔다.
태수도 침대에서 내려와 그 뒤를 따랐다.
하석준 팀장과 태수는 옥상에 도착했다.
신속대응센터 옥상은 야외 휴게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자판기도 있고 비치 의자도 있다.
보호자들이 많이 이용하지만 의료진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태수와 하석준 팀장은 곧 벤치에 자리했다.
하석준 팀장이 껌껌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힘들다.”
“…….”
“매일 오늘 같으면 아마 다들 나가떨어지겠어.”
하석준 팀장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러면 곤란한 상황이 올 것도 같습니다.”
“위에서도 같은 생각인가 봐. 오후에 팀장 회의가 있었는데 센터장님이 곧 2차 스카우트가 마무리될 거라고 하시더라고.”
“의사도 부족하지만 레지던트나 간호사들도 충원해야 할 거 같습니다.”
태수가 의견을 내자 하석준 팀장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곧 해가 바뀌니까 그때 인턴과 레지던트들을 대거 모집할 예정이야.”
“초임 의사들이 신속대응센터에서 버틸 수 있을까요?”
“간단한 처치는 할 수 있겠지. 대신에 기존 레지던트들을 중상자 전담팀 쪽으로 좀 더 옮길 거야. 간호사들도 내년에 경력자로 영입할 거고.”
“그러면 어느 정도는 숨통이 트이겠네요.”
태수의 대답을 들은 하석준 팀장이 슬쩍 물었다.
“힘들지?”
“아니요. 차라리 정신없는 게 좋습니다.”
“왕병재 환자 일이 마음에 남아 있나?”
하석준 팀장의 물음에 태수가 멈칫했다.
아무리 바쁜 하루를 보냈다고 해도 잊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태수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아니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장례식이라도 잠깐 다녀오지. 걸어서 1분 거리밖에 안 되는데.”
하석준 팀장의 말을 듣던 태수가 시선을 옮겼다.
신속대응센터 바로 뒤에 있는 장례식장이 보였다.
옥상 한가운데라 장례식장이 모두 보이진 않았지만 어느새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럴까 생각도 했는데, 유가족들이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거 같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랑은 좀 다르군.”
“…….”
태수가 침묵하자 하석준 팀장이 이어서 말했다.
“최 선생이 세 번째 수술 들어갔을 때였어. 다른 형사에게 범인을 인도하고 나서였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왕병재 환자 아들이 서 있더라고.”
“그랬습니까?”
“비통한 표정이야 어쩔 수 없었겠지. 위로를 하고 물으니까 최 선생을 찾아왔다고 했어.”
“그렇군요.”
“수술 들어갔다고 하니까 수술이 끝나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
하석준 팀장의 말에 태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록 환자가 강하게 원해서 수술했다고 해도 유가족들이 그걸 이해해 주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과한 치료나 의료 사고 등으로 문제 삼을지도 몰랐다.
그게 무섭진 않지만 수술을 진행한 의사이기에 인간적인 자책감이 컸다.
태수가 가만히 기다리자 하석준 팀장이 나지막이 한마디를 꺼냈다.
“고맙습니다, 이리 말하던데.”
“…….”
그 말이 귀에 들려오는 순간 태수는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