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69
00472 472화
또다시 정신없는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신속대응센터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바로 2차로 스카우트된 전문의들이 본격적으로 출근한 것이다.
덕분에 몇 개 팀이 더 구성되어 기존 의료진들의 근무 시간이나 휴식 시간을 보장해 줬다.
그동안 하루가 짧게 느껴졌던 기존의 의료진에게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1팀도 그에 대한 혜택을 받았다.
정말 난해한 응급 환자를 최우선으로 받는 건 변함이 없지만, 다른 수술 환자가 할당되는 비중이 줄었다.
수술이 적어졌다고 아우성칠 의료진은 없었다.
그들도 인간인 이상 편히 쉬고픈 마음은 똑같았다.
태수는 오랜만에 숙소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은 모습이 세상 걱정 없는 표정이었다.
그때 도성민이 슬쩍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재밌냐?”
“그냥.”
“그런데 어쩐 일로 TV를 다 보고 있어?”
“오랜만에 여유 좀 부리는 거지.”
옅은 미소를 지은 태수였지만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태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성민이 물었다.
“너 이번 비번날 뭐 하냐?”
“자야지.”
“아니, 그거 말고 약속 없냐고.”
“없어.”
태수의 대답에 도성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소개팅할래?”
“그래.”
너무도 덤덤하게 대답하는 태수의 대답에 외려 도성민이 움찔했다.
“내가 너 여자 소개시켜 준다고.”
“알아들었어.”
“그런데 궁금한 것도 없어? 어떤 여자인지 그런 거 말이야.”
“만나 보면 알겠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도성민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혼자가 된 태수는 여전히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소개팅.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삭막한 신속대응센터의 나날.
소개팅이라면 순간의 활력을 줄 것도 같았다.
또한 친구 부부를 보니 한 번쯤 여자와 데이트해 보고픈 마음도 들었다.
태수는 절대 고자가 아니었다.
비번날 아침.
해가 중천에 떴지만 태수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너무도 곤히 잠든 모습을 보니 좀 더 시간이 흘러야 일어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벌컥!
“어허어허!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다니. 이 어린 노무 새끼가,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까지 이렇게 퍼들어져 잠들어 있냐?”
시끄러운 목소리에 태수가 부스스 눈을 뜨다 깜짝 놀랐다.
박성민이 서 있던 탓이다.
“선배님.”
“알아봤으면 퍼뜩 일어나서 90도로 확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이 자식이 완전히 빠져 가지고.”
“그보다 여긴 어떻게…….”
“시끄러우니까 정신 차리고 나와. 도끼야, 내가 사 온 설렁탕 끓여라. 밥 먹자!”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박성민은 떠들썩했다.
쉬는 날까지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보다 놀라운 건 박성민이 숙소에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식사까지 준비한다는데 늘어져 있을 순 없었다.
“끙.”
애써 몸을 일으킨 태수가 산발한 머리를 긁적이며 밖으로 나갔다.
식사를 마친 후 박성민이 태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태수가 그런 박성민에게 물었다.
“커피 안 드십니까?”
“식후 커피보다 중요한 게 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커피를 마실 수가 있겠어?”
“뭐가요?”
태수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박성민의 방문으로 쉬는 날까지 긴장하고 있는 레지던트들이 전부였다.
의아해하는 태수를 바라보며 박성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에 소개팅하신다고?”
“아…… 그러네요.”
“엥? 무슨 반응이 이렇게 시베리아 벌판에 부는 바람처럼 싸늘하냐?”
박성민의 말에 도성민이 슬쩍 거들었다.
“소개팅해 준다고 할 때도 저랬습니다.”
“그래? 태수야, 너 혹시 기능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박성민이 묻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기능적인 문제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됐다. 그런데 이렇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거면서 소개팅은 왜 한다고 했어?”
“성민이가 만나 보라고 해서요.”
“내가? 아, 도끼가. 새끼가 사람 헷갈리게.”
박성민이 툴툴거렸지만 태수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 반응이 영 탐탁지 않은 박성민은 도성민에게 뭐라 했다.
“도끼야, 넌 저런 녀석한테 왜 소개팅을 약속해서 얼마 없을 너의 가냘픈 인맥을 더욱 좁히려고 하는 거야?”
“생각보다 넓습니다.”
“잔소리 말고 대답이나 해.”
박성민이 면박을 주자 도성민이 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태수 고향 친구 와이프가 입원했을 때, 숙소에서 가끔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하긴 그때 태수가 친구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했지.”
“그런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네요.”
불만을 표하는 도성민에게 박성민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내가 대신 나갈까? 넌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은근히 순정파야. 여자는 고결한 존재니까 모셔야 한다는 게 뼈에 새겨진 사람이라고.”
“이미 태수라고 이야기 다 해 놨는데 이제 와 바꾸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건 또 그렇지.”
박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였다.
태수가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은 쉬는 날인데 어떻게 저희 숙소에 오셨습니까?”
“크, 이제야 태수가 쓸 데 있는 질문을 하는구나. 아주 이 상황의 핵심을 찌르는 명쾌한 질문이야.”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내가 온 이유는……. 후후, 자식.”
박성민이 태수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태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 시간 이후 태수는 한없이 이어지는 박성민의 여성 심리 분석을 들어야만 했다.
“자고로 여자란…….”
저녁 무렵.
대전 번화가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태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깔끔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장소였다.
평소와 달리 태수는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다.
다만 평소에 수술복만 입고 생활하던 게 습관이 되어서일까?
목이 조여 오는 느낌이 영 갑갑했다.
태수가 넥타이를 슬쩍 풀려다 멈칫했다.
순간 머릿속에 울리는 박성민의 환청 때문이다.
-내가 3시간 넘게 세팅했는데 흐트러뜨리면 죽는다. 딱, 그 상태로 레이디를 만나도록 하고. 혹시 집에 못 들어가게 될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넥타이 푸는 걸 허락하마. 파이팅.
집을 나설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다. 물론 태수가 선배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후 무렵부터 찾아와 신경 써 준 성의가 고마워서라도 넥타이로 향한 손을 내렸다.
“선배님도 참.”
옷이 없다고 투덜거리고,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미용실에 끌고 갔던 박성민의 자상함이 살짝 고마웠다.
매일 같은 생활만 반복하다가 색다른 이벤트?
싫을 이유가 없었다.
태수가 소개팅을 선뜻 수락한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갇힌 공간에서 같은 사람들만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가끔 기분 전환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괜찮은 여자가 나오면 얼마든지 연락할 용의도 있었다.
연애나 결혼까지는 아직 생각이 없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오묘해서 단정 지어 판단할 생각도 없었다.
“최태수 씨?”
조심스럽고 맑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슬림하면서도 맵시 있는 정장풍의 옷차림이 세련된 느낌을 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목구비는 한국형 미인에 가까웠다.
거기에 세련된 퍼머머리에 햐얀 피부.
곱게 큰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태수 입장에서는 뭔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 태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신은미 씨?”
“네, 제가 신은미예요. 혹시나 하고 여쭤 봤는데 제가 눈썰미가 좋았네요.”
“반갑습니다.”
태수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자 신은미가 움찔했으나 가볍게 손을 잡아 왔다.
여자의 손.
부드럽고 뭔가 말캉거리는 느낌이다.
이성과 이렇게 만난 건 얼마 만인가?
생각해 보니 대학 시절 외엔 없다.
아예 없다.
‘인생 삭막하게 살았네.’
태수가 내심 중얼거렸다.
악수를 마친 후 태수가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신은미가 의자와 태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태수는 가만히 서 있을 뿐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던 신은미가 혹시나 싶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런 자리 처음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아, 그러셨구나. 일단 앉을게요.”
신은미는 그제야 태수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수가 멈칫했다.
박성민과 도성민이 귀가 아프게 떠들던 예의 때문이다.
태수는 기탄없이 신은미에게 사과했다.
“제가 실례한 거 같습니다.”
“어떤 걸요?”
“의자를 빼 드려야 했는데요.”
태수의 말에 신은미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처음이시라면서요. 그리고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는 것도 부담스럽고요.”
“그럼 다행입니다.”
“아, 네.”
예의상 건넨 말을 태수가 그대로 받아들이자 신은미가 외려 당황했다.
태수는 별다른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곧 예약해 놓은 식사가 나오자 가볍게 스테이크를 썰며 신은미가 말했다.
“여기 정말 분위기도 좋고 식사도 괜찮네요. 대전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호호. 그런데 태수 씨는 식사를 원래 빨리 하시나요?”
벌써 반 이상 사라진 접시에 대해 묻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 때문에 식사 시간이 좀 짧은 편입니다.”
“도성민 씨가 의과 시절부터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의사시라고요.”
“네.”
태수의 짧은 대답에 신은미는 또 한 번 당혹감을 맛봤다.
그러나 계속 미소를 그리며 이어서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의과가 전공이세요?”
“외과입니다.”
“어머, 외과는 다들 힘들다고 하던데요.”
신은미가 묻자 태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가끔 생각해보면 정말 힘듭니다.”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의사란 직업은 참 매력적일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일하시면서 불편한 점도 있나요?”
신은미가 관심을 보였지만 태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없는 일은 없잖아요.”
“굳이 말씀드린다면 자다가 응급 환자 때문에 출근할 때도 있고, 수술이 길어져서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정도겠죠.”
태수의 대답에 신은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서 물었다.
“의사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면 아무래도 돌아오는 게 많지 않나요?”
“수술비나 치료비라는 게 워낙 일정하지 않아서요.”
“그럼 외과 의사분들이 힘들다는 말도 진짜인가 봐요.”
“그렇죠. 개원했다가 다시 병원으로 들어오신 선배들도 많이 계시니까요.”
태수는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신은미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져 갔다.
“집에 계실 시간이 별로 없으시겠네요.”
“어쩌면요. 응급환자가 오면 곧장 달려가는 신세라서요.”
태수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잠시 생각하던 신은미가 넌지시 물었다.
“외과도 성형외과나 미용피부외과는 그래도 좀 괜찮다던데요. 태수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매력적인 의과들이죠.”
“그럼 태수 씨도 성형 같은 것도 하세요?”
신은미가 혹시나 싶은 얼굴로 묻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경험을 쌓는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 같긴 합니다.”
“그럼 곧 전문의 시험인데 그쪽으로 전문의를 취득하실 건가요?”
“아니요. 외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 과요?”
신은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태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흉부외과를 생각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외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좀 더 폭 넓게 생각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떤 미래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태수가 외려 묻자 신은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결혼이나 자녀에 대한 미래를 말하는 거예요.”
“지금 수입으로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죠. 호호.”
어색한 미소를 지은 신은미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으나 태수는 태연자약했다.
“여기 고기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