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94
00497 497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본 후에야 태수는 근처 모텔에 방을 잡았다.
평소라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
몸은 그만큼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신은 이상하리만큼 멀쩡했다.
황 노인과의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 탓이다. 그건 태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점이기도 했다.
부스럭.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천장에 시선을 향했다. 분명히 고민을 털어 내려 온 곳인데 오히려 걱정이 쌓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스스로 인지하고 부딪칠 일인지도 몰랐다.
태수는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태수는 남은 이틀을 모두 낚시터에서 보냈다.
혹시나 황 노인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건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었다.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운 채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찌가 사라지는 것도 몰랐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서 태수는 생각했다.
현대 의학에서 의사가 해야 할 촉진과 시진 등이 점차 도태되어 가는 이유가 뭘까.
그건 정확한 병명을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최신 검사 기계들이 그 일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런 편리성이 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에서도 기계적인 검사를 우선시하게 했다.
왜?
무엇보다 안전했다.
환자가 아닌 의사가 안전하단 의미였다.
그 대가?
수많은 응급 환자의 죽음이다.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적어도 의사 가운을 입은 이상 무심할 수 없는 숙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태수가 각종 검사를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게 검사하는 게 병을 더 확실히 알아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단, 그런 절차를 무시할 수 있는 경우에도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아직은 레지던트다.
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었다.
전문의를 취득한 후라면?
이야기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
급하게 생각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태수는 우선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아직은 해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다시 출근날이 되었다.
태수가 하석준 팀장에게 자가용 키를 건네며 공손히 인사했다.
“너무 잘 썼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보다 내가 알려 준 방법이 고민을 정리하는 데 효과가 있었나?”
“아주 좋았습니다. 저도 낚싯대 하나 장만하고 싶을 정도로요.”
태수의 대답에 하석준 팀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다음에 같이 한번 가지.”
“네. 한 수 배워야죠.”
“그래, 그렇게 하자고. 자, 그럼 푹 쉬었으니까 힘차게 일하러 가 볼까?”
“가시죠.”
태수는 얼른 앞서서 하석준 팀장을 안내했다.
물론 고민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석준 팀장이 권유해 주어 황 노인을 만난 만큼 감사함도 있었다.
머리가 개운해진 후에는 순수하게 낚시만 즐기고 싶기도 했다.
태수의 고민이 현실이 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컥!
신속대응센터 응급실 문이 떨어질 듯이 열리면서 동시에 119구급대원들이 들이닥쳤다.
“환자 왔습니다!”
“여기 좀 봐 주세요!”
스트레쳐카를 좌우에서 밀며 구급대원들이 소리쳤다.
굴러 오던 스트레쳐카 위에는 새우처럼 몸을 잔뜩 만 채 기절한 환자가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익숙한 신속대응센터 의사들은 다급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경상자 전담 의료진들이 신속하게 다가갔다.
“환자는 이쪽으로…….”
그 모습을 멀리서 태수와 박성민이 확인했다.
박성민이 먼저 태수에게 말했다.
“이쪽이 좀 한가하니까 저쪽이 엄청 바쁘네.”
“지원이라도 좀 나갈까요?”
“자식이 말을 못하게 하네. 가서 도와주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 환자 보다가 응급 터지면 손 놓고 올 거야?”
박성민이 뚱하니 묻자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와야 되긴 하지만 찝찝하겠죠.”
“그걸 아는 놈이 그래? 그런 이유 때문에 조금 갑갑하더라도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거라고.”
“하긴요.”
“그리고 차라리 저쪽이 바쁜 게 나아. 적어도 숨넘어갈 환자는 아니라는 거잖아.”
박성민의 말에 태수도 동조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생각은 여기 서 있어야 한다는데 나도 자꾸 몸이 움찔거리기는 한다.”
박성민이 슬쩍 속마음을 비치자 태수가 빙그레 웃었다.
똑같은 마음이다.
역할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기에 먼저 나서지 않을 뿐이다.
차분한 얼굴로 서 있던 태수가 천천히 응급실 뒷문을 향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봤는지 박성민이 태수에게 얼른 물었다.
“야, 어디 가?”
“화장실이요.”
“그래. 시원하게 일 보고 와라. 커피도 한 잔 가져오고.”
“물론입니다.”
태수는 당연하단 듯 선뜻 대답했다.
잠시 후.
태수가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응급실 뒷문을 통해 들어왔다.
한결 가벼운 얼굴로 1팀 구역으로 걸어가던 중에 안색이 변했다.
“음.”
제일 먼저 1팀의 부산한 움직임이 시선에 잡혔다.
박성민과 양승일, 배정환과 조현정 간호사가 환자를 두고 소리를 높였다.
“IV, injector(주사기)!”
“여기요.”
박성민이 신중하게 IV를 연결했다.
이어서 혈액을 채취하고는 배정환에게 건넸다.
“이거 빨리 돌려 봐.”
“잠시만요!”
배정환이 낚아채듯 받아 들고 빠르게 달렸다.
그사이 박성민이 양승일에게 말했다.
“양 선생은 이 환자분 속이 어떤지부터 CT하고 MRI로 확인해 줘.”
“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양승일이 스트레쳐카의 고정 장치를 신속하게 제거했다.
그사이 태수가 도착해 박성민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도 몰라.”
“네?”
“저쪽에서 건너온 환자인데, 정보가 거의 없어. 119에 본인이 신고하자마자 의식불명 상태란 전달 사항이 전부야.”
박성민의 말에 태수가 눈을 끔뻑거리며 환자를 바라봤다.
40대 중,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환자다.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채 기절해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시선을 돌린 태수가 박성민에게 질문을 이어 갔다.
“가족은요?”
“몰라. 독신인지 기러기 아빠인지. 환자가 깨어나지 않아서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승일아, 멀었냐?”
박성민이 재촉하자 양승일이 얼른 대답했다.
“다 끝났습니다.”
“자식, 너 굼벵이 좋아하지 말라고 했지. 얼마나 처먹었으면 네 몸이 굼벵이보다 느려, 인마.”
“죄송합니다.”
“죄송할 시간에 좀 움직이시라고요. 검사 시간 늦어져서 환자에게 이상 생기면 자네가 책임지실 것도 아니잖아요.”
박성민이 날카롭게 다그치자 양승일은 손을 더욱 바삐 놀렸다.
브레드 김과 도성민이 수술에 들어간 상황이라 대신 남은 양승일이 치이는 중이었다.
양승일은 거센 구박 속에서도 묵묵히 스트레쳐카 고정 장치를 풀어 갔다.
그사이 태수의 시선은 환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입가에 위에서 역류한 노란 위산이 보였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냄새가 자극적으로 풍겨 왔다.
그 냄새를 맡은 순간 태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동시에 양승일이 외쳤다.
“출발하겠습니다!”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태수가 만류했다.
“잠깐!”
“네?”
“잠깐만.”
태수는 양승일을 멈춰 놓고 환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구토한 흔적과 비릿한 냄새.
단순히 위액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다.
그 점이 태수의 말초신경을 강하게 자극했다.
태수는 얼른 청진기를 귀에 꽂고 청진판을 환자의 배에 댔다.
꾸르르륵.
위와 장에서 쉴 새 없이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나 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어서 간과 신장까지 청진기로 꼼꼼하게 확인했다.
태수가 환자를 살피는 사이 박성민의 얼굴이 어이없이 변해 갔다.
“인마, 너 여기서 시간 끌면 어쩌자고.”
“…….”
태수는 그런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지 청진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어 손으로 위와 간, 신장 등을 차례로 눌러 봤다.
위는 퉁퉁 부어서 손가락이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간과 신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거 설마…….’
뭔가 직감이 든 태수의 눈빛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때였다.
심각한 태수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환자의 바지춤에서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풍겨 나온 탓이었다.
바로 태수 옆에 있던 박성민은 코를 슬쩍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음? 아……. 이거 참, 실례가 많으신 환자분이시네.”
박성민이 씁쓸한 얼굴로 변할 때였다.
태수는 그 진한 냄새 속에서 뭔가 이질적인 냄새를 느꼈다.
구토, 설사, 복통으로 인한 기절.
태수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확인한 증상들이 뒤엉켰다.
한국에 돌아온 후 태수가 가장 먼저 확인했던 건 자생하는 야생 독초와 독버섯, 독충에 대한 종류와 작용, 그리고 처치 방법이다.
카슈미르에서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한 아이, 사비가 아직 가슴에 한처럼 맺혀 있던 탓이다.
다시는 그런 경우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태수는 독초와 독버섯, 그리고 독충에 대한 걸 항상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한국에서 자생하는 독버섯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같았다.
아직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모든 증상이 일치했다.
태수는 확신을 내리려는 순간 멈칫했다.
아무런 검사 결과가 없는 상황이다.
옆에는 전문의인 박성민이 있다.
선배를 뒤로하고 검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확진을 내리는 게 과연 현명할까?
태수는 그 점에 있어서 작은 망설임이 떠올랐다.
그러나.
낚시터에서 황 노인과 나눈 대화의 핵심이 생각났다.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르는 환자를 검사하느라 치료할 시간을 놓칠 순 없었다.
태수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 환자가 먹은 독버섯은 치명적이다.
직접 오장육부를 청진하고, 코로 후진하고, 손으로 촉진한 결과를 믿어야 했다.
시간이 없다.
휙!
결정을 내리고 청진기를 재빨리 귀에서 뗀 태수가 빠르게 손을 들었다.
“송 간호사님, 카트!”
“가요!”
조금 떨어져 있던 송현미 간호사가 재빨리 의료 카트를 끌고 날듯이 다가왔다.
카트가 도착한 순간 태수는 환자 주변으로 커튼을 쳤다.
얼른 커튼 안쪽으로 들어온 박성민이 태수를 나무랐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검사부터 빨리 받고 무슨 병인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뭐가 그럴 시간이 없어?”
박성민이 의아하게 묻자 태수는 바로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 중독 증상입니다.”
“중독?”
“선배님, 죄송하지만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수는 양해를 구하고 송현미 간호사에게 말했다.
“위세척 준비해 주세요.”
“바로 가져올게요.”
송현미 간호사가 빠르게 커튼 밖으로 나가자 태수는 양승일에게 말했다.
“양 선생, 혈액투석 준비해 줘. 최대한 빨리!”
“네? 아, 네.”
양승일이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박성민이 태수에게 말했다.
“태수야, 너 너무 급한 거 아니야?”
“최대한 빨리 조치해야 합니다.”
“중독이라고? 어떻게 검사도 하지 않고 그걸 알아?”
“제가 전에 사비란 아이에 대해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태수가 묻자 박성민이 멈칫했다.
사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태수가 보였던 그 허무하고 무기력했던 눈빛은 절대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성민이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혹시 독충에 물린 거야?”
“한국에 그런 독충은 없습니다.”
“그럼?”
“독버섯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센 놈으로요.”
태수의 말에 박성민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건 예상이잖아. 인마, 최소한 피검사 결과라도 확인하고 움직여야지.”
“그사이에 숨넘어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태수가 낮게 소리치자 박성민이 움찔했다.
“그, 그러면 큰일인데.”
“선배님,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뭐, 뭘 해야 되는데?”
“환자분을 씻겨 드려야죠. 입도, 바지 속도요.”
태수의 말에 박성민의 얼굴이 순간 울상으로 변했다.
“그게 더 큰일인데.”
하지만 울상 가득한 얼굴로도 손을 빼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