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
00005 5화
혈압이라는 건 수축기와 이완기가 있다. 그걸 아무런 도구도 없이 예측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태수의 놀람이 가라앉기도 전에 노인이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아까 진단……. 좋았는데……. 거기에 hepatorrhexis(간파열) 소견도……. 추가. 윽! 쿨럭!”
노인이 다시 거칠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멈췄던 피도 다시 터져 나왔다.
애써 침착해진 태수의 멘탈이 당연히 흔들렸다.
“어떻게든 3분 안에 와요!”
구급대원에게 소리친 후 휴대폰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태수가 빠르게 노인의 어깨를 잡았다.
기침을 하더라도 최대한 움직임을 덜하게 할 요량이었다.
몇 번의 토혈을 더한 후에야 노인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얼굴은 처음보다 더욱 창백한 상태다.
태수가 빠르게 남은 식수로 입을 헹궜지만 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쇼크 상태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제야 태수는 그의 상태가 짐작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걸 인지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문득 드는 두려움이 온 몸을 엄습했다.
어떻게 해야 되지?
고민 아니,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더듬더듬.
떨리는 손을 억지로 뻗은 태수가 가방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간신히 열어젖히자 압박붕대와 거즈, 밴드류 그리고 알콜과 빨간약이라 불리는 ‘포비돈요오드액’ 뿐이었다.
태수는 반사적으로 가위를 집어 들었다.
서걱!
노인의 웃옷을 그대로 잘라냈다.
“아!”
태수가 탄식을 토했다.
상상이상으로 환자 상태가 안좋았기 때문이다.
하얀색 피부여야 할 부분들이 온통 퍼렇고 꺼먼 멍들로 가득했다. 십중팔구 부러진 갈비뼈들이 오장육부를 찔러댄 흔적이다.
태수는 아찔했지만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다독이며 차분한 손길로 그 위를 가볍게 더듬거렸다.
“휴.”
나오는 건 한숨이다.
위, 간, 폐가 파열됐다고 판단됐다.
응급상황중에 최악이다.
태수는 자신이 알고있던 모든 의학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했다.
이럴땐?
정말 침착하기 힘든 현실이지만 최대한 냉정하려 모진 공을 들여야했다.
가장 손상이 심한 부분을 압박해 pain(고통)을 줄여야 했다. 그게 태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급술이다.
그걸 알기에 노인의 상체를 더듬는 태수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태수의 모든 의식이 손끝에 집중됐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바람소리도 사라지고, 시야를 어지럽히던 다른 것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이 작은 공간에 오로지 태수와 노인만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 정도로 고도의 집중력을 보인 태수의 시선에는 미동도 없었다.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은 눈빛과 흔들리지 않는 손끝만이 노인의 상체로 향해 있을 뿐이다.
힘겨운 숨을 토하던 노인이 태수를 보고 살짝 눈빛이 빛났다.
노인의 눈빛에 비친 태수의 모습은 순수했다. 그뿐이 아니라 뭘 하고 있는지도 대충 예상한 모양이다.
살리기 위한 열정.
오직 그 모습만이 태수에게 보였다.
‘나도 저렇게 순수했을 때가 있었나?’
노인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찾지 못한 듯 눈빛이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태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은 상황인데 그 집중력에 빨려 들어가 아픔까지 무뎌진 느낌이다.
초면에 이름도 모르는 청년이다.
아는 것이라고는 ‘인턴’이라는 것뿐이다.
헌데 인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오로지 지금 죽어가는 자신만을 위한 행동이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속으로 생각하던 노인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때 태수의 손가락이 노인의 오른쪽 배 부분을 눌렀다.
“크윽!”
노인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태수가 깜짝 놀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자네……. 거기가 어딘지……. 알고 누르는 건가?”
“네?”
움찔한 태수가 얼른 손을 뗐다.
동시에 노인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눌러!”
“네!”
태수가 얼떨떨한 얼굴로 얼른 다시 눌렀다.
노인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 느껴진 터였다.
스스로도 얼떨떨해하는 사이 노인이 물었다.
“거기가……. 어딘지 모르나?”
“지금 말씀을.”
“대답……. 이나 해. 시간……. 없어.”
노인의 목소리에 깃든 묵직함이 남달랐다.
여러 의과의 교수들과도 이야기를 해 봤지만 이런 무게감은 없었다.
그 기백에 말려든 태수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간입니다.”
“왜……. 거길 눌렀지?”
“가장 심하게 파손된 거 같았습니다.”
“그럼 누르면 더……. 아프지 않을까?”
“pressure palsy(압박마비)를 시도한 겁니다. 부러진 갈비뼈 조각이 없었으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요.”
“인턴……. 주제에.”
노인의 목소리에서 핀잔이 흘러나왔다.
태수는 외려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건방지죠?”
“기분 나쁘지……. 않나?”
“하루에 수백 번씩 듣는 말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잘 했어. 훌륭해.”
노인의 칭찬에 왠지 태수 어깨가 부푸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만, 지금 대화를 많이 나눌 상황은 아닌 거 같습니다.”
“지금……. 아니면 못 해.”
“네?”
태수 얼굴이 의아하게 변하자 노인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hopeless discharge(호프리스 디스차지)야. 여기가 병원은……. 아니지만.”
가망 없는 퇴원을 뜻하는 의학용어다.
얼핏 예상한 태수지만 억지로 딴죽을 걸었다.
“보호자도 없고, 집도 아니지 않습니까. 죽다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보호자는……. 이름 모를 청년이고. 집은……. 이 정도 산이면……. 나쁘지 않아.”
“이렇게 말씀을 잘하시는데 무슨 끔찍한 소리십니까!”
태수가 울컥해 소리쳤다.
희망이 잃어버린 환자는 살아날 수 없다.
의사가 하는 일도 환자에게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일이다.
그 희망이 깃든 환자만이 치료를 성실히 받고 살아난다.
그걸 강조한 태수라는 걸 알지만 노인은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양 의학에서는 죽기……. 전에 마지막 불꽃을……. 피운다고 하던데.”
은유적인 표현이라도 인턴인 태수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노인의 상처를 압박하던 태수 손길이 다시 떨렸다.
덜덜덜.
정신없이 처지하느라 잊었던 두려움이 얼굴에 드러날 무렵 노인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음이라는 거, 막상 내 앞에……. 닥치니까 참 두렵군.”
“…….”
“내 손이 죽음으로 내몰고간……. 사람만 수백 명이 넘지?”
“저기, 그럼.”
태수가 조심스럽게 말에 끼어들자 노인이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건 상상에……. 맡기도록 하고. 전공은 정했나?”
“아니요. 아직.”
“그럼 다른 질문을 할까? 지금 내 터진……. 간을 누른 기분이 어떤가?”
“두렵습니다. 도망가고 싶고, 바지에 오줌 지릴 정도로요.”
솔직한 태수의 대답에 노인이 이해한다는 듯이 눈을 살포시 깜빡이며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왜 안 도망가지?”
“비록 인턴이지만 의사잖아요.”
“겨우 그 면허증……. 하나 때문에?”
“정말 도망치고 싶습니다. 정말요.”
버럭 소리치는 태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환자를 위해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노인의 결정적인 한마디에 감정이 복받쳤다.
떨어진 눈물이 노인의 볼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노인의 입꼬리가 힘겹게 움직이며 조금 더 밝은 미소를 보였다.
“그래. 환자를……. 무서워해야 돼. 두려워하고 손발이……. 떨리는 공포도 느껴야지.”
“…….”
“거기서 도망치지……. 않아야 진짜 의사가 되는 거야.”
“진짜 의사는 개뿔.”
반항적인 태수의 말투에도 노인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언제고 어느 때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올 거야. 그땐 지금을……. 떠올려. 환자가 의지할 사람은……. 자네 한 사람 뿐이라는 걸 말이야.”
“죽어가면서 그딴 말이 나옵니까? 차라리 있으시다면 신이란 존재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을 해요!”
“그런다고……. 달라지나?”
“…….”
태수의 입이 순간 다물어지자 노인이 이어서 말했다.
“말했잖아. 내 손으로 죽은……. 환자들 수가 너무도 많다고.”
“그래서요?”
“그때 느끼지 못한 그……. 절망을 지금 느끼고 있을 뿐이야. 의사가 아닌 환자로써.”
“그게 뭐가 대수라고요.”
태수는 불안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말 상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