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07
00510 510화
그나마 리도카인(국소마취제)는 있었다.
주사실을 시작으로 보건소를 꼼꼼히 둘러보던 중이었다.
태수가 어느 방문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순자에게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한 방인 탓이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간 태수의 얼굴이 보건소에 온 후 처음으로 밝아졌다.
이곳은 바로 수술실이다.
비록 먼지가 가득하고 잡동사니들이 군데군데 늘어져 있지만 분명히 수술실이다.
수술대도 있고 그 위에 조명이 있다. 녹이 슨 의료 카트도 보였고, 각종 약이나 수술 도구를 보관하는 서랍장도 두 눈에 분명히 보였다.
그걸 바라보는 태수의 흐리멍덩한 두 눈이 서서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치 삶의 이유를 찾은 것 같은 표정이다.
이대로 방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얼른 팔을 걷어붙인 태수는 수술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잡동사니는 창고로 옮기고, 먼지는 걸레로 닦아 냈다.
얼마나 묵은 먼지인지 닦아 내고 닦아 내도 걸레는 시꺼멓게 변했다.
그럴수록 더욱 힘을 실어 빡빡 닦아 낼 뿐이었다.
진료실에서 무기력했던 태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의욕이 넘쳐났다.
그리고 귀신 나올 것같이 폐허가 되었던 수술실은 아주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태수는 보건소 2층으로 올라왔다.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원룸이 펼쳐졌다.
기본적인 살림살이는 갖춰져 있었고, 자그마한 TV도 보였다.
수술실을 청소하느라 온몸에 먼지와 땀이 가득했다.
샤워부터 마친 태수는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리고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XX년 XX월 XX일
보건소 근무 1일 차.
환자 0명.
특이 사항. 보건복지부에 건강 마을로 추천할까 고민 중.
업무 일지라기보다는 간단히 하루 일과를 요약 정리해 놓은 일기와 같았다.
작성을 마친 태수는 다시 한 번 눈으로 읽어 보고 입맛을 다셨다.
다음 날.
진료 시간에 맞춰 태수가 진료실에 자리했다.
“오늘은 한 명이라도 오겠지.”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보던 태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환자가 없다면?
한가한 휴식이 기다린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이 남는다면 요새 들어 흥미를 느낀 의료장비없는 진료를 연구하기도 편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동안 시간에 쫓겨 제대로 공부하지못했던 의학지식도 제대로 파고들 수 있다.
이상한 건 분명히 좋은 일인데 뭔가 허전하다.
“후후.”
태수가 웃고말았다.
그는 의사다.
달리 말해 힘들고 아픈 환자를 보살펴야 하는 의사다.
더욱이 신속대응센터에서 분초를 다투며 살리기위한 사투를 거듭한 날이 아직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신속대응센터에서는 힘들고 괴로워도 보람이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환자가 보고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물론 환자를 보고나면 골치아픈 일이 기다린다.
길건 짧던간에 치료가 이어져야 하고 그에 따라 가슴을 졸여야했다.
그래도 보고싶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연이어 오고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태수는 반사적으로 시계부터 확인했다. 이제 9시가 조금 넘은 걸 보니 환자일 가능성은 적었다.
떨떠름한 미소를 지은 태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곧 문이 열리고 이경미 간호사가 훌쩍 들어오자마자 엉뚱한 소리부터 늘어놨다.
“어제 저쪽 창고 청소하셨어요?”
“청소하고 보니까 수술실이던데요.”
“말씀을 하시죠.”
“그냥 둘러보다가 시작한 거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수가 대답하자 이경미 간호사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쉬세요.”
“아, 이 간호사님.”
“왜요?”
이경미 간호사가 뚱하니 바라보자 태수가 궁금했던 대목을 물었다.
“보건소 내에 있는 의료 품목이나 비품 목록을 좀 확인할 수 있습니까?”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태수는 어설피 미소를 지었다.
반면, 이경미 간호사는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란 정말 힘들었다.
탁.
진료실 문이 닫히자 태수는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보통 종합병원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선 뭔가 어색한 부탁이었다.
태수가 고개를 흔들고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환자가 없다고 마냥 놀 수는 없다. 언제 어느 때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사람이 바로 응급환자다.
의료품이 뭐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파악해 놓아야 한다.
한가할 때 최악을 대비하는 게 옳았다.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치는 동안 적지 않은 경험이 준 선물이기도 했다.
잠시 후, 태수의 손에는 이경미 간호사가 가져다준 목록표가 들려있었다.
병원에 비치된 의료 도구와 비품 내역을 확인하던 태수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완전히 엉망이네.”
수술 도구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고, 하다못해 가장 기본적인 압박붕대나 소독약도 턱없이 적었다.
그리고 주사약도 주사실에서 확인한 게 전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했지만 역시나의 결과였다.
이대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아차 하면 약이 없어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치명적인 사안이다. 더구나 이런 오지에서 시간 지체는 더더욱 안 될 말이다.
태수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삼척시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태수의 담당자 명함이다. 명함 아래쪽에는 삼척시 보건소 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태수는 이미 켜져 있는 컴퓨터로 다가가 문서를 열고 필요한 목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타다닥.
조용한 진료실에 타이핑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태수는 보건소에서 비치해야 할 최소한의 물품들만 작성했다.
약 5분에 걸쳐 작성을 마친 후 몇 번의 확인을 통해 부족한 걸 추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확인을 마친 태수는 바로 삼척시 보건소로 메일을 보냈다. 이어서 전화기를 들어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네. 삼척시 보건소 김석철입니다.”
귀에 익은 담당자의 목소리다.
동시에 어제 봤던 그의 얼굴도 떠올랐다.
40대 초반?
전형적인 공무원 타입이었다.
태수는 부드럽게 안부부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최태수입니다.”
“아, 최 선생님. 거긴 어떠십니까?”
“조용하니 좋네요.”
“제가 정말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석철의 말에 태수가 살짝 맞장구를 쳐줬다. 부탁하는 입장이니 상대방과 좋은 관계는 필수사항이었다.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게 문제긴 하지만요.”
“그러시군요. 그보다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제가 메일로 문서를 하나 보냈습니다.”
“그래요? 잠시만요. 확인 좀 하고요.”
김석철의 목소리가 잠시 멀어졌다.
태수는 수화기를 들고 기다렸다. 그러자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김석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음, 확인했습니다. 여기 보니까 이런저런 의료 물품이나 비품들이 적혀 있네요.”
“네. 이쪽에 당장 필요한 의약품입니다.”
“그런가요?”
김석철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뜨뜻미지근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좀 곤란할 거 같은데요.”
순탄했던 대화에 대뜸 제동이 걸리자 태수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곤란하다니요?”
“보니까 뭐, 당장 필요한 것도 없는 거 같네요. 어제 도착하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거기 보건소가 상당히 한가한 곳입니다.”
“한가한 건 저도 아는데, 당장 필요한 게 없단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태수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낮아졌다. 그러나 상대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덤덤하게 대답했다.
“환자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천천히 준비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 올지 모르니까 준비를 해 놔야죠.”
“말씀은 옳지만 저희 쪽도 예산이 그렇게 넉넉한 게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예의를 갖추는 김석철의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서 귀찮음이 가득 느껴졌다.
원만하게 대화로 풀려던 태수의 눈빛이 사나워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으시다라. 혹시 압박붕대 한 상자 여분도 없으십니까?”
“음.”
“아니면 tetanus vaccine(파상풍 백신) 앰플이 10개도 없나요?”
“최 선생님,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씀하실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 드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좀 달라는 거 아닙니까.”
김석철의 목소리가 점점 삐딱하게 변했다.
그동안 억지로라도 대화의 장을 열던 태수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환자를 위한 약이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보급을 미룬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드리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기다리시라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네?”
김석철이 황당한 목소리를 냈지만 태수는 더욱 싸늘하게 말했다.
“제가 구매해서 달라는 겁니까? 그쪽 창고에 있는 재고 달라는 거 아닙니까.”
“이걸 저희가 다 가지고 있냐고요.”
“수술 세트 하나도 없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거기에 무슨 수술 세트가 필요합니까. 그 보건소에서 수술했단 소리는 제가 들은 적도 없어요.”
그 말에 태수가 폭발했다.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그동안 수술을 하지 않았으니까 필요 없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당신은 거기 왜 앉아 있습니까?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데.”
“최 선생님,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지나치기는 뭐가 지나칩니까? 각 보건소에 필요한 걸 확인하고 지원해 주려고 거기 계시는데, 지원을 안 해 주겠다면 하는 일이 없는 거 아닙니까?”
태수의 날카로운 지적에 김석철이 만만치 않게 대응했다.
“저희도 그동안 모아 놓은 데이터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 진료소에서 마지막으로 수술한 게 3년 전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거기에 이 품목을 모두 지원하겠냐고요.”
“수술한 적도 없고 환자도 없으니까 수술 세트나 약들은 필요 없다는 겁니까?”
태수가 묻자 김석철이 바로 대답했다.
“천천히 지원해 드리겠다고요. 당장 환자도 없는데 쓸 일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럼 그쪽은 경찰도 소방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말이 그렇게 흘러갑니까?”
“당장 도둑도 없고 불이 난 것도 아닌데 경찰도 소방관도 있을 이유가 없는 거 아닙니까?”
태수가 따지고 들자 김석철의 말문이 막혔다.
“나 참, 이게 그거랑 같은 문제입니까?”
“지금 그쪽에서 말씀하시는 게 더 말이 안 되잖습니까! 환자가 내일 온다고 연락하고 아파요? 아니면 다치고 싶어서 다쳐요? 그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게 보건소고 내가 여기 있는 거 아니냔 말입니다!”
“…….”
“오늘 당장 그거 모두 준비해서 보내지 않으면 보건복지부에 그대로 보고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뚝.
태수는 그대로 통화를 마쳤다.
생각할수록 분이 풀리지 않았다.
다시 전화기를 거칠게 붙잡은 그가 멈칫했다.
“후우! 이놈의 성질머리.”
태수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환자를 위한 대비를 하겠다는데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건 참기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되었다.
잔뜩 흥분한 태수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아 갔다.
그때 이경미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태수에게 말했다.
“선생님, 밖에 삼척시 보건소에서 차가 도착했는데요.”
“나갑니다.”
태수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건소 현관으로 향했다.
진료실을 나가자 활짝 열린 현관이 보였다. 그사이로 캐주얼 차림의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낯선 얼굴들이다.
담당자인 김석철은 보이지도 않았다.
태수가 먼저 물었다.
“삼척시 보건소에서 오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김석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약간은 긴장한 얼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