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12
00515 515화
태수는 지난 일은 개의치 않았다.
이기남 이장에게 듣기로 마을 사람들은 뭔가 사정이 있어서 보건소를 기피하고 여기에 근무하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태수는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았다고 똑같이 돌려줄 만큼 옹졸하진 않았다.
그의 앞에 다가선 태수가 진심 어린 걱정을 보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안사람이 피를 많이 흘려요.”
그 말에 태수가 빠르게 좌우를 둘러봤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건 보건소 현관에 딱 붙어 있는 자동차뿐이다.
태수는 반사적으로 차를 가리켰다.
“혹시 차 안에 계십니까?”
“네, 그래요.”
“가시죠.”
태수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이미 열려 있는 뒷좌석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봤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뒷좌석에 길게 누워 있었다.
시트를 적신 출혈량이 상당했다.
“으으음.”
어지러운지 신음 소리도 상당히 가늘게 들려왔다. 태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중년 여인의 안색부터 확인했다.
정상인에 비해 너무도 안색이 하얗다.
바로 목 옆쪽에 있는 경동맥을 통해 맥박을 확인했다.
꿈틀꿈틀.
힘차게 뛰어야 할 맥박이 너무도 미약했다.
출혈이 상당하다는 증거다.
태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면서도 겉으로는 부드럽게 환자의 의식 상태부터 확인했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서…… 생님.”
“네, 저 보건소 의사 맞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 이민경이…….”
존대를 했지만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태수는 그 정도로 의식 상태를 얼추 짐작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이 흐려지는 중이다.
아직까지 의식을 놓지 않았지만 시간 여유가 충분한 상황은 아니었다.
태수가 이어서 물었다.
“피가 어디에서 나오나요?”
“어…… 엉덩이요.”
“엉덩이요?”
끄덕.
가느다랗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말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는 모양이다.
태수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이 정도로 대량 출혈이 항문에서 일어났다는 건 정말 좋지 않은 징조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직장 혹은 대장에 생성된 암 덩어리가 터졌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도 빠르게 조치해야 할 상황이다.
이건 진료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수술을 해야 했다.
보건소에는 태수가 삼척시 보건소에 버럭버럭 소리쳐 받아 둔 기본적인 수술 도구가 있다.
하지만 혈액팩이 없다.
혈액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특수 냉동고가 있지만 이런 작은 보건소에 그런 고가의 의료 물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혈액은 보관 기간이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입장에서는 언제 발생할지 모를 환자를 위해 혈액을 제공해 줄 리도 없었다.
결론은 여기 보건소에서 수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설명과 달리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태수는 뒷좌석에서 내렸다.
보호자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어, 어때요? 왜 그런 거예요?”
“지금 당장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당신 의사잖아!”
꽈악!
보호자가 버럭 소리치며 태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팔 힘이 어찌나 센지 태수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까칠한 피부와 짙은 구릿빛 피부를 보아하니 어부 같았다.
어부들은 특히나 성정이 불같다.
목숨을 내놓고 바다와 맞서 싸워야 하는 특성 때문이다. 그렇다고 태수가 그 위세에 눌릴 생각은 없었다.
태수는 불같이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삼척에 있는 대형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지체하면 내일 태양 보기 힘듭니다.”
“너, 이 새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그래 놓고 니가 의사야! 너도 그 새끼랑 다를 거 하나도 없어.”
“그 새끼가 어떤 새낀지는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뭐?”
보호자가 울컥하더니 주먹을 뒤로 당겼다.
그때였다.
“이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어느새 다가온 이기남 이장이 보호자를 만류했다.
그러나 보호자는 그런 이기남 이장에게도 으르렁거렸다.
“형님, 말리지 마세요. 이 새끼도 그 새끼랑 다른 거 하나도 없는 새끼니까요.”
“그래도 폭력으로 해결이 안 된다니까.”
“말리지 마시라고요!”
보호자는 이기남 이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시선은 태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꽉 쥔 주먹을 태수의 얼굴에 꽂아 넣을 듯한 흉흉한 분위기다.
그럼에도 태수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이거 놓고 당장 시동부터 거세요.”
“빨리 꺼지라는 거냐?”
“같이 갈 겁니다.”
“…….”
보호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 순간이다.
탁!
태수가 멱살을 움켜쥔 보호자의 손목을 가격했다.
아무리 고된 노동을 해도 단련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윽.”
보호자가 멱살을 풀며 살짝 신음을 토했다. 그 순간 태수의 한마디가 귓전을 울렸다.
“당장 시동 걸고 기다리라고요. 1분 내로 나올 테니까.”
“…….”
“어서!”
태수가 버럭 소리치자 보호자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태수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재빨리 보건소 현관으로 달려갔다.
열쇠가?
2층에 있다.
출혈 과다라면 1초가 아쉽다.
태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옆에 있던 걸레를 손에 감은 채 현관 유리를 부쉈다.
쨍그랑!
깨진 유리 사이로 손을 넣어 잠금 장치를 푼 태수가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기남 이장과 보호자가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리 급해도 유리를 깨 버리다니.
그건 자신들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기남 이장이 보호자에게 말했다.
“빨리 시동 걸어라.”
“네, 형님.”
보호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얼른 차로 향했다.
부르릉.
시동을 걸고 얼마나 지났을까?
보건소 현관문을 박차고 나온 태수가 열린 뒷좌석에 그대로 올라탔다.
동시에 IV를 환자의 팔에 연결했다.
이미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넘게 한 일이다.
IV를 연결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태수는 수액을 최대한 높이 들었다.
턱.
자동차 천장에 손이 닿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운전석에 앉은 보호자에게 소리쳤다.
“출발하세요!”
“아, 네.”
보호자가 서둘러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넣을 때였다.
태수는 밖에 있는 이기남 이장에게 크게 말했다.
“이장님, 문!”
그 의미를 눈치챈 이기남 이장이 대답보다 몸을 먼저 움직였다.
뒷좌석 문이 닫힌 순간이다.
부아앙!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보건소 정문을 빠져나온 승용차가 7번 국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태수가 보호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절대 브레이크에 발대지 말고 무조건 가속페달만 밟아요.”
“그, 그럽시다.”
“신호고 나발이고 무시하세요. 모두 다 말입니다.”
“알겠다고요.”
다급한 마음이라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보호자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승용차의 속도는 순식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 간간이 눈에 띄는 차량들을 추월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끼긱, 끽.
핸들을 좌우로 빠르게 돌리는 통에 차 속은 난리였다.
그 난리 가운데에서도 태수는 한 손으로 수액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환자 위에 올려 둔 주사기를 들었다.
입으로 주사기 보호캡을 씹듯이 빼 버린 태수는 IV에 침착하게 주사했다.
차의 격한 흔들림?
태수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승차감이 최고로 더럽다는 군용차 안에서도 IV를 연결한 경험이 이미 수십 번이 넘는다.
차량의 흔들림에 맞춰 지혈제를 주사한 태수는 고개를 들어 수액부터 확인했다.
최대로 열어 놓았기에 벌써 4분의 1 정도가 들어갔다.
그걸 확인한 태수는 경동맥에 손을 댔다.
두근두근.
수액이 쏟아져 들어가서 그런지 맥박이 조금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안도할 상황은 아니다.
하혈이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도 못했다.
슬쩍 환자 엉덩이 쪽으로 손을 넣어 보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엉덩이에서 손을 뺀 태수의 손이 시뻘겠다.
흡수성이 좋은 시트 옆으로도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 출혈이라면…….
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전하는 보호자에게 소리쳤다.
“더 빨리!”
“비켜, 이 새끼들아!”
부아앙!
보호자의 절규만큼 차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태수는 환자를 향한 시선을 단 한 번도 떼지 않았다.
“조금입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태수는 빨갛게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환자의 팔뚝을 잡았다.
이러면 안 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환자의 손을 잡은 태수는 위로를 멈추지 않았다.
“병원까지 금방이에요. 조금만 견디시면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으으으…….”
환자의 입에서 계속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중요한 건 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미약한 신음 소리라도 좋았다.
태수는 끊임없이 환자에게 말을 걸고 또 걸었다.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수액 때문에 팔이 뻐근했다.
하지만 그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이 순간, 태수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몸이 아니라 오로지 환자뿐이었다.
그렇게 20여 분을 달린 승용차는 삼척시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정문에 들어섰다.
응급실에 차가 급격히 멈춰 선 순간이다.
태수는 보호자에게 수액을 빠르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아, 네.”
보호자가 얼떨결에 받아 들자 손이 자유로워진 태수는 얼른 뒷좌석을 박차고 나갔다.
응급실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태수가 소리쳤다.
“emergency(응급)!”
그 순간 다른 환자들을 보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의 시선이 태수에게 집중되었다.
“뭐요?”
“emergency라고! 스트레쳐카 어디 있습니까?”
태수가 전문 용어로 외치자 멀뚱히 바라보던 간호사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
태수는 대답 대신 얼른 몸을 움직여 스트레쳐카를 끌었다.
소리를 쳤건만 다가오지 않는 의료진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잠시 후.
태수가 스트레쳐카를 끌고 나간 지 5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드르륵.
어느새 스트레쳐카에 이민경을 눕힌 채 태수와 보호자가 양쪽에서 밀며 응급실로 달려 들어왔다.
“여기 수혈팩하고 cardiotonic(강심제) 좀 빨리 부탁드립니다!”
태수의 외침이 응급실을 가득 울렸다.
그제야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다가와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금 그거 따질 때입니까? anus hemorrhage(항문출혈)이 심한 환자입니다.”
“아, 그럼 접수하고 기다리세요.”
의사가 너무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보호자의 두 눈에 핏발이 솟구쳤다.
아프다는데, 최소한 살펴보지도 않는 의사다.
이렇게 무심한 듯 이야기하는 모습에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그가 막 폭발하려는 찰나였다.
그보다 더 빨리 행동에 나선 사람이 있었다.
태수였다.
와락!
의사의 가운을 그대로 움켜잡고 강하게 당긴 태수가 으르렁거렸다.
“pulse(맥박)도 희미하고, 혈압은 측정도 되지 않고, 출혈량은 계산도 되지 않는데 접수하고 기다리라고요?”
“드, 들어온 순서대로 봐 드려야 할 거 아닙니까. 다른 환자분들도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말에 태수가 의사 가운에 적힌 소속과 이름을 확인했다.
-외과 레지던트 배종철
외과란 글자에 태수의 눈이 뒤집혔다.
“배 선생, 응급실에서 최우선 사항이 뭡니까?”
“네?”
“뭐냐고요, 이 자식아.”
태수가 으르렁거리자 배종철이 움찔했다.
“누구세요?”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부터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러니까 순서라는 게…….”
“그거 아냐? 네가 환자보다 먼저 갈 수도 있어. 지금 내 손에 말이야.”
태수의 협박은 진심이었다.
잡아먹을 듯한 그 눈빛을 느낀 배종철이 움찔거렸다.
그때였다.
“무슨 일인데 소란을 피우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말에 태수가 돌아보자 40대에 가까운 의사가 서 있었다.
태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명찰부터 확인했다.
응급의학과장 유승원.
태수는 유승원 과장에게 낮게 말했다.
“초곡리 보건의 최태수입니다. 수혈이 시급한 응급 환자를 모시고 왔는데 한가하게 접수 타령 하시기에 항의 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병원에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알 만한 사람이.”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화를 내고 있으면 환자 상태부터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유승원 과장이 멈칫하자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이 환자 이대로 돌아가시면 책임지실 겁니까?”
“사람이 말을.”
“빨리 보든가, 내가 보게 지원해 주든가 결정하세요. 빨리!”
태수는 두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분노했다.
그 모습에 유승원 과장은 다급함보다 먼저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태수의 손으로 향했다.
손이 새빨간 피로 가득했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유승원 과장은 스트레쳐카에 누운 이민경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