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13
00516 516화
스트레쳐카 옆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 유승원 과장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지금은 태수에게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자칫 환자가 응급실에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유승원 과장은 바로 뒤돌아 응급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당장 수혈팩하고 승압제 가져와!”
“강심제하고 지혈제도요.”
“……강심제하고 지혈제도!”
태수가 덧붙이자 유승원 과장이 눈가를 꿈틀거리며 소리친 후였다.
태수가 말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응급실 의료진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 수혈팩 꺼내 와!”
“약은 준비되는 대로 가져오고, 바이탈 체크도 서둘러!”
“ECG(심전도 모니터) 준비해!”
그렇게 부산해진 모습을 보고야 태수는 아직까지 움켜쥐고 있던 배종철의 멱살을 풀었다.
“컥! 크윽!”
배종철이 목을 문지르며 물러서더니 태수를 차갑게 노려봤다.
그 순간 태수가 싸늘한 눈빛으로 다가가자 배종철의 눈빛이 다시 공포로 물들었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바짝 다가선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따위 정신 상태로 외과? 가운이 아깝다.”
“다, 당신이 뭐라고.”
“뭐?”
태수가 으르렁거리자 배종철이 찔끔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태수는 그런 배종철을 끝까지 노려본 후에야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의료진이 바이탈 확인부터 시작했다.
“혈압하고 맥박이 안 잡힙니다!”
“얼른 수혈팩 달고 강심제부터 투여해!”
“IV가 연결…… 되어 있네요. 투여하고 추가했어요.”
간호사가 얼떨떨해하며 말하자 유승원 과장이 소리쳤다.
“그럼 환자부터 옮겨! 한 명은 보호자에게 접수부터 받아야지!”
“환자 옮기겠습니다!”
드르륵.
스트레쳐카가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그사이 앳된 간호사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태수에게 다가왔다.
“저기…… 요.”
“보호자는 제가 아니라 저분입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간호사는 얼른 사과하고 보호자에게 향했다.
보호자와 간호사가 접수처로 이동했다.
그사이 스트레쳐카는 응급실 한쪽에 도착했고 커튼까지 쳐졌다.
그 속에서 다급한 대화가 들려왔다.
“인공호흡기 설치하고 ECG 부착하겠습니다!”
“아직 혈압하고 맥박 안 잡혀요!”
“혈액부터 짜!”
의료진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응급실을 가득 울렸다.
태수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연관이 없는 병원 응급실에 서 있다.
참아야 한다.
그들도 의사다.
만약 지금 태수가 커튼 속으로 들어간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태수도 그걸 알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조금 더 상황이 악화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상황으로 변한다면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밀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태수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 탓이다.
최소한 맥박하고 혈압이 잡혔다는 소리는 들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새 접수를 마친 보호자가 다가왔다.
“저기, 선생님.”
보호자의 목소리가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태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아까 제가…….”
“무슨 일이 있었나요?”
태수가 먼저 묻자 보호자가 멈칫했다.
“…….”
“지금은 환자 건강만 생각하세요. 아니, 분명히 좋은 소식이 곧 들려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보호자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태수의 귀에 닿았다. 하지만 태수는 그 인사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그런 인사를 들을 때가 아니다.
환자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졌다는 소식이 우선이다.
그렇게 태수와 보호자는 커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커튼 속에서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혈압하고 맥박 잡혔습니다!”
“어디가 문제야?”
“항문에서 출혈이 계속되는 거 같은데요.”
“당장 응급수술 준비해. 보호자 모시고 와서 어떤 상태인지 직접 말씀드리고!”
커튼 안에서 한바탕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다시 의료진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조금 전에 접수를 도와줬던 앳된 간호사가 다시 보호자에게 다가왔다.
“박지석 씨.”
“네.”
보호자가 반응하자 태수가 그를 바라봤다.
이름을 지금 처음 들은 탓이다.
생각해 보니 통성명할 여유도 없었다.
다급한 상황에선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간호사가 박지석에게 말했다.
“잠깐 들어오시라는데요.”
“알겠습니다.”
박지석이 움직이자 태수도 그 옆에 따라붙었다.
힐끔 박지석이 쳐다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태수가 같이 들어가 준다면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한 모양이다.
이내 태수와 박지석이 커튼 속으로 들어갔다.
이민경은 바지가 완전히 넝마가 된 상태로 그 위에 얇은 이불이 덮여 있었다.
한편, 유승원 과장은 태수를 보자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보호자 앞이라 그런 내색을 곧 지웠다.
박지석만 바라본 유승원 과장이 말했다.
“이민경 님은 지금 수면을 유도해 놓아서 잠이 든 상태입니다. 그리고 처음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상태가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고요. 응급수술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지금 외과 전문의가 호출되어 오는 길이니까 곧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위험한 수술입니까?”
박지석이 긴장된 표정으로 묻자 유승원 과장이 쓴 미소를 지었다.
“저희도 그건 아직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세한 건 외과 전문의가 도착해서 다시 확인하고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응급의학과의 특성 때문이라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못한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승원 과장의 말이 이어질 때였다.
아직까지 원인이 파악되지 않았다.
그 말이 태수의 귀에 거슬렸다.
아무래도 그게 확인이 되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태수는 심드렁한 얼굴로 이민경의 배를 가볍게 눌러 봤다.
두툼한 뱃살이 느껴졌지만 꿀렁거리는 혈복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장이나 내장 기관에서 일어난 출혈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태수의 시선이 다음으로 ECG로 향했다.
아직 출혈이 계속되고 있기에 혈압과 맥박은 낮은 상태였다.
단순히 그것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심장의 파장에 따른 미묘한 이상을 살폈다.
그사이 박지석에게 집중한 유승원 과장은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저희가 어떤 조치를 했냐 하면…….”
두 사람이 대화에 집중한 상태라 태수는 조금 더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었다.
좀 더 ECG 그래프를 눈여겨본 태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심장의 이상도 아니고.’
그렇다면 폐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혹시 위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태수는 이민경의 상복부를 슬쩍 눌렀다.
청진기가 없기에 이렇게 촉진으로 확인하는 게 최선이었다.
촉진은 확실히 정확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눈으로만 보는 것보단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손끝으로 위장 부근을 누르거나 꼬집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했다.
청진기로 내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태수는 그렇게 몰래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위장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렇다면?
판단을 내린 태수는 천천히 스트레쳐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민경의 하체를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슬쩍 들춰 그 속을 확인했다.
항문에 드레인을 꽂아 출혈이 사방으로 번지는 걸 막아 놓은 상태였다.
태수는 좀 더 자세히 살폈다.
항문에서 풍겨 오는 냄새가 역겨웠다.
그걸 확인한 태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음, 그랬을 수도 있겠네.’
태수가 머릿속으로 출혈 가능성을 예측하던 중이었다.
“당신, 뭐 하는 겁니까?”
유승원 과장의 나지막한 물음에 태수가 멈칫했다.
얼른 이불을 다시 덮은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불이 떨어지려는 거 같아서 다시 잘 덮어 드리느라고요.”
“음.”
“실례한 건가요? 그럼 가만히 있겠습니다.”
태수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내보였다.
방금 전에 소리치고 화를 냈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유승원 과장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보호자가 옆에 있는 상황이고, 밖에는 다른 응급 환자들이 있다.
괜히 큰 소리를 내서 응급실 위신을 떨어뜨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태수를 노려보는 눈빛이 곱진 않았다.
태수는 외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유승원 과장에게 물었다.
“말씀은 끝나셨습니까?”
“……그럭저럭이요.”
“그럼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태수의 말에 유승원 과장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다시금 떠올랐다.
옆에 보호자만 없었어도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화를 억누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해 보시죠.”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태수가 깊게 고개를 숙이자 유승원 과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불쾌하신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도 다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
“하실 말씀이 많을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환자분이 수술 들어가게 되면 그때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태수가 재차 부드럽게 말했지만 유승원 과장의 표정은 굳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묘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스르륵.
조심스럽게 커튼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말했다.
“과장님, 선생님 도착하셨어요.”
“바로 환자분 수술실로 옮겨. 보호자분, 전 잠시 외과의하고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유승원 과장이 부드럽게 말하자 박지석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셔야죠.”
“실례하겠습니다.”
유승원 과장은 박지석에게 정중히 인사한 반면, 태수를 날카롭게 째려보고는 커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 커튼이 개방되고 레지던트들과 간호사들이 환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태수와 박지석도 그 뒤를 따라 수술실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수술실 앞.
수술실 불이 켜진 걸 보니 수술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애써 안심하려 노력하던 박지석의 얼굴은 다시 불안감으로 물들어 갔다.
그때 태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으실 겁니다.”
“말씀은 고마운데, 지금은 와 닿지가 않네요.”
박지석의 얼굴은 걱정으로 꺼멓게 변색되어 갔다.
부인이 수술 중이라 신경이 날카롭다 못해 뾰족하게 서 있다는 걸 태수도 알고 있다.
그러나 태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말 수술은 무사히 끝날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어디가 아픈지도 제대로 못 보셨잖아요.”
박지석의 목소리가 역시나 날카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수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어머님이 평소 아랫배가 아프시다고 자주 말씀하셨죠?”
“그, 그런데요.”
“직장내에 심한 염증이 있었을 겁니다. 벌써 치료를 받으셔야하는데 차일피일 미루시다가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과다출혈이 진행된겁니다.”
“…….”
박지석의 입이 쩍 벌어졌다.
태수는 그런 박지석을 향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민간요법 같은 걸 여기저기서 듣고 오셔서 많이 해 보셨을 겁니다. 그렇죠?”
“네네.”
“그 민간요법 중에 주사요법 같은 것도 있었을 거고요.”
“그렇죠.”
경악한 박지석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자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 주사가 문제였을 겁니다.”
“그게요?”
“저도 예전에 학교에서 공부할 때 얼핏 본 건데요, 큰일 날 일입니다.”
“…….”
박지석이 침묵하자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