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22
00525 525화
난리를 피우며 달려온 트럭에 오른 세 사람이 멀어지는 걸 지켜봤다.
이내 트럭이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걸 확인한 태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다.
아직도 실망하고 있을 박성민을 위로해 줄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서던 태수는 박성민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헉! 언제 나오셨습니까?”
“방금. 그보다 갔냐?”
“네, 지금 막 갔습니다.”
“그럼 나도 나갔다 올게.”
박성민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술 사러. 내가 이 상황에 맨 정신으로 잘 수 있겠냐고.”
“그럼 그건 제가…….”
“인마, 내가 아무리 돈에 환장한 놈이라도 후배한테 얻어먹을 정도로 각박한 놈은 아니야. 내가 낮에 사 온 안주나 준비해 놔.”
툴툴거린 박성민이 자동차로 향하자 태수가 말했다.
“슈퍼 요기 앞인데 차 끌고 가십니까?”
“그럼?”
“저기 옆에 좋은 거 있습니다.”
태수가 보건소 건물 모퉁이를 가리키자 박성민이 뚱한 얼굴로 생각했다.
술 사러 가는데 오픈카는 역시 모양이 좋지 않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박성민이 보건소 건물 옆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수가 보건소 건물로 들어가려다 또 한 번 놀랐다.
이번에는 이경미 간호사가 서 있던 탓이다.
옷까지 갈아입은 이경미 간호사는 태수에게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퇴근할게요.”
“아, 기척이라도 좀…….”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요. 그보다 가 봐도 되죠?”
“네. 수고하셨습니다.”
“쉬세요.”
이경미 간호사는 가볍게 고개만 숙이고 멀어져 갔다.
너무도 덤덤한 걸음걸이는 오늘 몇 시간 동안 수술을 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태수는 이경미 간호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그렇게 서서 생각하던 중이었다.
찌릉찌릉.
자전거 경적 소리가 들려오더니 박성민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뭔데 지 마음대로 찌릉거려. 그리고 내가 쌀집 배달부야? 자전거 꼬라지하고는. 당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동네라니까.”
그러면서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에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아차 했다.
슈퍼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박성민이 곧 다녀올 터이니 보건소 문단속을 하고 술 마실 준비를 해야 했다.
태수는 다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태수는 2층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낮에 박성민이 사 온 안주를 펼쳐 놓고 잔도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막상 술 사러 간 박성민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태수는 나가 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뭔가 혼자 생각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괜히 사색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들어오시려나.”
풀썩.
안주를 앞에 놓고 옆에 드러누웠다.
무료하게 기다리는 사이 태수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수술로 인해 피곤이 몰려온 탓이었다.
같은 시각.
박성민은 슈퍼 앞 느티나무 평상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함께하는 모습이다.
박성민이 벌게진 얼굴로 막걸리를 들었다.
“자자, 또 한 잔 하시고.”
“의사 선생이 술 잘 마시네.”
“이거, 그사이 의사 선생으로 변한 겁니까? 제가 아까 뭐라고 부르라고 했는지 잊으셨어요?”
술에 취한 박성민이 투덜거리자 마을 사람이 정정해서 불렀다.
“알아, 성민이.”
“그럼요. 저 박성민입니다. 비번일 때는 의사이고 싶지 않은 박성민이 말입니다. 뭐 하십니까? 술 더 드셔야죠.”
“이제 없는데.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다른 이가 슬쩍 자리를 파하려 하자 박성민이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술이 없으면 가져오면 되죠. 슈퍼 사장님, 여기 술 좀 더 줘요!”
“많이 마셨어.”
“이제 시작이죠. 해 진 지 얼마나 됐다고요. 오늘 다들 일찍 집에 들어갈 생각 마시라니까요. 절 이렇게 붙잡아 두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박성민의 말에 마을 사람은 외려 난감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해철을 수술해 줬다는 소식을 듣고 술 한잔 권하려 했던 건데 어느새 자리가 커진 탓이었다.
게다가 박성민은 절대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슈퍼 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가져온 술을 받아 든 박성민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죠? 우리 태수 말입니다, 그놈 대단한 놈입니다. 저같이 수술 수당 못 받는다고 땡깡 부리는 속물도 아니고요. 제가 아주 예뻐라 하는 놈이라니까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됐냐 하면…….”
“알았다니까. 몇 년 동안 밖에 나갔다 왔다며.”
“그게 그냥 해외가 아니라니까요.”
“그래.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 말이야.”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들었는지 이젠 지겹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박성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이 대단한 거라니까요. NGO에서도 인정받은 우리 태수. 특히나 수술에 강한 우리 태수. 그 태수가 있는 한 이 마을은 아주 평안하실 거라는 겁니다.”
“그래그래. 그리고 그 태수가 여기에 온 걸 우리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감사해하진 마세요. 애가 아직 어려서 너무 띄워 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다닐 거니까 적당히 감사해 주시면 됩니다.”
박성민이 느티나무가 부러져라 소리쳐 말하자 마을 사람들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한 번 더 이야기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태수가…….”
박성민은 술이 취할 대로 취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마을 사람들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기에 바빴다.
그래도 저렇게까지 이야기해 주는 선배를 통해 태수가 어떤 의사인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박성민이 하는 이야기를 백 퍼센트 믿진 않았다.
태수의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도 엄청난 경력이었던 탓이다.
그저 후배를 아끼는 선배의 허풍.
지금 박성민의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듣는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 박성민이 신속대응센터로 돌아갔다.
그사이 들려온 좋은 소식은 이해철의 검사 결과에 대한 부분이다.
엑스레이와 CT, 혈관조영술을 진행한 결과 혈행에 이상이 없고 근육도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있다고 했다.
삼척 종합병원 유승원 과장이 태수에게 전화해서 수술에 대해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만큼 깔끔하게 수술이 되어 태수의 기분도 좋았다.
이장에게는 혈액 냉동고 덕분에 수술을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장 또한 자신이 한 일에 뿌듯함을 내보였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었다.
좋은 시간 다 보내고 난 후, 태수는 몇몇 마을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박성민이 느티나무 평상에서 발을 묶어 두고 몇 시간 동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특히나 집요했다.
“어깨가 아프다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근육이나 관절에 문제가 없는 거 같은데요.”
“아프다고. 그렇게 전쟁터에서 사람들 치료해 준 사람이 이것도 파악 못해?”
마을 사람의 감정적인 물음에 태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릅니다.”
“난 무식해서 그런 건 모르겠고, 아프다니까.”
“그럼 제가 진료 의뢰서 써 드릴 테니까 병원으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우리 마을 의사 놔두고 내가 왜 거기까지 가야 되냐고. 진짜 아프다니까.”
그저 막무가내였다.
불쾌하지도 않고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이게 또 사람 사는 맛인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우격다짐 환자를 구슬리고 구슬려 보낸 태수는 진땀을 털어 내야 했다.
“선배님은 참.”
뭐라고 이야기를 한 건지 이젠 태수도 외울 정도였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찾아와 이야기한 탓이었다.
그런 박성민의 행동을 탓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수술 수당이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린 것과 달리 여기서 생활하고 있는 태수를 많이 걱정했다.
그런 이유로 한 일을 탓하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수가 진료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잠시 쉴 때였다.
부우웅.
자그마한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보건소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다.
환자?
“에휴.”
쉴 시간도 자유롭지 못한 태수가 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환자를 등한시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 기운을 차린 태수가 진료 준비를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더니 이경미 간호사가 말했다.
“밖에 손님 오셨어요.”
“환자가 아니고요?”
“나가 보시면 알죠.”
이경미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모습을 감췄다.
태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곧 돌아갈 거라고 해서 그동안은 말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뚝뚝한 건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내방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다.
태수에 대한 평판은 좋아지고 있지만 이경미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건 보건소의 이미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조만간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태수는 진료실을 나섰다.
곧 보건소 현관에 도착한 태수의 앞으로 40대 후반의 남자가 다가왔다.
태수도 알고 있는 얼굴이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같이 판매하고 수리하는 점포 사장이다.
일전에 자전거 바퀴가 펑크 나는 바람에 찾아가서 인사한 기억이 있었다.
이름은 한성천.
후덕한 인상만큼 푸근한 말투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줬다.
태수가 먼저 인사했다.
“한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보다 들어오지 않으시고요.”
“선생님한테 전달해 드릴 게 있어서요.”
“저에게요?”
태수가 자신을 가리키자 한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놈입니다. 어때요, 멋지죠? 300CC에 연비도 좋습니다. 그리고 덩치도 큰 만큼 안전성도 좋고요. 이 정도면 만족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한성천이 사람 좋은 얼굴로 가리킨 건 자신이 타고 온 스쿠터였다.
그의 설명대로 보통 스쿠터보다 큼지막한 사이즈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주문한 적이 없었다.
태수는 눈을 끔뻑거리며 한성천에게 물었다.
“이걸 저에게 주신다니요?”
“어?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전혀요.”
“저도 전화로 거래한 거긴 한데. 좌우간 입금도 모두 됐고 전달해 주라고 해서 알고 계신 줄 알았죠.”
한성천의 얼떨떨한 말에 태수는 머리를 굴렸다.
이걸 누가 보냈을까?
자전거가 구식이라며 투덜거린 박성민일까?
그렇다고 생각하자니 가격이 상당히 비싸 보였다.
태수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물었다.
“입금자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그게 그러니까…… 석정현? 석종현? 좌우간 그랬던 거 같은데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에 태수가 눈을 끔뻑거렸다.
한성천은 그 모습에 다른 오해를 했다.
“석씨는 맞는데, 이름이 그러니까…….”
“아닙니다. 누군지 알 거 같네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좌우간 전 전달해 드렸으니까 이만 갑니다.”
“걸어가시게요?”
태수가 묻자 한성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기 윗집에서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같이 가실래요?”
“아닙니다. 전 감사 전화부터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아, 그러셔야죠. 솔직히 말하면 이 마을에 없는 거라서 제가 시내 오토바이 가게에서 가져온 거거든요. 말이 이상하게 흘렀는데, 좌우간 그만큼 좋은 거라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1년 동안 보장 서비스도 되는 거니까 어디 이상하면 전화 줘요. 갑니다!”
한성천은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하고는 멀어져 갔다.
태수는 한성천이 정문을 나설 때까지 지켜봤다.
그러고 나서야 얼른 휴대폰을 들어 석정현 이사장에게 전화했다.
“최 선생이 어쩐 일인가?”
석정현 이사장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