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3
00054 54화
도성민이 삐쭉거리자 태수가 쓴 얼굴로 대답했다.
“밥 먹을 시간은 있을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선배들한테 아부 몇 마디 하면 빼주겠지. 그보다 교수님이면 이정민 교수님?”
“어. 지금 자리에 계실까?”
“잠깐만, 내가 전화해서 알아보고 올게.”
도성민은 대답과 동시에 수화기를 들었다.
“교수님, 다름이 아니고 최태수 아시죠? ……네. 외과에 이송건 때문에 왔다가 인사드리겠다고 하는데요……. 바로 보내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성민이 바로 고갯짓했다.
태수는 의미를 알아듣고는 찡긋 미소를 지은 후 몸을 움직였다.
의예과 6년을 함께 해온 사이다.
표정만으로도 의사전달이 충분했기에 가타부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태수는 바로 이정민 교수의 방을 찾아갔다.
이정민 교수는 본과 3학년 때 전임교수를 맡으며 인연이 되었다.
또한 태수를 연성대학교 인턴으로 추천한 인물이 바로 이정민 교수였다.
태수는 그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고, 이번 기회에 인사를 드리러 찾아온 길이기도 했다.
도성민이 면담약속까지 잡아놨기에 태수는 바로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정중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운 목소리기도 했다.
태수는 한 번 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본 후에야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정민 교수 모습이 바로 보였다.
호랑이 같이 짙은 눈썹과 다르게 인자한 인상은 여전했다. 본과시절과 다른 점이라면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이정민 교수가 반갑게 태수를 맞이했다.
“이거 태수, 아니지. 최 선생 아닌가.”
“강녕하셨습니까?”
“보다시피 주름만 깊어졌어. 이젠 나도 늙어가나봐.”
“무슨 말씀을요. 아직 20년은 끄떡없으실 거 같습니다.”
태수의 진심어린 말에 이정민 교수는 더욱 환한 미소를 보였다.
“레지던트 되더니 입심이 더 좋아졌어.”
“환자랑 매일 싸우다보니까 입만 발달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자자, 일단 앉자고.”
이정민 교수가 상석에 앉으며 자리를 권하자 태수는 오른쪽 편에 자리했다.
이내 따뜻한 차가 도착했다.
차를 앞에 둔 두 사람이었지만 시선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정민 교수가 먼저 푸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성의료원에 있다지?”
“알고 계셨네요.”
“이래저래 들려오는 소리는 있으니까. 이제 지난 일인데 더 물어야 무슨 소용이겠어. 안 그래?”
배려있는 물음에 태수가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말씀하십시오.”
태수가 정중하게 말하자 이정민 교수가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자네 본과시절에 했던 말과 다르지 않나?”
“어떤 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이쪽으로 오라니까 흉부외과나 외과는 가난한 의사라서 싫다더니. 왜 외과에 있냐는 말이야.”
“아. 그게.”
태수의 입이 순간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존경하는 은사라도 모든 걸 얘기하기에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얘기하는 것도 웃겼다.
그런 태수를 이정민 교수는 더욱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까 모르겠는데, 난 최 선생이 이쪽으로 올 거라고 직감했어.”
“아셨다면.”
“혹시 실습할 때 기억하나? CABG환자 말이야.”
이정민 교수의 물음에 태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기억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수술실에 들어갔던 환자기도 한데요.”
“그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하겠군.”
“아, 그게.”
태수가 슬쩍 말을 얼버무렸다.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생생했다. 그런데 그 기억이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태수는 얼른 이정민 교수에게 사과했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무슨 말을. 내가 그 일 때문에 최 선생을 연성대학병원에 추천했는데.”
“제가 교수님께 대든 거 때문에요?”
태수는 물어놓고는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나 이정민 교수는 푸근한 얼굴 그대로 그때 일을 회상했다.
“CABG 수술 직후에 heart-lung machine(인공심폐기)를 뗐을 때였지? pulmonary arterial pressure(폐동맥압)이 상승하고, tachycardia(빈맥, 빠른맥)까지 왔을 때 말이야. 기억 하나?”
“부끄럽습니다.”
“기억 하나보네. 그때 아주 난리를 쳤었잖아. 뭐라고 했더라. 기억 하나?”
이정민 교수가 얄궂은 질문을 하자 태수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문제가 생겼다고 재수술해야 한다고 소리쳤죠. 그리고 제세동기 준비한다고 난리치고요. 1분도 되지 않아서 환자는 정상으로 돌아왔었습니다.”
“그때 실습 들어온 모두가 최 선생 말린다고 꽤나 고생했지.”
이정민 교수가 덧붙여 말하자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땐 단순 트러블인 것도 모르고, 정말 환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와 얘기지만 면목이 없습니다.”
“난 오히려 그때 알았어. 아, 이 친구는 외과 아니면 흉부외과 의사구나. 라고 말이야.”
“그러셨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자네를 연성으로 추천했지. 거기는 여기보다 배울 게 더 많으니까. 특히나 흉부외과는 전쟁터고. 그리고 내 의도대로 지금은 외과 레지던트잖아.”
“하하. 그러셨군요.”
태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야 자신이 어떻게 연성대학병원 인턴으로 가게 됐는지 확실히 알았다.
전에는 단순히 성적이 좋아서 간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실습생 시절에도 지금처럼 환자를 보면 앞뒤 안 가렸던 기억까지도 떠올랐다.
태수는 요즘 들어 고민하던 문제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그걸 봤는지 이정민 교수가 물었다.
“갑자기 심각해지니까 이상하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한 가지 있습니다. 교수님께 여쭤봐야 풀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들어줘야지. 뭔가?”
이정민 교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진중한 태도가 태수로 하여금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다른 선배들이 조치하지 못할 환자가 왔는데, 전 그걸 조치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태수의 물음에 이정민 교수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확실히 최 선생이 조치할 수 있는 부분인가?”
“네.”
“음. 대답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데 말이야.”
이정민 교수가 조금 뜸을 들이자 태수가 바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CABG 수술을 참관한 그날 말이야. 만약 자네가 뭔가 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
“아마 날 밀어내더라도 뭔가를 했겠지?”
이정민 교수가 답을 요구하자 태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게 했을 거 같습니다.”
“그럼 답은 이미 나와 있잖아.”
“그게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 섭니다.”
태수의 말에 이정민 교수는 서서히 입가에 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우리는 의사야. 경력도 실력도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쌓아가는 사람들이지.”
“네.”
“반대로 얘기한다면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월권보다 값어치 없는 목숨은 어디에도 없어.”
이정민 교수의 진심어린 말에 태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렇군요.”
“의사는 환자만 무서워하고, 환자만 두려워해야 해. 설령 대립하는 상대가 자신의 스승이라도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수 머릿속에 카프레네 말이 오버랩 됐다.
-환자가 의지할 사람은 의사뿐이다.
지금까지는 환자를 피하지 말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맡긴 환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게 바로 의사였다. 그런 의사가 환자를 외면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럼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일들은?
옳은 일이다.
스스로에게 떳떳하니 이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었다.
그제야 태수의 머릿속에 잔뜩 끼었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한층 맑아진 태수 눈빛을 본 이정민 교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뭔가 해결이 된 모양이야.”
“네. 앞으로는 앞뒤 안 가리고 그냥 밀어 붙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너무 밀어붙이면 자네만 힘들어져. 이놈의 한국 의료사회가 그래.”
“그럼 그러지 말까요?”
태수가 피식거리며 묻자 이정민 교수가 외려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밀어 붙여! 남자가 아니, 의사가 말이야. 자기 의술에 대한 소신은 있어야지. 만약 문제가 된다면 찾아와.”
“감사합니다.”
“그럼 대답해준데 대한 선물을 기대해도 될까?”
이정민 교수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돈 혹은 물질적인 선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태수는 바로 알아채고 대답했다.
“좋은 소식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기대하지.”
“꼭 기대해 주십시오.”
태수의 눈빛에 전보다 더욱 다부진 결심이 깃들었다.
그 후 태수는 이정민 교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교수실을 나섰다.
한결 마음이 후련했다.
그 동안 끙끙거렸던 고민이 한 순간 풀리니 주변 풍경부터 새로워진 느낌이다.
“밀어 붙여.”
그 말을 한 번 더 뇌까리며 가슴에 품었다.
물론 무조건 밀어붙일 정도로 안하무인은 태수에게도 곤란했다.
하석준 과장 이하, 외과 의사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는 있다.
태수보다 단 하루라도 의사 생활을 오래했고, 치열한 병원에서 견뎌내고 있기에 그건 당연했다.
그러나.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에게.
또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한 환자에게.
그때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태수는 다시 흉부외과 간호사실에 도착했다.
간호사도 이젠 바로 알아보고는 뒤를 가리켰다.
“다들 휴게실에 계세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태수가 간호사실을 지나쳐 의사 휴게실로 향했다.
원래는 타병원 사람들이 제멋대로 드나들기 힘든 곳이다. 그러나 태수가 이 대학 출신이라는 걸 모두 알기에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의사 휴게실로 들어가자 흉부외과 의사들이 몇몇 자리해 있었다.
의외로 도성민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일년차답게 눈썹을 휘날리며 병원을 뛰어다님이 분명했기에 태수는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의사들을 둘러봤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도 있고, 이제 인턴이 된 후배들까지.
다들 태수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인사는 간단하게 오갔다.
선배들에게는 깍듯하게 그리고 후배들에게는 푸근하게 대하며 태수는 오랜만에 포근함을 느꼈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이고. 다리야.”
한껏 엄살을 부리며 도성민이 들어왔다.
피식거리며 시간을 확인한 태수가 치프인 선배를 슬쩍 불렀다.
“선배님.”
“아아, 그래. 도끼야.”
치프가 별명으로 부르자 도성민은 멈칫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기에 반항하진 못하고 붉어진 얼굴만 헛기침으로 날렸다.
“흠흠. 네. 치프.”
“태수랑 나가서 밥 먹고 와. 한시간 준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30분 후에 SICU(흉부외과 중환자실)들어가 봐야 합니다.”
“반항이냐?”
치프의 스산한 물음에 도성민이 움찔거렸다.
“아닙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라. 아, 술은 다음에 마셔.”
“감사합니다.”
도성민이 인사하자 피식 미소를 지은 치프가 태수에게 물었다.
“태수, 너는 잘 데 있어?”
“차 시간 알아보고 차편이 있으면 공주로 돌아갈까 합니다.”
“비 많이 온다던데. 아침에 그치면 가지?”
동문이라 그런지 몇 번 얼굴보지 않은 태수를 살갑게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