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31
00534 534화
“정식으로 허락이 떨어진 후에 요청할 거야. 물론 최 선생에게는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네요.”
태수가 순순히 승낙했다.
사실 초곡리에서 큰 수술은 불가능하다.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유승원 과장의 제안은 구미가 당긴 탓이다.
태수의 말을 들은 유승원 과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허락해 주는 건가?”
“제가 더 영광입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하군. 실은 꼭 데려가려고 생각했다네.”
유승원 과장이 싱긋 미소를 짓자 태수도 밝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그보다 식사 시간인데 나가시죠. 이 동네에 유명한 식당이야 없어도 맛있는 식당은 있으니까요.”
“가야지. 그리고 내가 사는 거니까 기왕이면 비싼 걸로 먹자고.”
“이건 제가 대접해야죠. 과장님 덕분에 좋은 일도 생겼는데요.”
“그건 아니지.”
“맞다니까요.”
태수와 유승원 과장은 투덕거리며 진료실을 나섰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후 유승원 과장을 배웅한 태수가 보건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수술 수당으로 받은 돈의 일부였다.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예요?”
봉투 속 내용물을 모르는 이선정 간호사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수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제 수술 보조 해 주신 수당입니다.”
“아니, 이건, 선생님…….”
이선정 간호사가 뭐라 말하려는 사이 태수가 먼저 끼어들었다.
“같이 수술했으니까 수당도 똑같이 나눠야죠.”
“그래도요. 고생은 선생님이 다 하셨는데, 이건 아닌 거 같아요.”
“받으시라니까요.”
태수는 아예 이선정 간호사의 손에 봉투를 쥐여 주고는 진료실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이선정 간호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봉투를 내려다봤다. 여태까지 간호사 일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인 탓이다.
가만히 바라보던 이선정 간호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속에 얼마나 들었는지는 솔직히 관심 없었다.
이렇게 간호사까지 신경 써 주는 의사는 태수가 처음이다.
초곡리 보건소로 지원하길 잘했고, 태수가 여기 있어서 더욱 행복했다.
그날 저녁.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하숙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초대해 준 김동석의 부모에게 인사부터 했다.
독감 예방접종 때 얼굴을 봤기에 안면은 있었다.
그리고 노부부 모두 여든에 가까운 나이이기에 태수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
“어르신들, 건강하셨죠?”
태수의 푸근한 인사에 주름이 곱게 진 김동석의 어머니가 얼른 두 손을 잡았다.
“선생님, 고마워요.”
어느새 눈가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태수는 그런 모습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고맙기는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요.”
“그래도 선생님이 없었으면 우리 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건강하셨을 겁니다. 제가 성격이 급해서 빨리 수술한 거예요.”
“그래도 고마워요.”
김동석의 어머니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김동석의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언제까지 배곯은 선생님 세워 놓을 거야. 얼른 들어가야지.”
“아이고, 그렇죠. 내 정신 좀 봐. 선생님, 어서 들어오세요.”
김동석의 어머니가 태수를 얼른 이끌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버틸 수 있는 미약한 힘이다.
하지만 태수는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노부부를 부축하며 이선정 간호사와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고봉밥에 갖가지 반찬이 즐비했다.
특히나 가득 구워진 생선이 고소한 냄새로 코끝을 자극했다.
“앉아서 얼른 잡수셔.”
“먼저 수저를 드셔야죠.”
“손님이 먼저지.”
“그래도 어른이 먼저 드신 후에 숟가락을 들겠습니다.”
태수는 대접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그저 이웃집에 놀러 온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노부부도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까지.
4명이 둘러앉은 후 김동석의 아버지가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먹자고.”
“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태수가 힘차게 대답하곤 고봉밥을 한 수저 떴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동석의 어머니가 잘 구워진 생선을 손으로 떼어 밥 위에 얹었다.
“어서 먹어요.”
“할머니도 참. 저 생선 잘 발라 먹는데.”
“어서 먹으라니까.”
김동석의 어머니가 정겨운 미소로 권하자 태수는 더 사양하지 못하고 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김동석의 어머니는 태수가 한 술 뜰 때마다 갖가지 반찬을 다양하게 올려 줬다. 그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태수는 정중하게 사양하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반찬을 얹어 줄 때마다 김동석의 어머니에게서 미소를 발견한 탓이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너무도 적어 미안한 기색도 보였다.
그런데 태수가 잘 먹어 주니 그나마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그걸 느꼈기에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밥을 뜨고 맛있게 반찬을 받아먹었다.
비록 산해진미야 아니지만 태수는 그 어떤 밥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포근한 정을 담뿍 느꼈다.
그날 이후 태수는 이삼일에 한 번씩 삼척 종합병원 외과 치프인 김준혁과 통화했다.
김동석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입니다. 퇴원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1개월 이내로 가능할 거 같습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혹시 제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호르몬 분비하고 소변량이 좀 불규칙한 거 같으니까 조금 더 유심히 살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틀 정도 지켜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준혁의 정중한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태수는 김동석의 진료 기록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전화로 전달받은 상황을 꼼꼼히 기록해 다음에 김동석이 보건소에 올 때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작성을 마친 후 조금 여유로워진 태수가 한 번 더 둘러보던 중이었다.
이선정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태수에게 말했다.
“초곡 분교에서 연락을 한번 달라고 하던데요.”
“분교요?”
“네. 제가 듣기로도 학생수가 얼마 안되나봐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자연 교육은 아주 최상인 장소인데요.”
“애들이 뛰어놀면 좋은 거죠. 그보다 어떻게 하실래요?”
“전화를 달라면 주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짓자 이선정 간호사가 메모지를 건네고 진료실을 나갔다.
태수는 메모지에 적힌 번호를 바라보며 전화번호를 눌렀다.
뚜루루.
몇 번 신호음이 이어진 후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곡 분교입니다.”
“혹시 조영규 선생님 계십니까?”
“네. 접니다만, 누구신지요?”
“전 초곡리 보건의 최태수입니다. 전화 달라고 하셨다고 해서요.”
태수가 자신을 소개하자 조영규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전화로 인사를 드리네요.”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굴러들어온 입장인데 먼저 인사를 갔어야죠.”
서로 선생 타령 하며 인사하던 두 사람이 조금 어색한 듯 일부러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달라고 하셨는지요?”
“다름이 아니라 아이들 안전 교육을 좀 할까 해서요.”
“안전 교육이라.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태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조영규가 바로 대답했다.
“심폐소생술이라든지, 아니면 실생활에 쓰이는 응급처치법 같은 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그렇군요.”
“갑자기 전화를 드려서 부탁하는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어떻게 안 될까요?”
조영규가 예의를 갖춰 묻자 태수는 잠시 고민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한창 말썽을 부릴 나이이기에 안전 교육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곡리에 소속된 분교이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이내 생각을 정리한 태수가 말했다.
“제가 보건소를 비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이쪽으로 오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당연히 그래야죠. 현장학습을 겸해서 가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시다면 저야 감사하죠. 그럼 일정하고 교육 방법은 각자 생각을 좀 해서 내일 전화로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면 제가 더 감사한 일이죠. 그럼 시간을 정해 주시면 제가 내일 그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조영규의 정중한 목소리가 태수를 더욱 기분 좋게 했다.
“이 시간이 괜찮을 거 같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
“…….”
대화는 끝이 났지만 통화는 계속 연결되어 있었다.
태수가 먼저 말했다.
“먼저 끊으시죠.”
“아닙니다. 선생님 먼저 끊으셔야죠.”
“그건 또 아니죠.”
“아닙니다.”
몇 번이나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한 후에야 어렵사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태수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느낌이 좋은데?”
처음 통화한 상대지만 남을 배려하는 목소리가 특히나 좋았다.
아직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또래 같은 느낌도 들었다.
왠지 죽이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 날.
조영규와 전화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마침 찾아온 환자도 없었기에 태수는 전화기 앞에서 기다렸다.
5분…… 10분…….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전화는 오지 않았다.
태수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그래도 묵묵히 기다렸다.
그것도 잠시였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태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태수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썩 신용하지 않았다. 어제 좋은 기분으로 통화를 했지만 이렇게 되니 기분이 조금씩 상해 갔다.
결국 기다리던 태수가 먼저 전화기를 들어 초곡 분교로 전화했다.
뚜루루.
신호음은 울리는데 누구도 받지 않았다. 한참 만에 수화기를 내려놓은 태수가 곤혹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뭔 시추에이션?”
그러나 생각해 보니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다시 전화가 오면 안전 교육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약간이나마 귀찮은 일을 덜었다고 생각할 무렵이다.
끼익.
문이 열리더니 이선정 간호사가 슬쩍 고개만 내밀며 말했다.
“손님 오셨는데요.”
“환자 아니고요?”
“네, 손님이에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이라지만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 걸 보니 이선정 간호사도 초면인 모양이다.
간단하다.
만나 보면 안다.
“안내해 주세요.”
“잠시만요.”
이선정 간호사는 진료실 문을 열어 놓은 채 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열린 문틈으로 30대 초반의 남자가 자그마한 음료수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가벼운 정장 차림.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키 작은 남자였다.
분명히 초면이다.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얼굴도 아니다.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태수가 먼저 물었다.
“실례지만 어떻게 찾아오셨는지요?”
“선생님, 저 조영규입니다.”
그의 말에 태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전화를 주신다는 분이…….”
“어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런 일은 역시 얼굴을 뵙고 말씀드려야 결례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보다 이거, 약소하지만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요.”
“뭘 이런 걸 다.”
“받으시지요.”
태수는 음료수 상자를 얼른 두 손으로 받아 들자마자 2개를 열었다.
“맛있어 보이네요.”
“그런가요?”
가볍게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조영규가 슬쩍슬쩍 진료실을 둘러봤다. 대놓고 살피지 못하고 힐끔거리는 시선만 봐도 조심스러워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자신으로 하여금 전화를 기다리게 했다는 건 이미 태수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