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35
00538 538화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애들도 많이 놀랐겠죠.”
“그랬던 거 같습니다. 쉬는 시간만 되면 서로 누가 다쳤다고 하면서 응급처치 복습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열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네요.”
태수의 말에 조영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달라진다는 말씀이십니까?”
“기회를 더 마련해서 다른 것도 알려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선생님께 그런 부담을 드리려고 한 건 아닌데요.”
“아니요. 어렸을 때 사고의 기억이 있으면 알아서 몸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혹시 주변에 무슨 일이 생겨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고요.”
태수가 차분하게 설명하자 조영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선생님도 배우셔야죠.”
“물론입니다. 저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배우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허락만 해 주신다면요.”
“당연히 알려 드려야죠. 다음 주부터 애들 하교시키고 오세요. 하나씩 알려 드리겠습니다.”
태수의 말에 조영규가 머쓱한 얼굴로 변했다.
“그래도 어떻게 매일 옵니까.”
“저 진료 시간 끝나면 빈둥빈둥 놉니다. 기왕 알려 드리는 거 맨입으로는 그렇고, 술친구라도 해 주시면 저야 금상첨화지요.”
“그건 저도 필요한데요. 솔직히 이 근처에 저희 또래는 없으니까요.”
“그럼 술친구 하는 겁니다.”
태수가 못을 박자 조영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술친구 맺은 김에 오늘부터 꺾을까요?”
“저야 좋죠.”
“그럼 진료 끝나고 바로 시작하시죠.”
태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조영규의 표정도 똑같이 변해 갔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대화도 잘 통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빠르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태수의 말대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 날부터 조영규는 매일 보건소로 찾아왔다.
도착하는 시간은 대부분 오후 5시.
태수는 1시간 정도 조영규에게 응급처치에 대해 알려 줬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가볍게 술 한잔을 마셨다.
매일 마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사람이 동갑임을 알게 됐다.
나이를 알게 된 후로는 말도 놓고 더욱 친근하게 서로를 대했다.
오늘도 저녁이 되어 평상에 술자리를 펼쳐 놓았다.
가볍게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다.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켠 조영규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캬! 그런데 말이야, 응급처치 방법이 그렇게 다양한 줄은 미처 몰랐어.”
“병이 다양하니까.”
“역시 현직 의사라 아는 게 진짜 많다니까.”
조영규의 칭찬에 태수는 싱긋 웃으며 맥주 캔을 부딪쳤다.
“먹고살려니 다 알게 되더라.”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니까 의과생들하고는 확실히 다를 거고.”
“어째 아는 사람 중에 의과생이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네?”
태수가 묻자 조영규가 쓴 미소를 지었다.
“여동생.”
“여동생이 있어?”
“응. 본과 4학년이야. 사정이 있어서 쉬고 있는 중이고.”
조영규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과 4학년이 휴학? 그거 치명적인데.”
“역시 그런가?”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빨리 복학하는 게 좋아. 고지가 코앞인데 미끄러지면 다시 올라가기 힘들다고.”
태수가 진심 어린 충고를 하자 조영규는 쓴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에 태수도 더 이상 파고들 순 없었다.
태수가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던 중이었다.
“태수야.”
“읍? 응. 왜?”
입가에 흐르는 맥주를 얼른 닦아 낸 태수가 바라보자 조영규가 다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아니야. 술 마셔.”
“갑자기 왜 그래?”
“아니라니까. 마시자.”
턱.
조영규가 맥주 캔을 부딪친 순간이었다.
태수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함을 눈치챘다.
그 순간 태수는 고민했다.
물어야 하나?
원채 꼬치꼬치 캐묻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영규의 성격이 워낙 고향 친구인 송준호와 비슷하다.
남에게는 싫은 것도 좋다고 할 정도로 순박했다.
이태호의 일을 겪고부터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건소를 찾아오는 열성도 보였다. 학생들이 보다 안전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태수도 그런 열정과 순수함을 알고 있기에 고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 무신경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 사귄 친구였기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태수는 입가로 맥주 캔을 가져가는 조영규의 손을 낚아챘다.
탁.
“무슨 일인데?”
“아니라니까.”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맥 빠지면 술맛도 안 나는 거 몰라?”
태수가 다소 강압적으로 묻자 조영규의 얼굴이 쓰게 변했다.
그러던 조영규는 이내 눈빛이 바뀌었다.
뭔가 고심하더니 곧 생각을 정리하고는 태수에게 물었다.
“너 혹시 결핵에 대해서 알아?”
“어느 정도는.”
“듣자 하니 호흡기내과나 흉부외과에서 다룬다던데, 넌 외과라며.”
조영규의 물음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원래 흉부외과였어.”
“그러면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비전염성 결핵에 걸린 사람인데 살이 내리듯이 마르고 기침이 나고 가슴이 계속 아프다고 그래.”
“그 정도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텐데.”
태수가 바로 알아듣고 말하자 조영규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혹시 여동생 이야기야?”
생각하던 태수가 딱 꼬집어 묻자 조영규가 멈칫했다.
“아니, 그게…….”
“여동생 맞네.”
“어떻게 알았어?”
조영규가 조심스럽게 묻자 태수는 쓴 미소를 지었다.
“세상 무너져도 휴학할 수 없는 시기가 본과 4학년이야. 한 해만 견디면 의사 면허증 취득하고 인턴 생활 시작인데 누가 휴학을 하겠어.”
“…….”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비전염성 결핵이라. 지금 여동생은 어디에 있는데?”
“서울.”
조영규의 대답을 들은 태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대충 들어봐도 심각한 거 같은데 거기 있으면 되겠어? 얼른 내려오라고 그래. 내려와서 요양부터 하라고 설득하라고.”
“식구들 모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말을 잘 안 듣네.”
가만히 듣던 태수가 조영규에게 한마디 했다.
“네가 문제야.”
“나? 내가 왜?”
“내가 오빠였으면 서울 올라가서 잡아끌어다 여기에 데려다 놓을 거야. 그게 오빠가 할 일 아니야?”
“…….”
태수의 물음에 조영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조영규에게 태수가 한마디 더 했다.
“넌 참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진짜 좋은 사람은 가끔 쓴소리도 하고 억지도 부려야 돼. 상대가 잘되길 바란다면 그런 모습도 보여야 한다고.”
“그렇겠지.”
“뭐, 내가 너무 깊게 관여하는 건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 동생 치료 잘 받으라고 하고.”
태수는 그 말을 끝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몇 번을 들이켤 동안 조영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쥔 맥주 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태수는 그걸 알면서도 맥주만 홀짝였다.
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조영규가 태수에게 물었다.
“태수야, 혹시 내가 동생 데리고 오면 봐줄 수 있어?”
“난 청탁 같은 거 진짜 싫어하는데 어쩌지?”
“그, 그렇지. 지금 내가 한 말은 잊어 줘. 술김에 한 말이니까.”
조영규가 얼른 말을 돌리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태수가 흘리듯이 말했다.
“내가 싫다고 해도 보건소로 밀고 들어오면 어쩔 거야. 무슨 힘이 있겠냐고.”
“…….”
“그리고 방금, 때로는 밀어붙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내 말은 어디로 흘려들으신 건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태수는 얼른 맥주를 입으로 가져왔다.
그 순간 조영규의 눈빛이 작게 빛났다.
다음 날.
진료소에 자리한 태수는 카프레네와 제임스의 일기들을 뒤적였다.
“결핵이…….”
결핵 중에서도 비전염성 결핵에 대해서 연구 중이었다.
조영규라면 분명히 데려올 터였다.
소중한 여동생을 애써 데려왔는데 입을 딱 붙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인턴 때 흉부외과에서 결핵 환자들도 많이 봤다.
연성대학병원은 다양한 환자가 입원했기에 많은 케이스를 접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배우고 익혔던 내용과 스승들의 일기에 적혀 있는 경험을 더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태수가 열정적으로 공부할 때였다.
갑자기 책상 위에 종이컵 하나가 놓였다.
“음?”
깜짝 놀란 태수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이선정 간호사가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아,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 좋아하는 낚시도 안 가실 정도로요?”
“놀기만 하면 됩니까. 틈틈이 공부를 해 놔야죠. 그보다 차, 감사합니다.”
태수가 종이컵을 들며 찡긋거리자 이선정 간호사가 어깨를 들썩였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조용하네요.”
“이렇게 계속 조용했으면 좋겠는데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은 평온해서 좋네요.”
“그러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이선정 간호사는 돌아서는 순간까지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이내 혼자가 된 태수는 종이컵을 내려놓고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조영규는 여전히 매일 찾아와 응급처치를 배우고 익혔다.
하지만 태수와 조영규 모두 조영규의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태수는 조영규가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 조영규와 다르게 태수는 여전히 진료실에서 공부에 열중했다.
결핵이라는 병은 하루아침에 모든 걸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았다.
원인과 증상이 너무도 다양했고, 그에 따른 완치 방법도 각양각색이었다.
그에 대해 살펴볼수록 태수도 그 속에 빠져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조영규의 여동생 때문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지금은 태수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데 더 열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를 이어 가던 중이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려 바라보니 유승원 과장의 전화였다.
태수는 의아한 얼굴로 통화했다.
“네, 과장님.”
“최 선생, 그 소식 들었나 몰라.”
“무슨 소식입니까?”
태수의 물음에 유승원 과장의 목소리가 외려 의아하게 변했다.
“김동석 환자 오늘 퇴원하는 거 몰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습니까?”
“진짜 몰랐나 보네. 조금 전에 퇴원 수속 밟았다는 소식 듣고 바로 전화하는 건데 말이야.”
“김 선생은 며칠 더 있다가 퇴원할 거라고 해서 말입니다.”
그동안 꾸준히 통화했던 외과 치프 김준혁을 들먹였다.
그러자 유승원 과장이 아차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오늘 아침에 회진 돌 때 외과장님이 결정하신 모양이야. 난 외과 치프가 전화한 줄 알았는데.”
“바빠서 그랬나 보죠. 좌우간 소식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이렇게 잘 보여야 나중에 급할 때 부담 없이 연락하는 거 아니겠나?”
“하하. 그 말씀이 더 부담스럽네요.”
“좌우간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번 보자고.”
유승원 과장은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통화를 끝냈다.
태수도 휴대폰을 내려놓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수술한 환자가 완쾌되어 퇴원한다.
이건 의사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찌릿한 희열이다.
태수의 얼굴이 그런 희열 속에 환하게 변해 갔다. 그렇게 기분 좋은 상태로 다시 공부를 이어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똑똑.
진료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태수가 멈칫했다.
“네.”
“환자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그 말을 마친 태수는 얼른 공부하던 걸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다듬었다.
이내 진료실 문이 열리며 환자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