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61
00564 564화
다들 돌아갔지만 조영규는 남아 있었다.
“난 아저씨 모셔다 드리고 가도 돼.”
그러면서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그 말과 행동으로 조영규의 심성이 얼마나 착한지 다시 느끼게 됐다.
얼마 후, 황원식이 깨어났다.
“으음…….”
“아저씨,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태수가 다가가 묻자 황원식은 찌푸린 눈살로 좌우를 둘러봤다.
이내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선생…… 내가 어떻게 된 거야?”
“기절하셨습니다.”
“이거 나이 먹고……. 우리 애는?”
역시 황원식은 깨어나자마자 손자부터 찾았다.
태수는 중간중간 통화한 이야기를 건넸다.
“서울에 진입하고 있답니다. 병원에도 전화했는데 모두 준비하고 아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요.”
“…….”
“괜찮을 겁니다. 결과도 아주 좋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끄덕.
황원식은 고개만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 어떤 말을 꺼내는 것도 성급하다는 걸 세월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섣불리 장담하며 말하지 않았다.
그 또한 의사로서 단정 지어 말하는 게 위험하단 걸 알고 있었다.
잠시 더 휴식을 취한 황원식은 조영규의 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사이 아기가 병원에 도착해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는 석재봉 과장의 전화도 받았다.
이제야 한시름 놓이는 것 같았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때 곁에서 같이 배웅한 이선정 간호사가 불렀다.
“그런데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정체가 도대체 뭐예요?”
“네?”
“외과 전문의라면서요. 전에 흉부외과 수술도 하시고, 오늘은 신경외과 응급처치까지. 아무리 다 외과에서 파생된 의과라 해도 말이 안 되잖아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이래저래 알게 되었다고 할 테니까 믿어 주십시오.”
“아니요. 앞으로 선생님 보조를 계속해야 되는데,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요?”
태수가 어깨를 들썩이자 이선정 간호사는 잡아먹을 듯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 둘이 이야기 좀 해요. 맥주 앞에다 높고 아주 진지하게.”
“진짜 피곤한데, 내일 하면 안 되는 거죠?”
“절대 안 돼요. 맥주 사서 올라갈 테니까 준비하고 계세요.”
이선정 간호사는 홀로 결정을 내리고는 바로 몸을 움직였다.
태수는 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강압적이긴 하지만 이선정 간호사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태수의 역량을 알아야 수술을 보조하기도 좋을 터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이선정 간호사가 어떤 수술까지 보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그걸 알게 된다면 앞으로 보건소에서 수술하는 데 있어서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터였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자리를 가져야 했다.
그게 오늘이라는 건 불만이 없었다.
아기는 이미 태수의 손을 떠났다.
아마 결과는 내일 아침에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때까지 마음 졸인다고 달라질 건 없다.
앞으로 함께하기로 한 이선정 간호사와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태수는 찌뿌듯한 얼굴로 보건소 앞에 도착했다.
응급 상황이 연달아 발생한 데다 늦게까지 이선정 간호사와 대화를 나눠서 그런지 피곤함이 쉽게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보건소 문을 열고 막 들어가려던 중이었다.
부웅.
정문에서 차 소리가 들려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 차를 확인한 순간 태수의 눈매가 살짝 변했다. 밤에 서울로 출발했던 아기 아빠의 차였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차가 근처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아기 아빠가 내렸다.
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태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결국 태수가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여기에…….”
태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재빠르게 다가온 아기 아빠가 그대로 태수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크으윽!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흔들리는 목소리와 요동치는 어깨가 그의 격정을 알려 줬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행동만으로도 태수는 모든 상황이 파악됐다.
꽈악.
태수도 같이 그를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선생님……. 흐윽.”
“왜 우세요. 나이도 어린 동생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으십니까?”
태수는 일부러 나이까지 들먹이며 면박을 주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툴툴거렸다. 그러나 그건 태수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기 아빠는 태수를 한참 동안 안고 서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야 아기 아빠는 조금씩 격정이 가라앉았다.
태수에게서 멀어진 그가 눈가를 훔치며 무안함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만 보였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네?”
“하늘에서 비가 좀 내리던데요. 몇 방울 안 쏟아진 거 보니까 지나가는 비였나 봅니다.”
태수가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하늘은 너무도 맑았다. 얼마나 맑은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아기 아빠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비가 온다는 소식도 없었는데요.”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되신 겁니까? 왜 여기 계세요?”
“아버지도 걱정되고, 입원해야 하니까 이것저것 필요한 게 좀 있어서 새벽에 내려왔습니다. 서영 씨도 데려다줘야 하고요.”
아기 아빠의 말에 태수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건 그러네요. 아저씨는 어떠십니까?”
“그렇게 괜찮다고 말씀을 드려도 가슴이 아프시다며 식사도 못하고 계십니다. 제가 억지로 식사하시게 했지만 그리 많이 드시지는 않습니다.”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건강이 걱정이네요.”
“다행히 제가 서울에 있는 동안 고모님께서 와 계시기로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 말에 태수가 안도했다.
“진짜 다행이네요. 저도 시간 날 때마다 가서 봐 드릴 거니까 안심하고 올라가셔도 됩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씀하지 않아도 다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태수가 찡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푸근해 전염되었는지 아기 아빠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아차, 그걸 챙겨 와야지.”
수선을 떤 아기 아빠가 얼른 차로 다시 향했다.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되돌아온 아기 아빠의 품에는 큼지막한 술병이 들려 있었다.
“이거, 받아 주시겠습니까?”
“뭡니까, 이게?”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고민하다 생각한 겁니다. 산더덕주인데요, 제가 언젠가 고마운 분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담근 겁니다.”
“이, 이게 산더덕이라고요?”
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커다란 술병의 반을 채울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더덕이다.
아버지가 가끔 산에서 더덕을 캐 오셨기에 태수도 산더덕 크기를 알고 있다.
그런데 이건 산더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놀란 태수를 바라보며 아기 아빠가 민망한 미소를 머금었다.
“더 좋은 걸 드려야 하는데, 이 촌구석에서는 이런 거밖에 드릴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걸 제가 어떻게 받습니까. 이건 정말.”
태수도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귀한 술이라는 건 이제 와서 말하지 않아도 느낌이 팍팍 왔다.
그러나 아기 아빠는 떠넘기듯이 내밀었다.
“제발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이거, 진짜 안 되는데.”
“선생님 거라니까요.”
아기 아빠는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몇 번 옥신각신한 후 술병은 태수의 품에 안겼다.
솔직히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귀한 술이다.
난감함과 함께 떠오르는 미소를 제어하기 힘들 정도였다.
태수는 술병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언제라도 제가 필요하시면 찾아 주십시오. 그 값은 꼭 해야 할 술이니까요.”
“무슨 말씀을요. 이미 충분히, 아니 더 말도 못할 정도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기 아빠도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받기로 한 건데 더 인사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태수는 슬쩍 술병을 내려다보며 넉살을 부렸다.
“오늘 저녁에 이거 한 잔 딱 마셔 봐야겠는데요? 안주를 뭘로 해야 할지 걱정부터 됩니다.”
“고기도 좋고 회도 좋을 겁니다. 그리고 다 드시면 한 번 더 술을 부으세요. 재탕 가능하니까요.”
“재탕은 무슨. 삼탕, 아니 오탕도 가능하겠습니다. 아주 더덕 기운을 쪽쪽 빼먹어야죠.”
“하하.”
태수가 오버스럽게 말하자 아기 아빠의 입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아기 아빠를 배웅한 후 태수는 진료실로 들어왔다.
빈 책장에 둔 술병에 절로 시선이 갔다.
“크, 저걸 얼른 한 잔 딱!”
보면 볼수록 그 맛이 궁금했다.
산더덕 중에서도 저렇게 큰 건 약으로 쓰인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걸 한 모금 마실 생각으로 설렐 정도였다.
그 상상을 하던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우선 진료부터 해야 했다.
저 술을 더 맛있게 마시려면 주어진 일부터 힘차게 해내는 게 순서였다.
그런 마음으로 더욱 활기차게 진료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어 바라보자 석재봉 과장의 전화였다.
진료 준비 끝나고 전화하려던 참이라 태수는 바로 받아 들었다.
“과장님, 죄송합니다. 먼저 전화를 드려야 했는데요.”
“무슨 말을. 그보다 최 선생,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요? 뭐 잘못됐습니까?”
태수는 순간 당황했다.
아기 아빠에게 조금 전에 감사 인사까지 받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태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 걸 느꼈는지 석재봉 과장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잘못되기는 뭐가 잘못돼.”
“그러면요?”
“조금 전에 아기 수술해 준 신경외과 전문의가 그러더라고. 도대체 누가 응급처치를 이렇게 확실하게 해서 보냈냐고.”
“아…….”
태수의 말문이 순간 막혔다.
석재봉 과장은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뇌척수액의 압력으로 뇌출혈이 시작되려던 모양이었나 봐. 정말 터지기 직전에 응급처치가 들어가서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럼 후유증은 걱정 없는 겁니까?”
“회복되는 걸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별다른 일이 없다면 거의 정상적으로 자랄 거라고 이야기하더라고.”
석재봉 과장의 말에 태수는 잠시나마 졸였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다.
“전 진짜 뭐가 잘못된 줄 알고 놀랐습니다.”
“내가 놀란 건 생각도 안 하나? 외과, 흉부외과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신경외과까지 섭렵한 줄은 꿈에도 몰랐어.”
“섭렵은요. 진짜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던 겁니다.”
태수가 겸손하게 말하자 석재봉 과장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수박 겉핥기라니.”
“좌우간 문제가 없을 거 같다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그 좋은 기분 계속 유지하면서 서울에 올라오면 이야기 좀 하지.”
“아, 그건 좀.”
태수가 슬쩍 뺐지만 석재봉 과장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술은 내가 아주 진하게 사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럼 서울에 올라오면 꼭 연락 달라고. 수술이 있어서 먼저 끊네.”
석재봉 과장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태수의 얼굴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빼도 박도 못하겠네.”
그렇다고 태수가 정말 신경외과 분야를 전문의처럼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에 만나면 사정 이야기를 확실하게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태수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끼익.
이선정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열고 인사부터 했다.
“편히 주무셨어요?”
“아, 간호사님, 아주 죽겠습니다. 입도 아프고요.”
태수가 어제 일을 돌려서 말하자 이선정 간호사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저는 선생님에 대해 더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그러시다면 다행이고요. 전 진료 준비 끝났습니다.”
“진료 전에 손님부터 받으셔야 될 거 같은데요. 아니지, 이젠 환자인가?”
갸웃거리는 이선정 간호사를 보며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 왔는데 그러십니까?”
“조서영 씨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잠시만요.”
이선정 간호사는 환히 웃으며 진료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