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62
00565 565화
그리고 곧 열린 문틈으로 조서영이 들어왔다.
서울까지 장거리 이동을 해서 그런지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이다.
태수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도착하셨다면서요. 좀 쉬시지 않고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조서영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비단 피곤함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직감한 태수는 표정부터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
“일단 앉으세요.”
조서영이 자리했다.
그리고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자 태수도 그 시선을 마주했다.
예전과는 다른 눈빛이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던 눈빛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엿보였다.
태수는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뭡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그렇게 앞뒤 빼먹고 말씀하시면 제가 못 알아듣죠.”
“살아가려면, 아니 살아남으려면. 이 병하고 싸우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질문하는 조서영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얼마 전 태수가 억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자극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삶에 대한 열망.
그리고 병에 대한 분노까지 느껴졌다.
태수는 솔직히 그런 그녀의 심경 변화가 궁금했다.
“왜 싸울 생각이 생겼습니까?”
“…….”
“저도 그걸 알아야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여쭙는 겁니다.”
태수의 눈빛에도 진지함이 가득했다.
조서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서울에 막 진입했을 때였어요. 아이가 울었어요. 한 번도 울지 않고 그저 멍하니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갑자기 울었다고요.”
“계속하세요.”
“왜 울까. 솔직히 그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그때 그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그랬어요.”
“…….”
태수는 뒷말이 남아 있다는 걸 알기에 침묵했다.
그사이 조서영은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픈 것도 몰라서 미안하다고. 병원에 가면 이제 안 아플 거라고. 그리고 아이를 꽉 안아 주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어요.”
“그랬군요.”
“그때 전 아이 엄마가 아니라 아이를 봤어요.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어요. 마치 아프다고, 나 좀 살려 달라는 듯이요.”
끄덕끄덕.
태수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갯짓하자 조서영이 이어서 말했다.
“말 못하는 아이도 살려 달라고 우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우는데 전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랬군요.”
“전에 선생님이 그러셨죠? 남들이 다 살아야 하니까 저도 살아야 하는 거냐고.”
조서영의 질문에 태수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죠.”
“확실하게 대답해 드릴게요. 네, 남들이 다 사니까 저도 살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하는 모든 걸 저도 다 해 보고 싶어요. 보란 듯이 이겨 내서, 살아남아서 다 해 보고 싶어요.”
“…….”
“이제 뭘 해야 하죠? 알려 주세요. 선생님이 절 다시 살고 싶게 만드셨으니까 책임져 주세요.”
조서영은 부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태수를 향해 당당하게 요구할 뿐이었다.
그게 창피하다고도, 부끄럽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태수는 그 모습에 양쪽 입꼬리가 서서히 벌어졌다.
이젠 충동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달려들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태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병원에서 느끼신 건 없습니까?”
“있어요.”
“뭡니까?”
“모든 분들이 병과 싸우고 있다는 거요. 다들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했어요. 살고 싶다고만 했죠.”
조서영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은 후 태수가 물었다.
“그래서요?”
“그분들에 비하면 제 병은 아무것도 아닌 거 같더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단언하는 조서영의 말에 태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마음이 굳어진 거 같네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체력부터 길러야죠.”
“체력이요?”
조서영이 묻자 태수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모든 병은 체력이 받쳐 줘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지금 조서영 씨는 체력이 너무도 떨어져서 면역력이 더 약해진 상태고요.”
“그렇겠죠.”
“그동안은 먹는 것도 거부감이 있었다는 거 압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아니요. 먹을게요.”
조서영이 딱 잘라 대답하자 태수는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먹으라는 건 아닙니다. 적당히 먹고 산책도 다니세요. 약해지려는 몸부터 제대로 돌려놓으시라고요.”
“다음에는요?”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루아침에 고칠 수 없다는데 다그치면 서영 씨만 다시 지칩니다.”
태수의 말에 조서영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세요. 진료보다는 그동안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대화한다고 생각하시고요.”
“네.”
“아, 원두커피는 꼭 가져오셔야 합니다. 대화에 맛있는 차가 빠지면 안 되니까요.”
태수가 찡긋거리며 말하자 조서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짜 별거 아닌데요.”
“그런데 어쩝니까. 전 그 원두커피가 마시고 싶은데요.”
“그러시면 꼭 가져올게요.”
“이제야 상담할 맛이 나네요.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일주일 후에 맛있는 차와 함께 다시 뵙겠습니다.”
태수가 말을 마치자 조서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태수를 바라보던 조서영이 갑자기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인사를 마친 조서영이 고개를 들어 다시 태수를 바라봤다.
태수는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 미소는 어느 때보다 밝고 부드러웠다.
그날 저녁.
태수는 진료가 끝나자마자 숙소로 올라갔다.
품에는 아침에 아기 아빠에게 받은 산더덕주가 들려 있었다.
숙소에 들어간 태수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얼굴로 산더덕주를 열었다.
코끝을 진하게 맴도는 더덕의 향!
“크.”
마시기도 전에 그 향에 취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다.
태수는 자그마한 잔을 아예 술 속에 집어넣어 한 잔을 떴다.
꿀꺽.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몇 번이나 입을 다시고 또 다신 후에야 침착해진 얼굴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단번에 쭉 들이켰다.
따끔한 더덕주가 태수의 목을 쓸고 내려갔다.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 터인데 태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입가를 맴돌던 산더덕주의 향기가 옅어질 즈음이었다.
게슴츠레 눈을 뜬 태수가 나지막이 뇌까렸다.
“이건 술이 아니야. 약이야, 약.”
더 이상의 감탄사도 무의미했다.
태수는 얼른 산더덕주를 다시 닫았다.
이 아까운 술은 절대 한 번에 마실 수 없었다.
두고두고 한 잔씩.
그렇게 음미하며 마셔야 할 술이다.
해가 덜 드는 곳에 조심스럽게 산더덕주를 모셔 놓은 태수가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런 귀한 술을 안겨 준 아기 아빠의 마음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태수가 아직 입가에 남아 있는 산더덕주의 잔향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띠리릭.
전화벨 소리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에 쓴 미소를 지은 태수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조영규의 전화였다.
“어, 영규야.”
“태수야, 고맙다.”
뜬금없는 감사 인사였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서영 씨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그래도 네가 아니었으면…….”
“더 실력 좋은 의사를 만났겠지.”
“그건 아니지. 어떻게 네가 있는데 만약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조영규의 울컥한 목소리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말은 무의미한 말이라는 거야.”
“…….”
“지금만 보자. 서영 씨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일 거야. 그러니까 우리도 새로운 시선으로 봐주자고.”
태수의 침착한 이야기에 조영규도 곧 긍정적인 대답을 내보였다.
“그래, 네 말이 옳아.”
“그리고 삶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강해졌으니까 잘 이겨 낼 거야. 그렇다고 믿어.”
“태수야.”
조영규의 목소리가 잦아들어 가자 태수가 툭하니 쏘아붙였다.
“징그러워, 새끼야. 끊는다.”
바로 전화를 끊은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조영규의 반응만 봐도 조서영이 스스로 이겨 내려 한다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
다음날.
모처럼 보람과 행복이 가득찬 시간이 지나자 이제 다시 초곡리를 위해 일할 시간이다.
가볍게 몇 명 진료를 마치자 다음을 서둘렀다.
약간 한가한 틈을 빌어 가장 필요한 의약품을 얻어야 했다.
마을사람의 건강을 위해 무조건 가져와야 했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운 태수가 천천히 일어섰다.
“가서 푸닥거리 한판 해봐.”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린 태수가 걸음을 재촉했다.
태수가 삼척시 보건소에 도착하자 안면이 있는 몇몇 공무원들이 가볍게 인사했다. 물론 약간이나마 경계의 눈빛도 함께였다.
태수가 부임한 이후 벌어진 소동을 잘알기 때문이었다.
“어? 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셨습니까.”
“언제 차 한잔하셔야죠.”
“그럼요. 전화 주시면 놀러 오겠습니다.”
태수는 부드럽게 접대성 멘트를 날리면서 움직여 김석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선객이 있었다.
눈치학상 그리 긴 대화를 할 손님은 아니라고 보였기에 느긋하게 기다렸다.
태수의 예상대로 김석철과 손님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을 잡았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끝낸 김석철이 곧 뒤에 서 있던 태수를 발견했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 선생님, 일찍 오셨습니다.”
“손님이 계신 줄 알았으면 좀 늦게 올걸 그랬습니다.”
“뭐, 아시는 분인데요.”
김석철의 말에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변했다.
삼척시에 아는 사람?
몇 명 되지 않았다.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등지고 있던 손님이 천천히 돌아섰다.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지만 양쪽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신경질적인 인상이다.
태수는 그를 보자 대번에 알아봤다.
초곡리 옆마을 보건의였다.
둘 다 혼자 보건소에서 복무하는 입장이라 몇 번 왕래한 적이 있다.
이름은 신영호.
내과 전문의고 보건의 2년 차였다.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태수가 먼저 환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신 선생님.”
“최 선생을 여기서 만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별고 없으시죠?”
“뭐, 언제나 한가한 편입니다. 그보다 언제 또 차 한잔해야지요?”
신영호가 묻자 태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주무관님, 먼저 가 보겠습니다.”
신영호는 가볍게 고개만 숙인 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이내 그가 문밖으로 나갔다.
그 후 김석철이 태수에게 바짝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네요.”
“한 달도 안 됐습니다.”
“그래도 가끔 얼굴 보고 싶을 때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석철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전에 태수가 술을 한번 진탕 먹인 후부터 급격히 친해진 탓도 있었다.
자리에 앉은 김석철이 물었다.
“차는 뭐로 드릴까요?”
“차는 무슨요. 그리고 이거, 그냥 목이라도 축이시라고.”
“뭘 또 음료수를 사 오셨어요. 그냥 오셔도 된다니까요.”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 그럽니까.”
태수가 대답하며 음료수 상자를 내밀자 김석철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받아 들었다.
“매번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런데 주무관님은 그거 드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네?”
“우리는 일 이야기 끝나고 따로 한잔해야죠.”
태수가 손목을 가볍게 꺾자 김석철의 표정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