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63
00566 566화
“저야 좋죠. 제가 이래서 최 선생님 전화만 기다린다니까요.”
“저 아니어도 손님도 많이 찾아오시고, 바쁘신데요.”
“솔직히 여기서 필요한 거 이야기하고 땡치고 그럽니다.”
김석철이 삐쭉거리자 태수가 말했다.
“섭섭하신가 봅니다.”
“좀 그럴 때도 있어요. 최 선생님 말고 다른 마을 보건의분들은 좀…….”
“거기까지만요. 뒷담화는 이따가 술 한잔하시면서 해야죠.”
태수가 화제를 돌리자 김석철이 멈칫했다.
“아차, 그러네요. 사람 많은 데서 이야기할 건 아니니까. 자,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늘은 좀 섭섭하다는 소리 좀 하려고요.”
“섭섭하시다고요? 뭐가요?”
김석철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태수가 쓴소리를 했다.
“제가 주사제 신청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오는 겁니까?”
“아, 그거요.”
“다른 건 몰라도 혈압하고 심장과 관련된 건 무조건 빨리 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수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았다.
친분과 상관없이 일 이야기를 할 때는 사정없이 몰아치는 성격 때문이다.
공은 공, 사는 사.
태수는 누구보다 그 경계가 확실했다.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김석철은 움찔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잘못하면?
또다시 초곡리장은 물론 어르신들의 호통을 받아야 한단 기억이 들자 대번에 대답이 튀어나갔다.
“그건 저도 신경 쓰고 있습니다만.”
“일단 결과물을 보여 주셔야죠. 주사제를 조금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진 않을 거 아닙니까.”
“저도 구매 내역서 만들어서 신청했는데 위에서 결재를 안 해 주는 걸 어쩝니까. 좀 더 강력하게 요청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석철이 슬쩍 얼버무리려 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보건소에 있다면 굳이 미룰 일도 아니다.
태수가 얼추 판단하기에도 김석철이 차일피일 미룬 일이라는 걸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분 관계를 떠나 생명과 관련된 일만큼은 미루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목소리 높이고 완력을 쓸 생각은 없었다.
태수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잡았다.
“위에서 안 해 준다고요?”
“안 해 주는 게 아니라, 일이 많다 보니까.”
“아닙니다. 이건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되죠. 과장님 좀 만나 봬야겠네요.”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김석철이 당황했다.
“아니, 잠시만요. 그건 저랑 이야기하셔야 할 부분인데요.”
“결재가 안 된다면서요. 그럼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는 게 맞죠.”
“제 입장도 좀…….”
“그럼 제 입장은요?”
태수가 딱 잘라 묻자 김석철이 움찔했다.
“아니, 그게…….”
“얼마 전에도 혈압 때문에 한 분이 쓰러지셨습니다. vasodilator(혈관확장제), calcium antagonist(칼슘길항제) 등등, 하나도 없어서 진짜 큰일 날 뻔했단 말입니다.”
“아이고, 그런 일이……. 이거 참 면목이 없네요.”
김석철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져 갔다.
태수는 이미 짐작했다.
이런 일은 무조건 다그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때론 조용히 대화로 풀어야 빠른 결과가 나올수도 있다.
기회를 엿본 태수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안 그래도 오늘 낮에 이장님이 보건소에 와서 아주 난리를 치셨습니다.”
“그, 그 초곡리 이장님이요?”
“혼자 온 줄 아십니까? 마을 어른들 다 오셨어요.”
“괜찮으십니까?”
김석철의 얼굴은 어둡다 못해 잿빛으로 변해 갔다.
예전에 초곡리 이장과 마을 노인들이 찾아와 시 보건소를 뒤집어 놓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탓이다.
태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반문했다.
“제가 괜찮을 거 같습니까?”
“아…… 니죠. 혹시 다치신 데는…….”
김석철이 얼른 태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의 게으름으로 발생한 일이다.
만약 뭔가 문제가 된다면 김석철의 인사고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때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 찾아가신다고 펄펄 뛰시는 걸 정말 간신히 뜯어말렸습니다.”
“아, 아이고, 이거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김석철이 대번에 꼬리를 내리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던 태수가 슬슬 핍박했다.
“인사는 됐습니다. 문제는 3일 안에 주사제를 그분들에게 보여 드려야 한다는 거죠.”
“그럼 아무거나 몇 개 보여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김석철이 잔머리를 굴렸지만 태수는 그보다 더 위에 있었다.
“그분들 자녀 중에 의과생이 있습니다.”
“의, 의과생이요?”
“문제는 그 의대생이 지금 마을에 잠시 와 있다는 겁니다. 저야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고 해도 그게 될까요?”
“…….”
김석철이 순간 말문을 닫았다.
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은 아니지.’
과장하긴 했지만 없는 말을 만들어 내진 않았다.
실제로 이장이 주사제가 없다는 말에 아쉬움을 보였고, 의과대생인 조서영이 들락날락거리긴 했다.
약간의 포장은 김석철을 긴장시키기 위한 양념일 뿐이었다.
작전은 아주 적절하게 잘 통했다.
이제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었다.
태수는 잠깐 공백을 둔 후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흘리듯이 말했다.
“3일 후에 이 사무실이 무사해야 할 텐데.”
“흠흠.”
“그러니까 제가 과장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김석철이 얼른 붙잡았다.
“잠시만요.”
“저도 살아야죠.”
“그럼요. 알죠, 압니다. 제가 책임지고 어떻게든 마련해서 꼭 보내겠습니다. 무조건이요.”
김석철이 태수의 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약속했다. 어설픈 거짓말이 일을 크게 키울 것 같으니 얼른 꼬리를 말아 버린 모습이다.
태수는 뻔히 그의 생각을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해 드린다니까요. 어떻게든 3일 내에 꼭 요청하신 주사제들을 모두 보내겠습니다. 진짭니다.”
“주무관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가 뭐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요.”
태수가 슬쩍 꺾이는 척하자 김석철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렇죠, 그럼요. 서로 곤란하게 하면 안 되죠.”
“그럼 그건 그렇게 알고요. 근무 시간도 끝나 가는데 나가시죠.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 같네요.”
“당연히 그래야죠.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대접해야죠.”
태수가 일부러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하자 김석철이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니죠. 저희 때문에 곤란하셨는데 당연히 제가 대접해야죠.”
“뭐, 그러시다면.”
“식사도 같이 해야 하니까 드시고 싶은 거 말씀하세요. 오늘 제가 쏩니다.”
김석철이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
태수는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제가 입맛이 있겠습니까. 그냥 술이나 마셔야죠.”
“그러지 마시고 고기 드시러 가시죠. 근처에 돼지갈비 잘하는 곳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돼지는 무슨, 소라면 모를까…….”
태수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김석철이 멈칫했다.
소고기 값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 김석철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그러나 어쩌랴.
자신이 잘못한 게 되돌아왔으니.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소고기 드시러 가시죠.”
“제가 낼 테니까 편하게 가세요.”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내야죠. 제가 내야 하고말고요.”
김석철은 울상으로 변해 가려는 표정을 애써 다잡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태수는 속으로 쓴 미소를 지었다.
공무원 월급 뻔히 아는데 얻어먹을 생각은 없다. 대신 애간장을 충분히 녹인 걸로 만족했다.
3일 후.
보건소 접수대에 자그마한 상자 몇 개가 도착했다.
따로 첨부된 목록을 확인한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약들이 한 번에 다 왔네요.”
“그러게요.”
“혹시 시 보건소 가셔서 담당자 때리셨어요?”
이선정 간호사가 진지하게 묻자 태수가 어이없이 바라봤다.
“제가 언제 폭력 쓴 적 있습니까?”
“송 간호사님이 말씀하시길 카슈미르에서 군인들 때리고 그러셨다던데.”
“…….”
“여기 한국이에요. 주먹은 자제하세요.”
이선정 간호사가 한마디 덧붙이자 태수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절 어떻게 보시고.”
“아니면 몇 번을 메일로 신청해도 안 오던 주사제들이 선생님이 다녀오시니까 이렇게 도착한 게 말이 돼요?”
“왜 안 됩니까? 가서 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됐어요. 전 이거나 정리할게요. 괜히 놀고 있으면 한 대 맞을 거 같으니까.”
이선정 간호사는 끝까지 태수를 놀리며 몸을 움직였다.
농담인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이선정 간호사의 말투에서 왠지 모를 진심이 느껴졌다.
그게 태수를 더욱 억울하게 했다.
“진짜 아니라니까요.”
“믿어 준다고요.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요, 무서우니까.”
“아, 진짜. 송 간호사님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셔서.”
“호호.”
태수의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이선정 간호사의 웃음소리가 보건소를 울렸다.
그동안 필요하다고 느꼈던 주사제들이 모두 도착해 그녀 입장에서도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억울함을 토로하던 태수 입에서도 결국 어이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주말 아침.
낚시 가방을 챙겨 든 태수는 비장한 눈빛으로 보건소를 나섰다.
우의에 장화까지.
마치 바다에 일을 하러 나가는 차림과 같았다.
이내 보건소 정문을 나선 태수는 김동석이 알려 준 낚시 포인트를 흘깃거리지도 않고 지나쳤다.
낚시의 즐거움을 알려 준 장소지만 오늘은 여기가 아니다.
한참을 걸어간 태수는 파도가 밀어치는 갯바위에 도착했다.
철썩!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가 시원하게 태수의 얼굴을 때렸다.
태수는 상쾌한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젠 이 정도 해야지.”
언제까지 초급자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손끝의 짜릿함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중급자 코스가 바로 이 갯바위다.
저벅저벅.
태수는 뾰족뾰족 튀어나온 바위들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절벽 아래쪽으로 향했다.
휘이잉!
해안가에서 부는 바람에 비해 세기부터 달랐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절벽에서 상당히 떨어진 위치였다.
아무래도 갯바위 낚시가 처음이라 약간의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태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손맛 한번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이다.
남자가 목표를 세웠으면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것도 중요했다.
곧 불안감을 떨쳐 낸 태수에게는 설렘만이 가득했다.
월척 한번 낚아 보자.
그 마음으로 태수는 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나마 고른 바위 위에 의자를 놓고 낚싯대 거치대도 설치했다.
이제 준비는 끝이다.
태수는 찌를 멀리 던지고 낚시 의자에 자리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들려오는 건 단지 파도 소리뿐이다.
갈매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지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태수는 그런 고요함이 좋았다.
보건소가 바빠지며 이런 적막함을 느낄 시간이 줄어들었던 탓이다.
낚시의 묘미는 역시 기다림이다.
그저 무료한 시간이 아니라 찌를 한없이 바라보며 머릿속을 텅텅 비우는 그 시간이 바로 묘미다.
머리를 깨끗하게 비우며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까지도 훌훌 날려 버리기 좋았다.
무념무상.
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철썩!
갯바위에 부서진 파도가 태수를 향해 강하게 밀려왔다.
“엇!”
퍼뜩 정신을 차린 태수가 얼른 낚싯대를 잡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다리에 힘을 꽉 줬다.
동시에 바닷물이 태수를 덮쳤다. 다행스럽게도 덮쳐 온 바닷물의 양이 많지는 않았기에 태수는 굳건히 버텨 냈다.
우의를 입고 있어 몸이 젖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문제는 낚시 의자와 낚시 가방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낚시 의자는 밀려든 바닷물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얼른 주변을 살펴보자 저 멀리 파도위에 둥둥 떠다니는 낚시 의자가 보였다.
만약 그대로 앉아 있었다면?
태수도 파도에 휩쓸려 갯바위 사이에서 나뒹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으로 본 갯바위 낚시꾼들이 왜 서 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기분이다.
“앉지 말자.”
멀리 떠나간 낚시 의자를 건져 올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다행히 낚시 의자나 낚시 가방은 가장 저렴한 거였다. 스스로 초보자라 생각했기에 값비싼 도구를 구매하지 않았다.
다행히 하석준 팀장이 보내 준 선물들은 숙소에 있었다. 단지 이 낚싯대 하나만 손에 익어서 챙겨 왔을 뿐이었다.
낚싯대만 무사하면 된다.
속으로 안도한 태수는 다시 심기일전해서 찌를 바다로 던졌다.
그리고 다시 낚시에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철썩철썩!
파도가 서서히 거세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 방향이 바뀐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생활하며 이젠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