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70
00573 573화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태수는 결심대로 하루에 몇 번씩 제임스에게 전화했다. 예상외로 통화는 단 한 번도 연결되지 않았다.
이젠 차라리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제임스의 신변에 무슨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태수는 안다.
제임스도 이젠 나이가 든 노인이란 걸 상기했다.
그러던 중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조만간 전화하지. 지금은 이 늙은이보다 환자를 더 챙겨야 할 때 아닌가.
그걸로 끝이다.
그 메시지를 확인한 후 태수는 제임스에게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자신에게 수도 없이 베풀어 준 제임스를 원망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태수는 이제야 졸인 마음을 털어 냈다.
최소한 제임스가 아픈 건 아니란 사실이 안도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다시 전화할 기회는 올 터였다.
새로운 마음을 품은 태수가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 조서영을 집도해 줄 의사를 찾아보는 게 옳았다.
문제는 하나였다.
제임스와 비견될 만한 실력을 가진 의사가 없다는 점이다.
태수가 아는 한 백성현 교수나 석재봉 과장도 이 수술을 집도하긴 힘들어보였다.
“난감하네.”
태수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금요일 오후.
오늘 진료 시간이 끝나면 월요일 오전까지는 할 일이 없었다.
천금 같은 시간이기에 태수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며칠 동안 틈틈이 서울의 모든 종합병원 흉부외과 의사들에 대해 조사해 봤다.
하지만 수술 집도를 부탁할 만한 의사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쉬자. 주말은 좀 쉬고 다시 찾아보자고.”
갑갑함에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쉬는 동안 머리를 텅텅 비우면 더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몰랐다.
그렇게 결심한 태수는 인터넷으로 의학 신문 사이트에 접속했다.
많은 기사들 중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사가 보였다.
-세계적인 흉부외과 의사 스미스 박사 방한!
기사를 열자 사진과 함께 내용이 펼쳐졌다. 태수는 기사 내용보다 스미스 박사 사진에 시선이 향했다.
외국의 유명 배우인 모건 프리먼과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살짝 처진 눈꼬리에 큼지막한 코.
그가 바로 스미스 박사였다.
스미스, 아니 풀 네임으로는 로버트 스미스.
카프레네와 쌍벽을 이룬다는 세계 최정상급의 흉부외과 의사다.
아니 카프레네가 작고한 지금은 그보다 실력이 좋은 흉부외과 의사가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카프레네의 기억 속에도 있었다.
위스키를 좋아하고 유쾌한 의사다.
그보다 환자를 대하는 데 있어서 카프레네와 가장 많은 의견 대립을 이룬 의사로 기억났다.
반목이 아니라 환자에게 더 좋은 수술법을 찾기 위해 서로 끊임없이 토론을 벌였었다.
카프레네가 제임스 외에 마음을 연 유일무이한 의사이기도 했다.
제임스와 셋이서 밤새 위스키를 마시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태수는 스미스 박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스미스 박사라면 가능할 텐데.”
하지만 직접적인 연줄이 없었다.
제임스가 전화를 받지 않는 이상 그를 소개시켜 달라고 할 만한 의사가 없었다. 게다가 스미스 박사는 NGO도 아니기에 연줄을 찾기가 힘들었다.
UCLA 드웨인 센터장도 떠올랐지만 간혹 안부 인사만 나누는 사이인데 무턱대고 소개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그림의 떡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쉬움에 태수는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끼익.
갑자기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이선정 간호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들어왔다.
“선생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외국분이에요.”
“외국분이라니요?”
“잘 모르겠고요. 통역하는 남자랑 같이 왔는데 닥터 최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만 하던데요.”
그녀의 말에 태수의 가슴속에 커다란 기대가 떠올랐다.
혹시 제임스가 찾아온 건 아닐까.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문득 찾아오는 것도 가능했다.
태수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백인 노인 아닙니까? 키가 좀 크고요.”
“아니요. 백인에 키가 큰 건 맞는데 젊은데요.”
“그럼 아닌데. 누구지?”
태수가 갸웃거리자 이선정 간호사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찾아온 손님인데 들어오라고 해야죠. 안내해 주세요.”
“잠시만요.”
이선정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간 직후 곧장 백인 남자가 들어왔다.
탁.
그는 문을 닫자마자 진료실을 슬쩍 훑어봤다.
자신을 만나러 왔다면서 정작 인사는 안 하고 진료실부터 둘러보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
‘저건 또 뭐야?’
태수는 살짝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진료실을 찬찬히 둘러보던 백인 남자가 양쪽 귀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압박했다가 떼었다.
둘러보면서 몇 번 그걸 반복하자 태수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건 중이염을 앓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양복바지, 특히나 허벅지 쪽에 구김이 심하게 있었다. 장시간 앉아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어디서 왔지?
태수 나름대로 그걸 모두 머릿속에서 조합해 보던 중이었다.
진료실을 둘러보던 백인 남자의 입에서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프리카도 아니고.”
“안 가 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태수가 기다렸단 듯 바로 영어로 받아치자 백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영어를 곧잘 하신다더니, 발음이 좋으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알아듣기 편하고 좋네요.”
백인 남자 말에 태수가 가볍게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여기 앉으시죠. 부실해 보여도 무너지진 않으니까요.”
“그럴까요?”
백인 남자가 털썩 자리하자 태수가 물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손님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요.”
“병원에 온 손님이라면 환자죠.”
“그럼 어디가 아픈지 좀 봐주시든지요.”
백인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꼬인 듯 들리자 태수도 곱게 나가진 않았다.
흘낏 위아래로 훑어본 태수가 진료 기록서를 꺼내며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데이먼.”
“오늘 한국에 도착하신 거 같은데, 비행기는 몇 시간 타셨죠?”
“네?”
데이먼이라 소개한 백인 남자의 눈빛이 순간 번뜩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다.
태수는 덤덤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비행기 몇 시간 타고 오셨냐고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얼굴에 피로함이 가득하시네요. 계속 귀를 만지시는 거 보니까 항공성 중이염인 거 같고요.”
태수가 조목조목 집어서 말하자 데이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음.”
“바지에 주름도 있었고, 허벅지 부분이 많이 부푼 걸 보니까 혈액 순환도 조금 더딘 거 같습니다. 더 할까요?”
“아닙니다. 들려온 소문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네요.”
“소문 잘 듣고 오신 건 칭찬해 드리고 싶지만, 일단 약부터 처방할까요?”
태수의 농담 어린 말에 데이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약 먹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그럼 껌이라도 하나 씹으시죠.”
태수가 책상 서랍에서 껌을 찾아 내밀자 데이먼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받아 들었다.
“이건 감사하네요.”
“진찰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생전초면인 외국 의사분께서 절 찾아오신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
“왜 의사라고 생각했냐고요? 약 먹을 정도가 아니라고 하셨으니까요. 상의 주머니의 소형 플래시와 펜들도 그렇고요.”
태수가 또 한 번 조목조목 이야기하자 데이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이 동네 분들이 자꾸 절 속이려고 하셔서 눈치가 늘었습니다. 아직도 가끔은 속고 있고요.”
“여기 분들도 대단하신 거 같네요.”
“서로 눈치 싸움 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그보다 제 질문에 대답은 안 해 주신 거 같은데요.”
다시 묻는 태수를 향해 데이먼이 쓴 미소를 지었다.
“닥터 최를 모시고 오라는 분이 계셔서 찾아왔습니다.”
“이 시골에 있는 저를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는데요.”
“제 태도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저도 한국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비행기에 차까지 타고 오려니까 불만이 많았거든요.”
데이먼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수도 있죠. 그보다 절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누군지가 더 궁금합니다만.”
“스미스 박사님입니다.”
“누, 누구요?”
청산유수와 같던 태수의 말이 처음으로 더듬거려졌다.
데이먼이 그런 태수의 반응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스미스 박사님이라는 분이 혹시…… 이분 맞습니까?”
태수가 모니터를 돌려 스미스 박사의 사진을 보여 주자 데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분이 절 오라고 하셨다고요?”
“잘 알아들으셨네요.”
데이먼의 대답에 태수가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절 어떻게 아시고요?”
“그거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 것뿐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황당했다.
황당함을 넘어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던 태수가 순간 눈빛을 빛냈다.
혹시 제임스가 보낸 건 아닐까?
궁금증에 단도직입적으로 데이먼에게 물으려다 멈칫했다.
그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다.
만약 스미스 박사가 정말 자신을 불렀다면 직접 얼굴을 보고 찾은 이유를 알아보면 될 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근 들어 화두인 조서영의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볼 수도 있을 터였다.
어쩌면 태수만의 이기적인 생각일지 몰랐다.
하지만 스미스 박사 같은 거물이 한국을 방문할 일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언제 찾아올지 모를 기회란 뜻이다.
그 기회를 살리고 놓치는 건 순전히 태수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놓칠 이유가 없었다.
삶을 희망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내 온 조서영을 위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태수가 아차 했다.
지금은 진료 시간이다.
이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
태수는 쓴 얼굴로 데이먼에게 말했다.
“3시간만 기다려 주시죠.”
“3시간이요?”
순간 데이먼의 눈빛에 짙은 불쾌함이 떠올랐다.
그에게 스미스 박사란 존재가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태수는 당장 떠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 의사가 저 혼자인데 제가 없는 상황에서 응급 환자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의사를 데려다 놓고서라도 닥터 최는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도 그러고 싶지만, 참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3시간만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그 사정이 뭡니까?”
데이먼이 울컥해 소리쳐 묻자 태수가 쓴 얼굴로 말했다.
“일일이 설명하기는 좀 그렇고,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태수가 한국에서 공중보건의가 어떤 건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데이먼의 표정부터 변했다.
“그럼 군인이라는 겁니까?”
“대체복무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말없이 여길 떠나면 탈영병이 된단 이야기네요. 이제 이해가 가네요.”
대번에 변한 그의 말투에 태수가 멈칫했다.
그는 외국인이다.
발음과 억양으로 보면 미국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미국 사람들은 군인을 존중하는 문화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하는 이야기다.
태수도 그걸 떠올리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2층에서 잠깐 쉬시죠.”
“아닙니다. 그런 사정이라면 스미스 박사님께 전화드리고 마을 산책이라도 하고 있죠.”
“식사는 하셨습니까?”
“비행기에서 대충.”
데이먼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출하실 거 같으니 산책 다녀오시는 동안 식사를 준비해 놓죠.”
“그러실 것까지야.”
“먼 길 오셨는데 당연히 대접해야죠. 산책하고 오셔서 식사하시면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진료를 더 방해하지 않고 산책부터 다녀오죠.”
데이먼은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진료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