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73
00576 576화
한 가지 더.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환자가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스미스 박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갈 인물이다.
미세스 카프레네의 부탁으로 왔을 뿐이지, 그가 이 수술을 무조건 진행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태수도 알기에 조서영의 망설임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갑갑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조서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영 씨.”
“네? 아, 네.”
“이 기회, 다시 올진 저도 모릅니다.”
“…….”
조서영은 다시 침묵했다.
태수는 지체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해가 뜨면 첫차 타고 오세요.”
“그게…….”
“오라고 했습니다. 그럼 전 오는 걸로 알고 끊겠습니다.”
태수는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차라리 이럴 때는 강압적인 방법이 옳았다.
만약 이래도 조서영이 지레 겁먹고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
태수도 더 이상 그녀를 진료할 이유가 없다.
조서영은 수술이 죽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소극적으로 변한 상태란 건 알았다.
그런 조서영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조서영이 아니라면?
다른 환자도 넘친다.
태수 눈빛이 냉정하게 변했다.
다음 날 아침.
신속대응센터 입구가 부산했다.
그곳에는 박완용 센터장과 하석준 팀장을 비롯한 몇몇 의사들이 서 있었다.
아침나절이라 응급실이 한가해서 나와 있을 수 있었다.
직원들이 청소했는지 현관이 깨끗했다.
그 의사들 사이에 선 박성민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수 이 새끼는 사고도 참 글로벌하게 친단 말이야. 어떻게 물었다 하면 세계적인 거물이야. 이게 말이 되냐고.”
“저도 그 녀석의 인맥은 아직 끝을 모르겠습니다.”
정민수가 동조하자 박성민이 정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보다 도착할 때가 됐, 됐…… 온다!”
박성민이 갑자기 크게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정문으로 향했다.
새벽에 하석준 팀장이 보냈던 고급승용차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박완용 센터장이 다소 흥분된 얼굴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자자, 다들 맞을 준비 하자고.”
툭툭.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제임스의 방문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제임스는 예고 없이 찾아왔기에 준비도 못했지만 스미스 박사의 경우는 달랐다.
이내 검은 세단이 현관에 차례로 섰다.
뒷문이 열리고 태수가 먼저 내렸다.
찡긋.
그가 모두에게 가볍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그러고 난 후였다.
스미스 박사가 이어서 차에서 내렸다.
동시에 박완용 센터장이 준비한 꽃다발을 들고 다가갔다. 통역을 수행하게 된 정민수가 얼른 그 옆에 따라붙었다.
박완용 센터장은 정민수를 믿고 바로 인사부터 건넸다.
“스미스 박사님, 저희 신속대응센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아침부터 너무 번거롭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미스 박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받았다.
짝짝짝.
모두 가볍게 박수를 치며 환영 인사를 대신했다.
가벼운 인사를 마친 박완용 센터장과 정민수가 스미스 박사를 안내하며 멀어져 갔다.
태수가 통역을 해야 하지만 조서영이 도착하면 바로 직접 검사를 하기로 했기에 같이 갈 순 없었다.
태수가 슬쩍 돌아보자 뒤차로 쫓아온 데이먼과 몇몇 의사들이 서 있었다.
태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신속대응센터부터 한번 돌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NGO에 있는 친구가 새로운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병원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그분이 브레드 김 아닙니까?”
“아니요. 브레드와는 안면은 있지만 친하진 않습니다. 제 친구가 브레드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고요.”
데이먼의 이야기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여기 의료진들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저는 일이 좀 있어서요.”
“알고 있으니까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태수가 대기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들 중에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의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하석준 팀장이 직접 통역과 안내를 위해 선별한 인원들이기도 했다.
“입구부터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이 데이먼 일행을 안내하며 멀어져 갔다.
그제야 주변이 한가해지자 박성민이 슬쩍 다가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넌 언제까지 사람 놀라게 할 거냐?”
“네?”
“이 글로벌한 새끼야, 어떻게 세계적인 명의들을 죄다 한국으로 끌어들일 수가 있냐고.”
“이번에는 진짜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태수가 말했지만 박성민은 믿지 않았다.
“전에 제임스 박사님 오셨을 때도 전혀 몰랐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은 변명으로 스리슬쩍 넘어가시려고? 그러면 안 되지.”
“진짜 몰랐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갑자기 왔죠.”
“일부러 그런 거지. 미리 이야기하면 내가 꼬치꼬치 물을까 봐. 그래도 소용없다. 넌 오늘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아.”
박성민이 장난스럽게 으르렁거렸지만 태수는 얼른 두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아, 그놈의 환자만 아니면 진짜 이걸 그냥 확.”
“이번만 봐주세요.”
“너 그 환자한테 평생 감사해라. 아니었으면 오늘 내 잔소리에 스트레스 쌓여서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하하.”
태수가 환하게 웃자 박성민도 같이 미소를 보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그런 네가 멋지다. 인마, 환자 한 사람 때문에 세계적인 명의 멱살 잡아서 한국까지 끌고 올 정도인 네 열정이 멋지다고.”
“…….”
“자식. 뭘 그렇게 정신 빠진 놈처럼 쳐다보고 있어? 환자 어디쯤 왔는지, 언제 검사 들어갈 건지 빨리빨리 스케줄 잡아야지. 내가 너한테 그거부터 다시 알려 줘야 하는 거야, 뭐야?”
돌변한 박성민의 타박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의 가르침대로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너 잊지 마라. 그 어떤 명의를 데려올 정도로 잘나가도 넌 내가 가르친 놈이라는 걸 말이다.”
“그럼요. 선배님과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동기 동창이시고, 선배님이 발을 구르면 땅이 갈라지며…….”
태수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길게 이어졌다.
인턴 시절 박성민이 자신을 찬양하라며 인턴들에게 외우게 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박성민도 오랜만에 듣는지 그 이야기에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직 외우고 있네. 그런 정신 아주 좋아.”
“그럼 저 이제 가 봐도 됩니까?”
“가야지. 당연히 후딱후딱 가야지. 기분 좋아졌으! 우리 태수 출동!”
“출동!”
태수가 복창하며 얼른 신속대응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박성민은 그런 태수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수는 신속대응센터 의료진들과 인사하며 꼼꼼하게 필요한 걸 점검했다.
사소하게는 스트레쳐카부터 각종 검사의 준비 상태까지.
결핵을 검사하는 건 엑스레이나 CT뿐만이 아니라 각종 반응 검사도 필요했다.
그 준비 사항을 모두 확인할 때까지 태수는 일부러 조서영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마지막 선택은 결국 그녀의 몫이었다.
그런 이유로 조영규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이고 인생이었기에 남에 의해 결정되지 않게 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여기에 오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확인을 마친 태수는 시계를 확인했다.
삼척에서 첫차를 타고 출발했다면 1시간 전후로 도착할 터였다.
조금 여유가 생긴 태수가 의사 휴게실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려 바라보니 조영규의 전화였다.
태수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어, 영규야.”
“도착했는데, 어디로 가야 돼?”
“도착했다고?”
“여기 신속대응센터 응급실 입구야. 같이 왔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수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바로 갈게.”
태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꽂고 그대로 응급실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타다닥.
허겁지겁 달리자 입구에 서 있는 조영규와 조서영이 보였다.
조영규는 커다란 응급실 규모에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옆에 서있던 조서영이 애써 침착하려고 마인드컨트럴하는 모습이었다.
빠르게 다가간 태수는 조영규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고 숨부터 골랐다.
“후우.”
“왜 그렇게 급하게 왔어.”
“반가워서.”
“우리가 더 반갑지. 그보다 야, 숨 좀 쉬어.”
조영규는 태수부터 걱정했다.
빠르게 숨을 고른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조서영을 바라봤다.
“어려운 결심 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선생님께 죄송해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렇게까지 노력해 주시는데 또 도망치려고 했어요. 그래서 죄송해요.”
조서영의 말에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오지 않으셨습니까.”
“네. 저요, 밤새 많이 생각했는데요, 혹시 수술이 잘 안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저를 위해서 이렇게 애써 준 오빠와 선생님을 봐서라도 그건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조서영의 목소리에 어느새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온 게 얼마나 큰 결심이었는지 태수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위축되지 않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 줬다.
이 순간, 이 모습 하나로도 태수는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거다.
삶의 희망으로 가득한 환자의 모습.
이 모습이 바로 의사들에게 더없는 명약이었다.
“오늘은 뭐든지 잘될 거 같습니다.”
환하게 수술에 대해, 아니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한 조서영에게 수술이 가능한지 정밀 검사가 곧 진행되었다.
조서영이 검사실로 들어가자 태수에게 조영규가 다가와 대뜸 손을 잡았다.
“태수야, 진짜 고맙다.”
“징그럽게 왜 이래.”
태수가 손을 털어 내려 했지만 조영규는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진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도…….”
“영규야.”
“어, 말해. 뭐든지 말해.”
조영규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하자 태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라, 서영 씨에게 고마워해야지.”
“…….”
“나도 서영 씨가 이렇게 달려와 줘서 정말 고맙다. 이건 진심이야.”
“태수야.”
조영규의 그렁그렁한 눈빛을 본 태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삼척에 돌아가면 진하게 술 한잔해야지.”
“그래, 꼭 그렇게 하자.”
“시원한 맥주 한잔은 꼭 사 주는 거다.”
“물론이지! 얼마든지 사 줄게.”
울먹임을 억지로 삼킨 조영규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조서영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이제 검사 결과를 토대로 수술에 대한 브리핑을 해야 한다.
집도할 스미스 박사가 조서영의 현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탓이다.
그런 이유로 컨퍼런스 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는 스미스 박사와 데이먼을 포함한 외국 의사들, 박완용 센터장, 하석준 팀장 등 신속대응센터 의료진들이 모였다.
또 오늘 수술에 참여할 마취의 서영우를 비롯해 간호사들도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 의료진이 아닌 두 사람이 있었다.
그건 수술을 받을 조서영과 보호자인 조영규였다.
대부분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전하지만, 오늘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태수가 들어오라고 했다.
환자와 보호자가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야기를 듣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모두의 시선 끝에는 단상에 선 태수가 있었다.
태수는 이 수술의 브리핑을 단독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심한 오른쪽 폐의 영상입니다.”
태수의 말이 끝나자 엑스레이와 CT 결과가 반반 채워진 화면이 가득 떠올랐다.
스미스 박사는 그 화면을 신중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힌편, 반대쪽에 앉은 하석준 팀장과 신속대응센터의 주역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저 정도였어?”
“이거 참.”
뒤쪽에 환자와 보호자가 있기에 알아서 말조심을 했다. 다만 경력 많은 그들이 놀랄 정도로 조서영의 폐 상태는 너무도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