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97
00600 600화
말투는 곱더라도 명백한 거절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미 둘 사이의 싸늘한 분위기를 모두가 눈치챘다.
그들 중 이석민이 태수에게 다가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교수님과 안면이 있었나?”
“네, 예전에요.”
“그런데 왜 저렇게 찬바람이 부시나?”
“글쎄요. 제가 그동안 너무 연락을 안 드려서 그런가 봅니다.”
태수는 그렇게 둘러치며 대화를 흘렸다.
태수를 향한 이석민의 눈빛이 살짝 날카롭게 변해 갔다. 그도 눈치란 것이 있기에 보통 일은 아니란 직감이 든 모양이었다.
“좌우간 오늘은 이만 가 보는 게 좋겠어.”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할 일을 떠넘기는 건 옳지 않지. 그럼 바빠서 멀리 못 나가네.”
이석민도 곧 등을 돌렸다.
말은 좋게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축객령이다.
박종혁 교수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리 이석민이 나름 전문의라 하나 하늘같은 교수에게 밉보이는 건 미친 짓이다.
다른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몇몇 젊은 의사들만이 아쉬움을 보였다.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건 나설 수 있는 위치가 아닌 탓이었다.
결국 모두가 다시 각자 할 일을 시작했다.
“그건 저쪽으로 옮기고, 아침에 도착하기로 한 검사 차량 세워 둘 곳도 마련해야지.”
진두지휘하는 이석민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갑자기 낯선 이방인이 돼 버린 태수는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푸대접받는 건 상관없었다.
내일부터 진행될 이동 진료에 이상만 없으면 된다.
‘그래 봐야 일주일인데 뭐.’
태수는 중얼거리며 돌아서서 보건소로 다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퇴근 준비를 마친 이선정 간호사와 조서영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선정 간호사가 먼저 물었다.
“왜 벌써 오세요?”
“준비하느라 바쁜데 제가 낄 순 없죠.”
“그래요?”
이선정 간호사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된 모양이다.
태수는 굳이 자세히 이야기할 일도 아니기에 두 사람의 퇴근을 재촉했다.
“얼른 퇴근하시고요, 내일 뵙겠습니다. 조 선생도 잘 가고.”
“가긴 갈 건데요, 아무래도…….”
“너무 늦게 식사하시면 속 버립니다. 얼른 가서 식사하시고 푹 쉬세요.”
태수가 말을 가로채자 이선정 간호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외국은 물론 산간 오지에서 간호사 일을 많이 한 그녀였기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간파한 모양이다.
그러나 태수를 믿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내일 뵈어요.”
“할 일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각자 놀이거리 가져오시고요.”
“그건 모르겠네요. 좌우간 갈게요. 수고하셨어요.”
이선정 간호사가 먼저 인사를 마치자 조서영도 이어서 인사했다.
“내일 봬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태수는 두 손을 흔들며 든든한 동료들과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텅.
보건소 문이 닫히고 태수 혼자 남았다.
현관 창문을 넘어 멀찌감치 보이는 이동 진료소의 분주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가급적 편하게 생각했다.
태수도 마무리하고 퇴근할 준비를 서둘렀다.
시간이 흘러 아침이 밝았다.
잠에서 깨어난 태수는 너무도 상쾌한 느낌이었다.
“오늘부터는 한숨 돌리겠네.”
이동 진료가 온 이상 보건소는 한가할 터였다.
박종혁 교수와의 엇박자는 이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개인적인 일이 진료하는 데 문제가 되진 않을 터였다.
‘진료야 잘하시겠지.’
박종혁 교수도 나름 명망을 가진 의사이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태수의 손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단정해진 모습으로 숙소를 나선 태수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료 시간 10분 전이다.
평소 30분 전에 진료실에 앉아 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장을 부린 상태였다.
이동진료가 준 작은 선물이다.
태수는 그저 한가롭게 계단을 하나씩 밟아 가며 여유를 부렸다.
그렇게 내려가던 태수는 보건소 마당 한쪽에 펼쳐진 천막을 바라봤다.
“크고 좋네.”
딱 봐도 널찍한 천막 2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런데 사방이 뚫린 그 천막 속이 뭔가 이상했다.
워낙 아침잠이 없는 시골 사람들이라 지금쯤이면 붐벼야 했다.
초곡리와 주변 몇 개 마을뿐만 아니라, 면 전체에 소문이 퍼진 터라 주민들로 바글바글해야 옳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한가했다.
그것도 심하게 한가했다.
태수의 표정이 점점 의아하게 변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1층에 도착한 태수가 진료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보건소 현관을 본 그는 그대로 멈춰 섰다.
보건소 현관에 뜻밖에도 마을 주민들이 우글우글거렸다. 안면이 있는 주민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초곡리 주민인 박지석도 있었다.
박지석이 먼저 태수를 발견했는지 손을 들었다.
“최 선생! 왜 이렇게 늦어.”
그의 말이 시작이었다.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주민들의 시선이 모두 태수에게로 향했다.
“이제 나오나?”
“왜 이렇게 늦어.”
태수와 안면이 있는 주민들의 원성 어린 목소리였다.
“저 사람이 최 선생이야?”
“생각보다 젊네.”
태수를 처음 본 주민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건 어떤 시추에이션?
태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오는 박지석과 가까이 마주 섰다.
“아니, 왜 다 여기 서 계십니까?”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보건소에 진료받으러 오지, 뭐 하러 와.”
“어디 편찮으세요?”
“무릎이 좀 시려. 뚝뚝 소리도 좀 나는 거 같고 말이야. 영 기분이 안 좋아서 왔지.”
박지석이 살짝 부은 볼을 매만지며 말하자 태수는 눈을 끔뻑거렸다.
“어떻게 시큰하십니까?”
“짜릿짜릿해.”
“그건 별로 좋지 않은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좀 봐 달라고.”
박지석의 말에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이동 진료소 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내가 왜?”
“제 전문이 외과 아닙니까. 정형외과 쪽은 증상을 정확하게 확인하기도 어렵고, 마땅히 치료할 도구들도 없습니다.”
“음.”
태수의 말이 그럴듯하기에 박지석이 살짝 고민하는 사이였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마을 사람이 다가와 말했다.
“그럼 나부터 봐줘.”
“아저씨는 어디가 안 좋으신데요?”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어제부터 변이 영 안 좋아.”
전형적인 배탈 증세였다.
좀 더 생각하던 태수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면 더 자세하게 진찰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나도?”
“네. 내과 전문의도 오셨거든요.”
태수가 확신 어린 얼굴로 대답했으나 질문한 마을 사람 표정이 썩 좋지 않게 변해 갔다.
그때 박지석이 태수에게 말했다.
“어째 우리를 다 저쪽으로 보내고 싶은 거 같은데 말이야.”
“솔직히 그렇습니다.”
“왜?”
“여러 전문의들이 오셨습니다. 모든 의과가 다 오셨으니 제가 모르는 병도 탁탁 집어내실 겁니다.”
태수의 친절한 설명에도 박지석은 물론 주변에 있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꿈쩍하지 않았다.
“우리가 왜?”
“네?”
“내가 왜 저길 가냐고. 최 선생이 여기 있는데.”
박지석의 말에 태수는 당황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여러 분야에 정통하신 전문의들이 저기 계십니다.”
“그래 봐야 쟤들은 뜨내기잖아. 언제 봤다고 내가 저 사람들한테 몸을 맡겨.”
“말씀은 정말 감사한데요, 저분들이 더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봐주시지 않을까요?”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박지석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내 눈에는 최 선생 말고 다른 의사는 다 형편없어.”
“글쎄요. 전 이번 이동 진료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왜?”
“마을 보건소에 없는 약품과 의료 기구들이 모두 저기에 있으니까요. 간단하게 엑스레이 같은 검사도 받으실 수 있고요, 구비된 약들도 여기와는 천지 차이입니다.”
태수는 조목조목 설득했지만 박지석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 거 없어도 지금까지 잘했잖아.”
“서울 유명 대학병원에서 오신 분들인데 이럴 때 진료받으세요.”
“…….”
박지석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어졌다.
태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서 말했다.
“이번 기회에 이동 진료에서 간단한 검사라도 받으시고 건강에 확신이 생기셨으면 좋겠습니다.”
“흠흠.”
“그리고 저기 다 공짜입니다. 뭘 해도 공짜란 말입니다.”
태수의 말에 뒤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슬쩍 관심을 보였다.
“하긴 이동 진료가 공짜기는 하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왔다던데.”
“나도 최 선생 좋아하는데, 이건 좀 다른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태수의 설득에 슬슬 동요를 보였다.
그러나 박지석을 비롯한 초곡리 마을 사람들은 썩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들 모두 저리로 보내고 최 선생은 놀려고 그러지?”
“이거 딱 들켰네요. 하하.”
태수가 억지웃음을 더하자 박지석이 살짝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도 소용없어.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병은 의리로 파악되고, 또 치료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저에게 의리를 지켜 주시는 건 더욱 건강해지시는 것뿐입니다.”
“음.”
“건강하셔야 제가 또 술 한잔 따라 드리죠. 안 그렇습니까?”
태수가 찡긋거리자 박지석이 어이없는 미소를 내보였다.
“말이나 못하면.”
“그동안 얼마나 여러분들에게 단련되었으면 이렇게 잘 나불거리겠습니까.”
“헛소리 말고. 그래서 결국은 저쪽으로 가라는 거 아니야.”
“건강을 위해서요.”
태수가 뒷말을 더하자 박지석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뭐, 마을 의사에게 버림받았는데 저기 가서 하소연이라도 해야지.”
“아마 잘 들어 주실 겁니다.”
“됐다고 봐.”
툴툴거린 박지석은 끝까지 태수를 흘겨보며 몸을 움직였다.
이어서 마을 사람들도 같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수는 그들이 이동 진료소에 도착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미소 띤 얼굴로 지켜봤다.
곧 보건소 앞이 한가해졌지만 그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또 찾아올 터였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태수는 눈빛을 빛냈다.
동시에 얼른 보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보건소 현관문에 복사 용지가 하나 붙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서울에서도 유명한 충효종합병원에서 실력 좋은 의사분들이 찾아오셨으니, 이동 진료소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문을 바라본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다고 곧장 보건소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안내문을 붙이긴 했지만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 확률이 높은 탓이다.
이동 진료소에 양해를 구해 진료에 참가하는 게 옳았다.
태수는 그런 생각으로 이동 진료소 쪽으로 향했다.
태수가 다가오자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움직이던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밝게 변했다.
“그냥 가라는 게 아니었네.”
“난 또 놀고 싶어서 우리를 이쪽으로 보내는 건 줄 알았지.”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자니까. 최 선생도 오는 거라고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마을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불안감을 날려 버렸다.
그사이, 이동 진료소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주민들이 동시에 도착한 탓이다.
“간호사님들은 성함하고 증세부터 파악해 주세요.”
“알았어요.”
간호사들이 먼저 움직인 후였다.
전문의들의 시선이 젊은 의사들에게 향했다.
“1년 차, 그리고 레지던트들!”
“네!”
“1차 진료 하고, 모르겠으면 바로 넘겨.”
“알겠습니다.”
“연습이 아니라 실전이다. 정신 똑바로 챙기고!”
전문의의 잔소리를 들으며 젊은 의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