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
00006 6화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노인에게 남은 단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또한 계속 말을 걸며 의식을 붙잡아둬야 한다는 생각뿐이 없었다.
노인은 태수를 향해 물었다.
“혹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기억하나?”
“그건 또 왜요?”
“듣고……. 싶어서.”
노인의 눈빛에 작은 간절함이 떠올랐다.
“나중에 해드릴게요. 한 백번 하면 될까요?”
“지금이어야……. 한다니까.”
“…….”
“어렵나?”
죽음을 앞둔 사람의 부탁이다.
아니, 살아날 확률이 있다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가 원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라도 정신을 놓지 않을 게 분명했다.
태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고요한 숲속에 태수의 묵직한 선서가 울려 퍼졌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의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태수가 기나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읊는 사이였다.
노인의 시선이 태수에게서 벗어나 하늘로 향했다.
‘그 위에 누군가 계십니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마음속 중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 저도 미치……. 도록 두렵습니다. 그 위에 있……. 는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모……. 르니까요. 그리고 이런 죽음……. 을 원하는 것……. 도 아니……. 었습니다.’
잠깐 말을 마친 노인이 이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위……. 에서 하는 일이라면 인간인 저……. 는 따라야겠지요. 하지만 저도 부탁……. 하나만 하고 싶……. 습니다.’
태수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모두 끝나갈 즈음이었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하늘에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했다.
‘미천한 머릿속에 있는 자그마한 지식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이 청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순수함이 죽어가는 절 너무도 아쉽게 합니다. 조금만 빨리 만나게 해주시지요. 단 하루만이라도 둘만의 시간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당신은 저에게 큰 빚을 진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 미천한 지식이 이 이름 모를 청년에게 이어지게 해주십시오. 그게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노인이 하늘을 향해 온 마음으로 비는 사이였다.
태수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낭독을 마쳤다.
“들으셨습니까?”
“목소리가……. 좋군.”
딴소리를 늘어놓는 노인에게 태수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데 왜 낭독하라고 하신 겁니까?”
“내 시작……. 이었고, 끝이니까.”
“…….”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의사라는 건 진작에 짐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들으니 더더욱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노인이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에……. 반지를.”
억지로 들어 올린 손길이라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태수가 빠르게 손을 잡고 살피자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이 이어서 말했다.
“아내에게……. 전해 줄 수 있나?”
“집 주소가 어떻게 되십니까?”
“자네를 찾아갈……. 거야. 그럴 사람이니까.”
짤막한 말이었지만 아내를 사랑하고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솔직한 얘기로 태수가 봐도 가망은 없었다.
119에 신고한지도 벌써 10분이 지났다.
진작에 쇼크가 왔을 노인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건 태수가 파손된 간을 압박한 덕이 컸다.
태수도 알기에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 말도……. 전해 줘. 당신의 미소가……. 내 전부였다고.”
“알겠습니다.”
“아, 이제 할 말도……. 다 한 거 같은데.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도 계속 말씀하셔야 합니다.”
태수가 말을 걸려 했지만 노인이 거부했다.
“거의 50년 만에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는 거 같아. 이젠 다시 일어나기가……. 싫어졌어.”
“집에 가서 아내 분 손잡고 마지막 인사하셔야죠.”
“이미 자네에게……. 다 말했는데 뭐.”
“안 전해드릴 겁니다.”
태수가 억지를 부렸지만 노인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럴 사람 같았으면……. 내가 얘기도 안했겠지.”
“어떻게 절 믿으십니까?”
“눈빛.”
“…….”
태수가 침묵하자 노인이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억지로 말을 꺼냈다.
“좋은 의사가……. 될 거야.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돈 벌려고 의사하는 겁니다.”
“벌게 돼. 나도 돈 많이……. 벌었으니까.”
“그런가요?”
태수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 사이 노인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리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 좀 쉴 테니까. 뒷일을 잘 부탁하네.”
이젠 더 이상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안달복달하던 태수는 마음을 바꿨다.
노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게 된 상황이다.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을까?
마지막으로 숨을 내쉬는 사람에게 그건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럼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까.
생각은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됐다.
태수는 노인과 마주한 후 처음으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걸린 눈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끝까지 노인을 바라보며 푸근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먼 여행길. 조심하십시오.”
“이젠 아프지도 않은데 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 상대해줘서, 고맙…….”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이 눈을 감았다. 이어서 미약하게 들썩이던 가슴도 멈췄다.
노인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노인의 간을 누르고 있던 태수도 손길을 거뒀다.
이미 맺힌 눈가의 눈물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울음소리도 없고, 울음을 참는 소리도 없었다.
그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만난지 고작 10여분뿐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누군가를 떠나보낸 아픔같은 그 뭔가로 가슴이 답답했다.
이내 태수가 노인의 몸으로 무너져 내렸다.
“으……. 으윽.”
억지로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터져 나왔다.
“으아아!”
울음인지 절규인지 모를 고함소리였다.
의사로써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괴로움.
인간 대 인간으로써의 연민.
모든 게 뒤엉킨 울음이었다.
태수가 온 몸으로 울부짖는 사이였다.
스르륵.
노인의 심장에서 무언가 빠져나와 태수에게로 향했다.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태수의 울음소리만이 산속을 가득 메울 뿐이다.
구급대원이 도착한 건 태수의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무렵이었다.
도착과 동시에 구급대원들은 노인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서로 오갈 말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구급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사이 태수는 조금은 멍한 상태였다.
죽음을 눈앞에서 맛보는 충격이 그만큼 컸다.
병원에서 겪는 죽음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처음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을 놓친데 대한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허나 태수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임종을 지킨 사람이 자신이었고, 이후 조사를 받아야 할 것도 있다.
그 정도 상식은 가진 태수였기에 구급대원과 함께 이동했다.
산을 내려온 태수와 구급대원들은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가는 동안도 구급차 안은 온통 침묵뿐이었다.
태수는 무심한 눈빛으로 하얀 천으로 머리끝까지 덥힌 노인을 바라봤다.
사람이라는 게 결국 이렇게 끝을 맺는 걸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죽으면 끝인 걸까?
생과 사에 대한 개념이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끼익!
구급차가 멈춰서더니 이내 뒤로 후진했다.
응급실 입구로 차를 대려는 움직이라는 걸 인지한 순간 태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일단 덮어두자.’
속으로 중얼거린 태수는 생각을 접었다.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을 고민으로 자신의 마음을 계속 뒤흔들고 싶지 않은 탓이 컸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담당의사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