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15
00618 618화
태수가 바라보자 박창민 대원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연막 막대입니다. 위치 알리기에 이만큼 좋은 게 없거든요.”
“멀리서 딱 봐도 알겠습니다.”
“그럼요. 산에서는 필수입니다.”
예정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박창민 대원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콰과과과!
머리 위에 도착한 헬리콥터 소리 때문에 주변이 엉망진창이었다. 낙엽이 무수히 휘날리며 시야를 방해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저 위에서 굵고 튼실한 생명의 동아줄이 내려오기만 하면 된다.
태수도 박창민 대원을 포함한 구급대원들도 모두 기대에 찬 얼굴로 헬리콥터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도착한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 헬리콥터는 아직도 굵은 와이어를 내려 보내지 않았다.
뭐지?
다들 이상함을 직감한 후였다.
갑자기 헬리콥터가 방향을 바꿔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어?”
“야! 인마, 어디 가!”
구급대원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난리를 부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멀어져 가는 헬리콥터에 도달하지 못했다.
태수 또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얼른 박창민 대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모른다는 말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태수가 갑갑함을 억누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때 무전기를 든 박창민 대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뭐가 어떻게……. 죄송합니다. 잠시…… 어?”
사과하던 박창민 대원이 멈칫했다.
그 소리에 태수의 시선도 바로 하늘로 향했다.
떠나갔던 헬리콥터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다들 확인했는지 날이 선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해 갔다.
“난 또 뭐라고.”
“그렇지. 그냥 갈 리가 있겠어?”
“자식들이 지금 저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타박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다시 헬리콥터에 들것을 설치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헬리콥터가 머리 위에서 다시 멈춰 섰다.
이젠 와이어가 내려올까.
기대대로 와이어가 작은 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태수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를 무렵이었다.
내려오던 와이어가 다시 올라갔다.
준비를 마친 구급대원들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뭐, 뭐야?”
“저 새끼들이 진짜!”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내리라고!”
구급대원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 장난을 몰랐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을 할 정도로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멈춰 있던 헬리콥터가 서서히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의 머리 위를 크게 두 바퀴 돌더니 그대로 멀어져 갔다.
태수의 시선이 당연히 박창민 대원에게로 향했다.
“이게…….”
태수는 재촉하려다 멈칫했다.
박창민 대원이 무전기를 손에 든 채 심각한 눈빛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탓이다.
그도 태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곧 눈을 마주쳤다.
“비상 상황입니다.”
“무슨 비상이요?”
“이 빌어먹을 놈의 돌풍 때문에 하늘 위 대기가 불안정한 거 같습니다.”
박창민 대원의 말에 태수의 눈빛도 굳어졌다.
카슈미르에서 여러 번 헬리콥터로 이동해 봤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기가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헬리콥터가 오래 멈춰 있을 수 없었다. 환자를 안전하게 끌어올리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없단 뜻이다.
그러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잠잠할 때 다시 시도하면 안되나요?”
“돌풍이 멈출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답니다. 기상청에도 알아봤답니다.”
“그럼 환자는 어떻게 하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묻는 것도 아니고 대답하는 것도 아닌 묘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진지한 눈빛만큼은 이 상황이 결코 허투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게 했다.
태수는 이 현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들것에 싣고 내려가는 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단 말입니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기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릴 순 없잖습니까.”
“이렇게 맑은데.”
하늘을 올려다본 태수가 탄식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은 너무도 청명했다.
그러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 치솟은 화를 토해 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태수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누구 하나 그 소리에 반박하지 않았다. 구급대원 모두가 한마음이다. 자신들의 심정 또한 태수와 똑같은 탓이다.
박창민 대원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저 하늘이 빌어먹은 거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씨발. 이런 엿 같은 상황이 어디 있습니까.”
태수가 버럭 짜증을 내자 박창민 대원이 움찔했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이런 격한 모습은 처음 본 탓이었다.
다른 대원들도 버럭한 태수의 눈치만 봤다.
그때 태수의 시선이 조홍찬에게로 향했다.
진짜 빌어먹을 상황이다.
태수는 몸을 낮추고 눈을 감은 조홍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답니다. 그런데 전 그 말을 진짜 싫어합니다. 누군가 정해 놓은 시간만 살고 죽는 게 얼마나 빌어먹을 일입니까.”
“…….”
“그래서요, 그래서 오늘 그 운명에 반항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도와주십시오. 딱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조홍찬을 향해 이야기하는 건지, 아니면 구급대원들을 향해 하는 이야기인지 모를 소리였다.
그렇지만 다들 찌릿한 느낌이 왔다.
누구 한 명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모두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때 박창민 대원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끄덕.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다른 대원들이 고갯짓했다.
태수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카프레네와 같이 또 산속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낼 순 없었다.
“한번 해 봅시다.”
태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이내 이동이 시작되었다.
4명의 구급대원이 사방에서 들것을 들고 하산했다.
태수는 들것 바로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조홍찬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그러나 이동은 쉽지 않았다.
우선 산은 도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솟아오른 돌부리와 군데군데 파인 곳까지 모두 피해 가야 했다.
피치 못하게 통과해야 할 때는 다른 대원들과 높이를 맞춰야 한다. 높게 들거나 낮게 들어야 할 때 환자는 물론 다른 대원들에게까지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속도도 조절해야 했다.
가장 충격이 없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려가야 한다.
걸어가며 받는 충격을 모조리 흡수하는 것도 대원들 각자의 몫이었다.
그건 신체에 큰 무리가 가는 일이기도 했다.
출발한 지 이제 10여 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충격을 받고 또 받은 구급대원들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신경을 세우며 이동하는 만큼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빠르게 지쳐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신음을 토하지 않았다.
“조심히.”
“거기 구덩이 있어. 피하면서 이동해.”
오히려 서로를 걱정하고 살폈다.
아무것도 없이 편하게 걸어가는 태수가 민망할 정도였다.
“언제든지 교대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이 이걸 들면 조치는 누가 합니까.”
“…….”
“각자 할 일이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태수를 다독이는 박창민 대원의 얼굴에 억지 미소가 그려졌다.
그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수가 걱정하는 걸 느낀 후로는 표정조차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태수가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태수, 그는 지금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조금 더 하산하던 중이었다.
들것에 실린 조홍찬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태수가 바로 소리쳤다.
“잠깐!”
그 소리와 동시에 들것은 정지 화면처럼 멈춰 섰다.
구급대원들의 호흡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한 번 알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내려 주세요.”
“저쪽이 평평합니다. 저기로 가.”
곧 태수의 요청대로 들것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태수는 바로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로 내부를 파악했다.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그런데 인상을 쓰고 있다면 국소마취의 효과가 떨어지고 있단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바로 리도카인을 주사기에 담고 흉부와 복부 여러 군데를 찔렀다.
그 모습을 본 박창민 대원이 물었다.
“리도카인입니까?”
“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버티게 해야죠. 그런데 이 속도로 내려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태수가 반문하자 박창민 대원이 머리를 굴려 계산했다.
“2시간 남짓입니다. 더 빨리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 압니다. 그거 때문에 여쭤 본 건 아닙니다.”
“네.”
박창민 대원은 대답 후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갑갑하지만 서로 닦달할 수 없기에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태수는 생각했다.
지금은 국소마취제로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다.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른다.
2시간 후에 산을 내려간다고 해도 삼척종합병원까지 이송하려면 또다시 1시간이 필요하다.
보건소가 그나마 가까운데 이런 대수술을 할 인원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가지 못할 거면 오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일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태수가 고민하는 사이였다.
리도카인의 효과가 번지기 시작했는지 조홍찬의 일그러진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임시방편이지만 이 정도로도 이동은 가능했다.
태수는 짬을 내어 쉬고 있는 구급대원들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제 이동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세요.”
“죄송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도 같이 내려가는 길이잖습니까.”
다른 구급대원이 그렇게 말하고는 찡긋거렸다.
그도 힘들 터인데 미소에는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 또 내려가 볼까?”
“이번에는 좌우를 바꿔서 가자고.”
“그게 부담 줄고 좋지.”
박창민 대원을 포함한 다른 구급대원들이 기를 쓰고 들것을 허리까지 끌어올렸다.
일부러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기에 태수 또한 가슴이 뭉클했다.
다시 이동이 시작된 순간 태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상대는 유승원 과장이었다.
“어, 최 선생, 어떻게 된 거야? 왜 아직도 안 와?”
“헬리콥터 편으로 가려고 했는데 대기가 불안정해서 도보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젠장. 하늘도 안 도와주네. 현재 상황은 어때?”
“그러니까…….”
태수가 조홍찬의 현재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오늘 직접 통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상세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입니다.”
“이거 참.”
유승원 과장은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를 가득 토해 냈다.
태수가 잠깐 침묵하고 있자 유승원 과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그래서 언제 도착하는데?”
“못 갈 거 같습니다.”
“못 온다고?”
“그때까지 버티는 게…….”
태수는 일부러 말을 삼갔다.
그러나 그 뜻을 유승원 과장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보건소에서 수술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보건소에서 그게 가능해?”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태수는 자신감을 보였지만 유승원 과장에게서 불신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최 선생 실력은 인정해. 그런데 보건소에서 수술이라니, 아무리 지원을 해 준다고 해도 그게 되겠냐고.”
“삼척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거 참. 그래도 그렇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까지 와 닿진 않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