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25
00628 628화
수술실이 얼추 정리될 때까지 태수는 조홍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아까의 감성이 채 식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에게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네? 아, 네, 전혀 문제없습니다.”
“진짜 좀 이상하신 거 같은데요.”
“제가 뭐가 이상합니까. 이렇게 멀쩡한데요.”
태수가 찡긋거리며 넉살을 부릴 때 이번에는 마취의가 일침을 가했다.
“멀쩡하기는, 한참 넋을 놓고 있더만.”
“아! 그런가요.”
태수가 쩔쩔매자 마취의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까지 벌을 세워.”
“벌이라뇨?”
“열심히 살렸으면 이젠 쉬자고.”
“아, 죄송합니다. 먼저 가시지 그랬습니까.”
“수술실에도 엄연히 의리가 있지. 집도의가 안 움직이는데 먼저 수술실 나가는 마취의가 어디 있어.”
마취의의 뼈가 담긴 말에 태수가 더욱 머쓱해졌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최 선생, 혹시 뭐 찝찝한 거 있어?”
“네?”
“계속 환자 얼굴만 보고 있던 거 같은데 말이야.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으면 빨리 이야기해. 나중에 소란피지말고 말이야.”
마취의가 걱정스런 본심을 드러내자 태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뭐야?”
“환자분이 견뎌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태수가 둘러쳐서 이야기하니 마취의가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뭐라고. 하긴 이 큰 수술을 견뎌 준 환자도 얼마나 힘들었겠어.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인사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쉬어야 할 분을 계속 잡고 있으면 쓰나. 그리고 우리도 이젠 좀 쉬어야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먼저 나가시죠. 정리하고 나가겠습니다.”
보통 수술실이라면 집도의였던 태수의 발길이 앞섰을 터였다.
그러나 보건소 수술실이기에 양보했다.
마취의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천천히 나가면서 한마디 건넸다.
“오늘 일 잊을게.”
“네?”
“수술상황 말해 봐야 나만 미친놈 취급 받을 거 같아.”
“아, 네.”
그제야 알아들은 태수가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카슈미르에서의 경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수술을 말함이다.
거기선 의과 따질 여유도 없이 닥치는대로 배웠다.
그걸 모르는 마취의로선 미치고환장할 일이지도 모른다.
마취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이윽고 마취의가 사라지자 태수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이선정 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선생님, 대충 다 정리했는데.”
“무슨…… 어?”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본 태수는 상당히 깔끔하게 변한 수술실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될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수가 어색한 기분으로 둘러보는 사이, 이선정 간호사의 밉지 않은 질책이 들려왔다.
“환자만 계속 보고 계셨으니 뭐가 눈에 들어오셨겠어요?”
“하하.”
“다 좋은데 환자를 우선 병실로 옮겨야죠. 언제까지 여기에 두실 건데요.”
“알겠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태수가 얼른 꼬리를 내리자 이선정 간호사가 살짝 웃음 지은채 한마디했다.
“알면 잘하세요. 그보다 이제 환자 옮겨도 되는 거죠?”
“네. 김 선생, 좀 도와주겠어?”
태수의 요청에 김준혁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방으로 가면 됩니까?”
“그래. 인공호흡기랑 ECG도 잘 챙겨 주고.”
“걱정 마십시오. 잠시만요.”
김준혁은 얼른 수술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야!”
“수고했어!”
밖에서 떨리면서도 커다란 음성들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초조하게 비상호출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삼척종합병원 의료진들이 분명했다.
총 6시간의 수술이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 준 그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준혁이 배종철, 간호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이동하겠습니다.”
“고생해 줘. 부탁합니다.”
태수가 간호사들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다들 빙그레 미소지으며 조홍찬을 옆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이선정 간호사와 조서영도 거기에 한손을 보탰다.
아무것도 없는 썰렁한 보건소 내 병실에 처음으로 중환자를 머물게 해야 하기에 필요한 물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태수도 기꺼이 한손을 보태려고 했다.
“제가 좀…….”
태수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 했지만 다들 교묘하게 그가 다가오는 걸 막아섰다.
“배 선생, 그쪽부터 풀어.”
“풀었습니다.”
“다들 빠짐없이 챙겨 주시고요.”
“네.”
김준혁이 지친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두지휘했다. 그도 다가온 태수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태수가 지금 갈 수 있는 곳은 수술실 문뿐이었다.
물론 더욱 강하게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태수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던 탓이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끝까지 고생하는 의료진들에게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움찔.
다들 몸을 한차례 굳혔지만 다시 할 일을 이어 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태수는 섭섭하지 않았다.
빨리 가서 쉬라는 의미인 탓이다.
태수는 몸을 돌려 수술실을 나갔다.
수술실을 나선 순간 그에게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들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을 확인한 태수가 깜짝 놀랐다.
“아니, 두 분이 어떻게…….”
상대는 바로 삼척종합병원의 외과장과 유승원 응급실 과장이었다.
다가온 외과장이 먼저 태수에게 말했다.
“웃기는 건 말이야, 이젠 이런 상황은 놀랍지도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이 환경에서 그런 대수술을 성공시켜 놓고 무슨 일이냐니.”
외과장이 버럭 소리쳤다.
아무래도 먼저 나간 마취의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태수는 일단 에둘러 이야기했다.
“다들 도와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자세하게 이야기하기 싫은 모양인데.”
“좀 봐주십시오.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태수가 짐짓 앓는 소리를 하자 외과장이 흘겨봤다.
“최 선생 얼굴이 조금만 좋았어도 끝까지 파고들었을 텐데 말이야.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감사합니다. 그보다 두 분이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태수가 궁금한 걸 묻자 대답은 유승원 과장의 입에서 나왔다.
“복귀가 너무 늦어지는 거 같아서 하도 궁금해서 왔어. 그런데 괜히 왔어. 심장 떨려서 꽤 고생했어. 대기실도 완전히 긴장 상태였어.”
“죄송합니다. 제가 중간에 연락을 한 번 드렸어야 했는데요.”
“집도하는 의사가 그럴 정신이 어디 있어. 그보다 고생했어.”
“아닙니다. 과장님들과 다들 이렇게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태수는 공로를 두 사람과 삼척종합병원 의료진들에게 은근슬쩍 넘겼다.
빈말이 아니라는 건 진지한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다.
유승원 과장은 그런 태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더 고마워. 그건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보호자들을 불러야 하지 않나?”
“네, 그래야죠.”
“누굴 보내야 하나.”
그때였다.
“전화했으니까 곧 올 거요.”
투박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힐끔 상대를 확인한 태수가 또 한 번 놀랐다.
“이장님.”
“왜 찾아.”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마을에 이렇게 큰일이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이기남 이장은 주변에 누가 있든지 관계없이 평소대로 툴툴거렸다.
태수는 그런 이기남 이장에게 다가갔다.
잠을 못 잤는지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하고 두 눈이 벌겠다.
“내일 제가 찾아가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우리 마을에서 사람 죽었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쫓아온 거야. 어떻게 보건소에서 그렇게 큰 수술을 하냔 말이야. 이게 말이 되냐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더 문제였다고. 실력이나 좋은 의사도 아니고, 칠칠맞은 의사가 수술한다니까 신경이 오죽 쓰여야지.”
이기남 이장은 태수를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다만 거친 입담과 달리 눈빛은 부드러웠다.
‘고생했다.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진심은 눈빛 속에 스며 있었다.
태수도 이장을 알고 지낸 지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금방 알아채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진짜 간신히 성공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성공해야지. 뭘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러게 말입니다.”
“하암. 이제 난 가서 자야겠네. 나중에 봐.”
이기남 이장이 갑자기 억지 하품을 하며 돌아섰다.
태수가 깜짝 놀라 얼른 다가갔다.
“어딜 가십니까?”
“그럼 이 시간에 뭘 하자고.”
“그건 아니고, 이렇게 가시면 제가 죄송하죠.”
“웃기고 있네. 마무리하고 빨리 자. 아침에 문 열 생각 말고.”
끝까지 잔소리를 퍼부은 이기남 이장이 느긋하게 보건소를 벗어났다.
비단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라 찾아온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했지만, 태수가 걱정되어 일부러 찾아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푹 자란다.
고생한 태수를 위한 마음의 배려였다.
태수는 마치 어려서부터 봐 온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함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때 유승원 과장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초곡리란 곳, 참 정이 많은 동네야.”
“그래서 행복합니다.”
“저분들도 똑같을 거야.”
툭툭.
유승원 과장은 가볍게 태수의 어깨를 다독여 줬다.
눈빛에는 이런 무한한 사랑을 받는 태수를 향한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대화도 잠시였다.
벌컥!
보건소 문이 활짝 열리더니 두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한 명은 조홍찬과 비슷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비슷한 또래의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눈빛으로 다가왔다.
“우, 우리 애 아빠는요. 애 아빠 어디 있어요?”
“형수님, 진정하세요.”
뒤따라온 중년 남자가 얼른 아주머니를 만류했다.
보아하니 조홍찬의 부인과 동생인 것 같았다.
조홍찬의 부인은 도무지 이성적일 수가 없는지 유승원 과장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진짜 우리 애 아빠 수술이 잘 끝났나요? 정말 이젠 괜찮은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 최 선생이 설명해 드릴 겁니다.”
“네?”
“직접 수술을 집도해 준 최 선생이니까 저보다 훨씬 자세하게 설명드릴 수 있을 겁니다.”
유승원 과장의 말에 조홍찬 부인의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예상보다 너무도 젊었다.
아니, 의사로는 어리다고 해도 좋을 인상이다.
“무, 무슨…….”
조홍찬의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조홍찬의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수술을 해 주신 게 이분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지, 진짭니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엔 불신이 가득했다.
유승원 과장은 난처했다.
그러나 태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너무도 많이 겪어 온 상황인 탓이었다.
더 이상 유승원 과장을 난처하게 할 수 없기에 태수가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초곡리 보건의 최태수입니다.”
“…….”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환자분 얼굴부터 뵙고 다시 나누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네, 어서요.”
“주의하실 건 절대 환자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자칫 천추의 한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태수가 침착하게, 그러나 경고를 담아 말하자 보호자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들이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홍찬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눈빛이 다시 다급하게 변해 갔다.
태수도 그 마음을 알기에 바로 두 사람을 병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