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27
00630 630화
태수의 뜻을 곡해해서 듣진 않았다.
다만, 병원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서울의 유명한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신속대응센터가 유명하다지만, 서울의 대형 병원들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도 함께였다.
물론 조홍찬의 수술을 집도해 준 태수에겐 무한한 감사를 보내도 부족했다.
하지만 장기간 치료를 해야 하기에 병원을 고르는 건 아무래도 신중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조홍민뿐만 아니라 조홍찬의 부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태수가 그들에게 더 강압적으로 말할 순 없었다.
선택은 결국 보호자들의 몫이다.
태수는 그 경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화가 끊이지 않던 병실에 돌연 침묵이 찾아왔다.
보호자들이 서로 눈빛을 보내는 게 보였다.
태수는 잠깐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순서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실례합니다.”
태수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병실을 나왔다.
대기실로 나오자 부산한 움직임이 보였다.
삼척종합병원 의료진들이 돌아갈 준비를 하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거 조심해서 나르라니까.”
“빠진 거 있는지 다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바쁘게 오가는 의료진들의 얼굴에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태수도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됐어?”
어느새 다가선 외과장의 질문이었다.
테수가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신속대응센터로 이송을 권했는데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죄송합니다. 삼척종합병원으로 보내야 하는데.”
태수의 사과를 들은 외과장이 나지막이 물었다.
“환자를 위한 권유 아닌가?”
“그건 맞습니다.”
“그럼 미안할 게 아니지. 집도한 최 선생의 판단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신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태수는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쪽팔리기는 하지만 우린 아직 역량이 부족해.”
“…….”
“사실이잖아. 최 선생이 모르는 것도 아닐 거고.”
외과장이 수더분하게 인정하자 태수가 외려 멋쩍어졌다.
“삼척종합병원도 훌륭한 병원입니다.”
“그렇게 봐주면 고맙고. 그보다 잠깐 안에 들어가서 보호자들과 이야기할 게 있는데, 괜찮을까?”
“무슨 말씀을요?”
“한손 거들어주지.”
태수는 외과장의 내심을 한눈에 알아차리곤 얼른 고개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지.”
외과장이 눈을 찡긋한 후 병실로 들어갔다.
혼자가 된 태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수술에 사용된 물품들을 밖으로 나르는 움직임이 부산했다.
그때 김준혁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정리해야 돌아가서 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쉬기보다는 힘겹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걱정이 된 태수가 다가가 김준혁에게 물었다.
“괜찮아?”
“저보다 선생님이 더 걱정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나야 다들 돌아간 다음에 늘어지게 쉬면 돼. 그런데 김 선생은 아니잖아.”
태수가 계속 염려를 보이자 김준혁이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
“전 이거 정리 다 끝나고 복귀하면 오프입니다. 과장님이 하루 푹 쉬라고 해 주셨습니다.”
“다행이네.”
“저희보다 선생님이 더 걱정입니다. 수술실에서도 너무 고생하셨잖습니까.”
김준혁이 외려 걱정을 보이자 태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들 도와줘서 내가 편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진짜 너무 고마웠어. 그보다 그건 뭐야?”
“의약품들하고 그 외에 몇 가지 담아 놓은 겁니다.”
“그래?”
태수가 슬쩍 상자 안을 들춰 보더니 눈빛을 반짝였다.
보건소에 없는 약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수는 김준혁이 든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꼭 가져가야 되나?”
“네?”
“무거운 거 같은데 놓고 가라고.”
“아, 그게…….”
김준혁은 순간 땀을 삐질 흘렸다.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 뭐라고 대답은 못하고 난처한 기색만 가득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실을 것도 많던데 뭐. 그리고 꼭 가져가야 되는 건 아니잖아.”
“하하. 그게 참…….”
김준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태수의 옆으로 유승원 과장이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이걸 보고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고 하나?”
“아, 과장님.”
“양심도 적당히 있어야지, 무작정 내놓으라고 하면 되겠냐고.”
유승원 과장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타박했지만 태수는 더욱 넉살을 부렸다.
“저 상자 하나면 몇 달은 특수 의약품 걱정 없습니다.”
“요즘 아픈 사람도 없다며.”
“환자가 언제 예고하고 옵니까? 마을 사람들이 계속 건강하시길 바라지만, 그게 마음대로 돼야죠.”
태수의 반박에 유승원 과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반박하지 못하게 말을 하나.”
“정말 필요해서 그럽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럼 놓고 가야지. 김 선생, 그거 최 선생 줘.”
유승원 과장이 수더분하게 승낙하자 태수가 움찔했다.
“진짜 괜찮은 겁니까?”
“달라더니 준다니까 빼는 건 뭐야.”
“양심 챙기라고 하셔서요.”
태수가 넉살을 부리자 유승원 과장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지. 뭐, 중요한 의약품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로스 처리 해 버리면 돼.”
“그럼 정말 가져도 되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태수는 인사와 동시에 김준혁에게서 상자를 빼앗듯이 건네받았다.
희희낙락한 얼굴로 변한 태수는 바로 이선정 간호사에게 넘겼다.
“여기요.”
“선생님 멋쟁이! 조 선생님, 우리는 이거 정리해요.”
피곤함이 가득한 이선정 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얼른 상자를 들고 약제실로 들어갔다.
조서영도 기쁜 얼굴로 따라 들어갔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유승원 과장은 질렸단 얼굴로 변했다.
“어째 의사나 간호사나.”
유승원 과장이 슬쩍 흘겨봤지만 태수는 뻔뻔하게도 빙글빙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 붙잡고 뭘 시켜. 들어가서 잠깐이라도 좀 쉬어.”
“아직 일이 마무리가 안 되어서요.”
“외과장님 나오시면 부를 테니까 잠깐이라도 앉아 있으라고.”
유승원 과장은 아예 진료실 쪽으로 태수의 등을 떠밀었다.
버틸 힘이 없는 태수는 그 손길에 의도치 않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거 참.”
“들어가라고.”
유승원 과장이 아예 진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밀어 버리기까지 했다.
탁.
얼떨결에 진료실에 들어온 태수의 표정이 난처했다.
그렇다고 다시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없었다. 호의를 무시하기에는 유승원 과장과의 친분이 두터운 탓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나갈 생각을 접었다.
태수의 시선에 진료실 의자가 보였다.
하지만 다가가서 앉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 앉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
그게 현재의 몸 상태였다.
그래도 다리가 떨려 오래 서 있을 수 없기에 진료 책상에 가볍게 기댔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만족했다.
동시에 태수는 휴대폰을 들었다. 보호자에게 권해 놓고 신속대응센터에 이야기를 안 할 순 없었다.
더불어 외과장이 나서서 설득한다면 보호자들에게 말발도 선다.
그렇다면 신속대응센터로 갈 가능성이 크단 판단에 태수는 곧바로 하석준 팀장에게 전화했다.
뚜루루.
몇 차례 신호음이 들렸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자 태수의 시선이 벽걸이 시계로 향했다.
새벽 1시.
주간 근무라면 잠들었을 시간이다.
“아…….”
일정 확인을 못한 태수가 아차 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탈칵.
통화가 연결되었다.
태수는 죄송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난기 가득한 낯익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지금 거신 전화는 하석준 팀장님의 휴대폰이 맞지만, 본인께서 잠시 부재중이신 관계로 삐 소리가 나면 용건을 남겨 주시기 바란다, 이 태수 새끼야.”
“선배님!”
“나 귀 안 먹었어, 인마. 넌 이 전지전능하신 박성민의 생사가 궁금하지도 않냐? 어떻게 나한테는 전화 한 통이 없냐고, 이 무심한 놈아!”
박성민의 거친 입담에 태수의 어깨가 순간 좁아졌다.
그런데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았다.
짐작 가는 상황에 태수가 슬쩍 물었다.
“혹시 술 드시고 계십니까?”
“왜, 내가 술 취해서 되는 대로 떠들고 있다고 하고 싶은 거냐? 그래도 소용없다. 나의 몸은 취했을지언정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으니까.”
“그저께도 술 드셨잖아요.”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통화했으니까요.”
태수가 대답하자 박성민의 목소리가 순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딘지 모르게 딱딱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으로 인해 당분간 조용할 테니…….”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흠흠흠. 이 새끼가 기껏 취했는데 정신 번쩍 들게 하네.”
“방금 정신은 멀쩡하다고 하셨습니다.”
태수의 말에 박성민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변했다.
“이 자식이 자꾸 말꼬리는 왜 잡어. 아니지, 너 왜 전화해서 내 정신 산란하게 하는데? 혹시 이제 와서 내가 보고 싶다는 고백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당장 이불 뒤집어쓰고 자빠져 자.”
“팀장님께 전화드린 건데요.”
“아아, 맞다. 이거 내 휴대폰 아니지. 그런데 왜?”
“환자 이송 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태수가 운을 띄우자 박성민의 목소리가 오묘하게 변했다.
“무슨 환자 이송을 보건의가 담당해? 너 혹시 보건의 때려치우고 삼척종합병원에 취직했냐?”
“그럴 리가요.”
“그런데 무슨 이송 이야기를 하냐고. 일단 내가 들어 보고 전달해 드리든가 말든가 판단할 테니까 씨불여 봐.”
“그러니까…….”
태수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핵심만 꼬집어 이야기했다.
모든 걸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탓도 있었다.
“……그래서 보호자분들이 동의하면 이송해도 되는지 여쭤 보려고 전화했습니다.”
“태수야.”
갑자기 진지해진 박성민의 목소리에 태수가 멈칫했다.
“말씀하십시오.”
“그러니까 보건소에서 그, 그 큰 수술을 했다고?”
“간신히 성공했습니다.”
“이 어이없는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환장하겠네.”
박성민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자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그게……. 아니다. 기다려 봐.”
그러고 난 후 하석준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선생, 나야.”
“팀장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사정은 옆에서 다 들었어.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하석준 팀장의 목소리엔 어딘지 모를 푸근함이 담겨 있었다.
태수는 그게 더욱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는데 제가 초를 친 거 같습니다.”
“환자에 대한 이야기잖아. 정해진 때와 분위기가 어디 있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그보다 우리 쪽으로 이송을 할지도 모른다고?”
“네. 가능할까요?”
태수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대답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바로 들려왔다.
“그걸 왜 묻고 있나. 중환자실에 자리 있는지 물어보고 바로 보내면 되잖아.”
“그래도 이건 제가 신속대응센터에서 수술한 게 아니라서요.”
“보건의니까 이젠 우리도 내외하자는 건가? 난 아직도 최 선생이 초곡리로 파견 나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듯 목소리 속에 진심이 느껴졌다.
“팀장님.”
“나만 그렇게 생각했더라도 그건 관계없어. 보내야 할 환자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보내도록 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도움만 받는 거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그보다 우리 쪽에서 구급차를 보낼 순 없을 거 같은데 말이야.”
“그건 이쪽에서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환자 도착하고 다시 한 번 연락하도록 하지. 아, 박 선생이 바꿔 달라는군.”
하석준 팀장과의 통화가 마무리되자 다시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황당한 자식아, 생각할수록 술 당기네. 어떻게 보건소에서 흉부 수술을 할 수가 있어?”
“사정이 그랬습니다.”
“그 사정은 니 사정이시고요. 내 사정은 황당하시다고요. 난 참 군 생활 편하게 했는데 넌 도대체 왜 그러냐?”
박성민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서 좋습니다.”
“하여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의사인 새끼 같으니라고. 됐고, 태수야! 내가 언제나 눈엣가시같이 사랑하는 후배, 최태수!”
“네, 선배님.”
“네가 보내는 환자는 걱정 마라. 이 박성민이가 다시 한 번 꼼꼼하게 확인해서 문제없도록 할 테니까.”
장황한 박성민의 말의 요지는 그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