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57
00660 660화
별다를 거 없는 일상이 또다시 흘러가고 떠나기 전날이 되었다.
보건소는 크게 변한 게 없었다.
그저 진료실만 썰렁할 뿐이었다.
태수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군병원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집으로 보냈다.
집으로 보낸 짐 중에는 카프레네와 제임스의 임상 사례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신 그는 요약해 놓은 노트만 챙겨 뒀을 뿐이다.
자신에게 일종의 바이블과 같은 임상 사례 기록들이다.
자칫 분실이라도 한다면, 자신을 믿고 그 귀한 자료들을 보내 준 제임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 외에 제임스가 선물해 준 수술 세트와 몇 가지 진찰 도구는 가지고 있었다. 의사로서, 특히 외과 의사로서 항상 품에 지니고 있어야 할 의료 품목들이다.
그렇게 모든 걸 정리하니 시원함보다 섭섭함이 앞섰다.
태수가 진료실을 크게 둘러보던 중이었다.
뒤에 다가선 이선정 간호사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냥 기분이 좀 그러네요.”
태수가 돌아보자 이선정 간호사는 살짝 놀랐다.
“얼굴이 꺼머신데요.”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봅니다.”
“많이 아쉬우세요?”
이선정 간호사의 질문에 태수는 미소만 보였다.
그 순간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의 충혈된 눈을 보고는 의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이선정 간호사가 움찔했다.
“왜, 왜요?”
“많이 아쉬우십니까?”
태수의 반문이 묘했다.
방금 한 질문을 그대로 돌려받은 이선정 간호사의 볼이 순간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놀리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그냥 여쭤 본 겁니다.”
태수가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선정 간호사도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건 그렇습니다.”
“…….”
이선정 간호사가 침묵하자 태수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끼리 차 한잔할까요?”
“준비해서 들어갈게요.”
“오늘은 제가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타준 커피 정말 맛없어요.”
이선정 간호사의 한마디에 태수가 멈칫했다.
“마실만 하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거 순전히 접대성 멘트였어요. 기다려요.”
이선정 간호사는 두말없이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그리 실력이 없었나? 이거 바리스타 교육이라도 받아야 하나.”
태수가 그저 어이없단 시선으로 중얼거릴뿐이다.
그것도 잠시 태수는 보건소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첫날부터 느꼈던 설렘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눈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1년이 흘러 있었다.
주마등.
그 말이 왜 생겨났는지 이제야 절감했다.
태수는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곧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진료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한 모금의 차로 입안을 개운하게 한 태수가 먼저 물었다.
“후임자들은 언제 도착한답니까?”
“이따가 저녁 즈음에 도착할 거라고 하던데요.”
“주말 사이에 인수인계를 마쳐야겠네요.”
“바쁘겠어요.”
이선정 간호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 태수가 이어서 물었다.
“쉬는 동안 뭐 하실 겁니까?”
“선생님은요?”
“집에 들렀다가 대전에 잠깐 내려갈까 합니다.”
태수의 말에 이선정 간호사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받는 휴가신데 병원으로 가세요?”
“마땅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네요.”
“조용한 곳에서 푹 쉬시는 것도 좋은데요.”
“이보다 더 조용한 곳 찾기도 힘들고, 더 쉬는 건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태수는 너무도 조용한 보건소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최근 보름 사이 보건소에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본의 아니게 푹 쉬었다.
이젠 체력이 넘쳐 바위라도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이선정 간호사도 같이 경험했기에 억지 미소를 그렸다.
“그러게요. 더 쉬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네요.”
“그래서 간호사님은 일정이 어떠십니까?”
“송 간호사님이 오라고 하셔서 바로 대전에 내려갈 거예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쉴 때도 붙어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저만 그런 거겠죠?”
“이상하게 저도 곧 얼굴 뵐 거 같은데요.”
“쉴 때까지 붙어 있으면 또 오해받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거기서는 좀 덜하겠죠.”
“그럴 겁니다.”
태수가 어깨를 들썩이자 이선정 간호사도 마주 어깻짓을 했다.
서로 아쉬움이 감도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끼익.
보건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조용했기에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의 귀가 동시에 쫑긋거렸다.
“누가 온 거 아닙니까?”
“그런가 봐요. 나가 볼게요.”
이선정 간호사가 말하면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어?”
밖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
그 소리가 너무도 익숙했기에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깜짝 놀랐다.
“이장님 목소리 아니에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쩐 일이시래요?”
“일단 나가죠.”
태수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진료실 문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끼익.
진료실 문이 먼저 열리더니 이기남 이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낮부터 둘이서 이 좁은 곳에서 뭐 하는 거야?”
“이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태수의 넉살 가득한 대답에 이기남 이장이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놀면서 얼마나 잘 쉬었는지 살이 붙어서 아주 볼이 터질 거 같네.”
“그러게 말입니다. 얼굴 좀 뵙게 해 주시죠.”
“보건소 밖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말이 많아.”
“바쁘셨잖습니까.”
태수의 말에 이기남 이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젠 앉아서 천리도 보나?”
“저기 언덕배기에 뭐 지으시느라 정신없으신 거 같던데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
이기남 이장이 움찔하며 묻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이선정 간호사가 나섰다.
“그게 중요해요? 그동안 얼굴도 안 보여 주시고, 만나 주시지도 않고.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아니, 언덕에 뭐 짓는 건 어떻게 알았냐니까.”
“마을에 덤프트럭이 그렇게 오가는데 모르는 게 말이 돼요? 다들 하도 안 오셔서 선생님하고 왕진 가방 챙겨 들고 찾아가기까지 했다고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이기남 이장이 살짝 동요했다.
“왔었…… 다고?”
“정확하게는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차를 돌렸습니다. 저희를 일부러 부르지 않으신 거 같아서 가 봐야 욕먹을 거 같았거든요.”
“…….”
태수의 말에 이기남 이장이 침묵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잘못한 게 많아서 찾아가지도 못하고 계속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속이 타들어 가는 줄 알았다고요.”
이선정 간호사가 덧붙여 섭섭함을 내보인 순간이었다.
뭔가 안도한 기색으로 변한 이기남 이장이 툭 쏘아붙였다.
“속 타들어 가는 녀석들 얼굴이 뭐 이렇게 좋아?”
“그건…….”
“거봐. 우리 안 오니까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아주 푹 쉬었지.”
이기남 이장의 말에 이선정 간호사가 억울함을 토해 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저희가 얼마나…….”
“그만하세요.”
“말리지 마세요. 저 진짜 너무 속상하다고요.”
이선정 간호사가 울컥했는지 눈물까지 보이자 이기남 이장이 그제야 당황했다.
“뭐, 뭘 잘했다고 눈물 짜고 있어?”
“그럼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또박또박 쏘아붙이는 이선정 간호사의 모습에 이기남 이장이 외려 난처한 기색으로 변했다.
“잘못한 건 어, 없지.”
“거봐요. 발길을 뚝 끊을 정도로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요.”
“얘가. 시끄러.”
이기남 이장이 억지로 대화를 끊어 버렸다.
그런데 그 모습 속에는 불쾌함보다 예상치 못한 당혹감이 더욱 짙게 나타났다.
상황을 침착하게 지켜보고 있던 태수만 느낄 수 있었다.
더 방관하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과 동시에 태수가 이선정 간호사에게 말했다.
“좀 진정하시고 차 좀 부탁드릴게요.”
“…….”
“우리가 이렇게 마무리를 지으면 여길 어떻게 다시 옵니까.”
“알았어요.”
눈물을 억지로 삼킨 이선정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갔다.
그제야 태수는 이기남 이장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간호사가 너무 감정이 앞섰네요.”
“흠흠. 이거 뭐, 찾아와도 욕먹고. 뭐 예쁘다고 내가 여까지 와서 이 대접을 받아야 하나.”
“이게 다 이장님을 삼촌같이 생각하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진정하시고 일단 앉으세요.”
“기분 나빠졌다니까.”
“자자, 앉으시라고요.”
태수가 팔을 끌자 이기남 이장은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못 이기는 척 끌려왔다.
자리에 앉았다지만 바로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거리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조금 진정시키려는 의도였다.
그사이 이선정 간호사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달그락.
“여기요.”
아직 서운함이 풀리지 않았는지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곱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돌아서려 할 때였다.
“어딜 가.”
“…….”
“좀 앉아라. 내가 널 올려다봐야 되냐.”
이기남 이장의 툴툴거리는 말투에 이선정 간호사가 멈칫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타이밍을 본 태수가 바로 말을 덧붙였다.
“앉으세요.”
“……알았어요.”
이선정 간호사가 자리에 풀썩 앉았다.
이기남 이장은 그 모습에 살짝 입꼬리를 비틀었다.
“최 선생 말은 아주 잘 듣네.”
“…….”
“째려보기는. 네가 그렇게 본다고 내가 꿈쩍이나 하냐?”
“그래서, 왜 앉으라고 하셨는데요.”
이선정 간호사도 질세라 삐쭉거렸다.
그 모습은 날이 잔뜩 선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게 아니었다. 마치 삼촌과 조카가 아웅다웅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자 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훗.”
동시에 양쪽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태수에게로 향했다.
“뭐가 웃겨?”
“이게 재밌으세요?”
뾰족한 표정까지도 비슷한 두 사람의 모습에 더 큰 웃음이 날 것 같았다.
태수는 정말 억지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여야 했다.
“숨을 잘못 내쉰 겁니다.”
“안 웃었다고? 어디 내 앞에서 약을 팔아.”
“제가 의사라 약은 안 팔고요. 병은 좀 봅니다.”
“…….”
이기남 이장은 기가 찬 얼굴로 침묵했다.
그건 이선정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어이없는 두 사람의 눈초리를 느낀 태수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그렇게 바쁘셨습니까?”
“봤다며.”
“혹시 다치신 분은 없으시고요?”
태수가 진지하게 묻자 이기남 이장의 눈빛에 섬광이 스쳤다.
그것도 잠시일 뿐,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다쳤으면 아픈 놈을 데려왔겠지.”
“다행입니다.”
“말만?”
“아니요. 진짜요.”
태수의 얼굴에 한결같은 진심이 느껴졌다.
이기남 이장의 날 선 눈빛도 그제야 서서히 풀려 갔다.
“이런 놈들이 다들 뭐가 좋다고.”
“네?”
이기남 이장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의아하게 바라본 순간이다.
척.
이기남 이장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최 선생, 돈 좀 내놔 봐.”
“갑자기 무슨 돈을…….”
“아, 글쎄, 내놔 보라니까.”
“얼마나요?”
태수가 대뜸 금액부터 묻자 이기남 이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갑부터 열어야지. 묻긴 뭘 물어.”
“아니, 무슨…….”
“일단 좀 줘 보라고.”
이기남 이장은 특유의 툴툴거리는 말투로 강요했다.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 두 사람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이러진 않을 터였다.
그 생각으로 태수는 일단 지갑부터 꺼내 펼쳤다. 은행까지 거리가 상당하기에 언제나 현금이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돈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이기남 이장의 손이 먼저 다가와 지갑의 현금을 모조리 꺼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