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65
00668 668화
“그보다 뭐?”
“선배님은 안 뵌 사이에 늙으셨네요.”
그 말에 박성민이 한쪽 입술만 실룩거렸다.
“하, 이 자식. 하하. 이거 참, 어이가 없네. 거기 아무도 없냐?”
대뜸 하는 말에 홍진만이 얼른 다가와 대답했다.
“찾으셨습니까?”
“커튼 쳐라.”
“네?”
“커튼 치라고. 저 새끼 오늘 환자 만들어 버릴 거니까. 중환자실에 자리도 하나 마련해 놓으라 그래. 최소한 사지골절에 간파열, 비장파열이라고 하고 혈액도 많이 준비하라고 해. 얼른!”
역시 박성민은 박성민이었다.
어느새 눈에 불이 솟구치며 태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런 반응에도 태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보다 한가하신 거 같습니다.”
“이게 어디서 선배를 도발해 놓고 말을 빙빙 돌려 버려? 내가 지금 확 돌아 버릴 거 같은데. 너도 같이 빙빙 돌아 버리고 싶냐.”
“선배님도. 그런데 피부과는 한번 가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태수의 진지한 표정에 박성민이 움찔했다.
“그렇게 늙어 보여?”
“전에는 피부 미남이셔서 여자들이 줄줄 따랐는데, 지금은 피부가 좀 거칠어지셨네요. 연애사업은 괜찮으세요?”
“아, 그래서 요즘 여자들이 안 넘어오나? 이거 진짜 피부과 한번 가 봐야 되는 거 아닌가 몰라.”
“그건 쉬는 날 가시고요. 그보다 여긴 한가한 거 같습니다.”
태수의 말에 박성민이 심각한 얼굴로 피부를 쓸다 어이없이 바라봤다.
“한가? 한과는 먹기라도 하지. 한가는 먹지도 못하는데 그게 우리 응급실에 존재할 거 같냐?”
“지금…….”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이제야 고요해졌을 뿐이니라.”
박성민의 말을 태수는 바로 이해했다.
“그래서 신 선생님하고 다른 분들이 보이지 않으셨네요.”
“언제 바빠질지 모르긴 하지.”
“그건 그렇습니다.”
“아차. 내가 깜빡 잊었는데, 이리 와. 아무리 선배 용안이 좀 거칠어졌어도 그렇지, 어디서 지적질이야. 얼른 커튼 치고 진지하게 대화 좀 해 보자.”
“그 전에 인사 좀 하고요.”
태수가 양해를 구하자 박성민이 움찔했다.
“니가 지금 이 상황에 인사라는 아주 친절하고 예의 바른 행동을 해야겠냐? 일단 커튼 속에서 나와 진한 대화부터 나누는 게 순서 아니겠냐고.”
“존경하는 선배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잠깐만 시간 좀 주십시오.”
“아아, 그렇지. 여기는 나 혼자 있는 곳이 아니니까 다른 분들에게도 인사를 해야지. 역시 인사성 밝은 우리 태수는 다르다니까.”
“감사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빙긋 미소를 지은 태수가 박성민을 지나쳤다.
그 순간 눈을 끔벅거린 박성민이 옆에 있던 홍진만에게 물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냐?”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지금 저 녀석 때문에 심히 마음이 불쾌하고 찝찝한데, 그냥 이렇게 넘어가야 되는 현실이 말이야.”
“원래 현실은 냉정하다지 않습니까.”
“크, 역시 홍 선생은 뭔가 안다니까. 이따가 내가 음료수 쏜다.”
“영광입니다.”
홍진만이 굽실거리자 박성민은 불쾌함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다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딱 보면 두 사람 모두 똑같았다.
주변에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태수는 나이 든 전문의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최태수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보니 반갑습니다.”
“저도 영광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최 선생에게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초년생입니다.”
태수의 겸손함에 전문의들은 나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는 이어서 레지던트들에게 다가갔다.
레지던트들은 알아서 먼저 고개 숙였다.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난 이렇게 딱딱한 거 싫어해요.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까 잘 지내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제가 지금은 여기 없지만 나중에 돌아오면 많이 도와주십시오.”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지던트들의 목소리가 씩씩했다.
태수가 존대해 주니 더더욱 감격한 모양이었다.
그때 뒤에서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들이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네. 태수가 초면이라 그러지, 같이 일해 봐라. 피곤할 거다.”
“그렇죠. 치프, 아니 최 선배 성격이 오죽하십니까. 저도 2년 차 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만아.”
“네, 박 선생님.”
“너 그렇게 이야기하면 태수가 가만있겠냐? 어어, 저기 째려본다.”
“헉! 전 일이 있어서.”
홍진만은 태수의 눈치를 보며 슬쩍 몸을 피했다.
태수는 그런 홍진만을 어이없이 바라봤다.
역시 박성민과 꼭 붙어 다녀서 독특한 성격이 더욱 두드러진 것 같았다.
이젠 그도 레지던트 4년 차다.
뭐라고 할 시기는 지났기에 태수는 고개를 저으며 반가운 사람들에게 향했다.
가장 먼저 송현미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태수가 다가오자 송현미 간호사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슬쩍 내밀었다.
태수는 바로 맞잡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
“…….”
의외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몇 개월 만에 만났지만 이렇게 가볍게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잠시 송현미 간호사와 눈빛으로 인사를 마친 후였다.
이어서 간호사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정민수 앞에 도착했다.
눈빛만 마주쳐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이였다.
“왔다.”
“잘 왔다.”
역시 남자들의 인사는 무뚝뚝했다.
표현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 가득했지만 끝까지 내뱉지 않았다.
그저 그 짧은 한마디 인사만으로도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았다.
이내 태수가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레지던트들이 많이 늘었네. 얼굴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
“이게 다가 아니야. 세 군데서 수술 진행 중이고, 대기하는 인원들까지 빠진 인원이 이만큼이라고.”
“휘우. 그럼 레지던트만 몇 명이야?”
“1팀만 인턴까지 포함해서 14명.”
정민수의 말에 태수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럼 대학병원의 웬만한 의과보다 더 많은 거잖아.”
“1팀만이라고. 전체 레지던트 수를 넌 상상도 못할 거다.”
“힘들겠네.”
“솔직히 매일매일 피 마른다.”
정민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한국에 돌아와 동글동글하게 변한 얼굴이 어느새 다시 홀쭉해져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1팀이 어디입니까?”
“환자 도착했습니다!”
드르륵.
스트레쳐카의 요란한 바퀴 소리가 다급함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태수와 정민수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눈빛에 반가움은 이미 사라졌다.
입가에 가득했던 미소도 지워진 상태였다.
그 순간이었다.
박성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시빠빠룰라들아, 니들이 지금 거기 서서 태연하게 떠들고…….”
박성민의 잔소리는 끝을 맺지 못했다.
이미 태수와 정민수는 다가오는 환자를 향해 마주 달려가는 중이었다.
어느새 박성민의 옆으로 다가온 홍진만이 한마디 했다.
“이야, 빠르네요.”
“넌?”
“네?”
“네 선배들이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니가 내 옆에서 감상할 입장이냐? 얼른 안 뛰어? 너 내가 발 보이면 죽는다고 했지. 진짜 오늘 한번 죽어 볼래?”
급변한 박성민의 모습에 홍진만이 아차 하고 내달렸다.
“저, 저도 갑니다!”
“야, 이 새끼야, 넌 직진하지 말고 우회전해야지! 네가 저놈들 틈에 껴서 뭐 하려고!”
“우회전합니다!”
“하여간 정신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보다 어디 보자, 우리 태수 감이 많이 떨어지진 않았겠지? 떨어졌으면……. 후후.”
박성민은 느끼한 눈빛으로 태수를 응시했다.
반면, 전문의들은 그런 태수와 정민수를 지켜봤다.
“뛰어나갔으면 뭔가 보여 주겠지.”
“팀장님이 칭찬하셨던 그 실력 한번 구경해 볼까.”
비아냥거림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치프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의 이상의 실력을 가진 정민수가 함께였기에 더더욱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었다.
한편, 태수와 정민수에게 3명의 환자가 동시에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갈게.”
태수는 한 걸음 더 뛰었다.
그걸 본 정민수는 바로 뒤로 물러나 뒤에 서 있는 레지던트들에게 소리쳤다.
“자리 확보하고 기본 도구들부터 준비해!”
“네, 치프!”
레지던트들이 대답과 동시에 움직이자 간호사들도 얼른 뒤를 따랐다.
그사이 태수는 다가오는 환자들 앞에 섰다.
첫 번째 환자.
배를 웅크린 모습이다.
입에서는 계속 토사물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안색은 퍼렇게 질렸고, 콧물까지 흘러내려 얼굴이 엉망이다.
태수는 손으로 환자의 배를 촉진했다.
“아으으윽.”
악다문 입에서 비집고 나오는 신음 소리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몇 가지를 확인한 태수는 곧바로 정민수에게 소리쳤다.
“abdominal colicky pain(급경련복통)! emesis(구토)도 심각해.”
“이쪽으로. narcotic analgesic(마약성진통제), gastric lavage(위세척) 준비해 주세요!”
정민수가 오더를 내리는 사이 태수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환자도 이어서 확인했다.
첫 번째 환자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두 번째 환자는 바로 수술실로. 세 번째 환자는 검사실부터 보내!”
“수술실 연락하고 밀어! 검사는 홍 선생이 한 명 데리고 가서 진행하고.”
정민수가 바로바로 반응하자 레지던트들과 간호사들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지켜보던 전문의들이 한마디씩 했다.
“저런 실력이라면 팀장님이 칭찬하실 만하지.”
“환자만 보면 환장한다더니, 그 소문도 맞는 거 같고.”
“그러니까 다들 최 선생을 좋아하는 거 아니겠어? 나도 멋져 보이는데.”
“자자, 우리도 슬슬 출발하자고.”
전문의들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수가 먼저 나선 데 있어서 불만은 보이지 않았다.
외려 활기가 도는 1팀의 모습에 만족한 표정들이었다.
어느새 1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의 반 정도가 빠져나갔다.
첫 번째 환자는 조금 전에 인사한 전문의가 담당 중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다시 안정된 시간이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온 박성민이 태수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걸치며 말했다.
“너 어쩌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 지금 엄연히 불법 의료 행위 중이야. 보건복지부 허락도 없이 날뛰는 중이라고.”
박성민의 말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이야기해 놨습니다.”
“뭔 이야기?”
“휴가 동안에 대전에 내려갈 건데 얌전히 있을지 모르겠다고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허가할 테니까 의료 행위를 마음껏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태수의 당당한 모습을 본 박성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 이 새끼를 미워할 수도 없고, 예뻐하자니 낯간지러워서 못해 먹겠고. 어떻게 하면 좋아.”
“네?”
“쟤들도 너만큼 준비성이 철저하면 얼마나 좋겠냐. 아차차, 그리고 너 솔직히 말해 봐. 우리 쉴 때 출근해서 몰래 일하고 그랬지?”
박성민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지만 태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 오늘 도착했는데요.”
“이 녀석이 어디서 위대함이 하늘을 똥침 놓는 선배님을 속이려 들어. 인마, 무슨 보건의가 우리들보다 더 설쳐.”
“죄송합니다. 자제하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네요.”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그보다 실력 안 죽었던데, 보건의 하면서 오더 내리는 연습했냐?”
박성민이 슬쩍 캐물으려는 찰나였다.
저 멀리서 또 다른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사고입니다!”
“이, 이분은 1팀으로 옮기세요. 저쪽입니다!”
“여기 좀 봐주세요!”
그런 소리들과 함께 스트레쳐카가 여러 대 줄지어 1팀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