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88
00691 691화
뼈대를 세우는 것도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수정, 또 수정.
태수는 계획을 몇 번이고 뒤바꿨는지 몰랐다.
그 계획에 온통 빠져 있어 밖을 구경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먹을 건 첫날 SUV 트렁크에 꽉 싣고 왔기에 넉넉했다.
씻지도 않고, 잠도 쪼개 잤다.
어쩔 때는 자려고 누웠다가 생각이 떠올라 박차고 일어난 적도 있다.
그만큼 태수는 이 계획을 세우는 데 남은 휴가와 열정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드디어 군병원 첫 출근 날이 밝았다.
출근 준비를 마친 태수가 빌라를 나섰다.
며칠 동안 고생한 것에 비해서는 얼굴이 너무도 좋았다. 일부러 깔끔하게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이었다.
태수가 곧 입구로 내려오자 반가운 사람이 서 있었다.
이틀 전에 올라온 이선정 간호사였다.
태수를 봤는지 이선정 간호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휙.
고개까지 돌린 채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직 눈치 못 챈 태수는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으시겠죠.”
“안 좋으십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제가 여기 도착한 지 이틀이나 됐는데 밥 한 끼 먹자는 소리도 안 하냐고요.”
이선정 간호사가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태수는 부드러운 미소로 달랬다.
“제가 일이 좀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데 사람 얼굴 보고 인사할 시간도 없냐고요.”
“간호사님과 평생 함께할 계획을 짜느라고요.”
“핑계가 예술이네요. 평생 같이할 계획이라니요?”
“그건…….”
“그건?”
이선정 간호사가 말꼬리를 잡으며 궁금증을 더해 갔다.
그때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말고 나중에요.”
“또 그러신다.”
“그 계획 속에 이 간호사님이 맨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제가 맨 앞인 거 맞죠?”
이선정 간호사가 확인하듯 묻자 태수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됐어요. 그럼 용서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가시죠.”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를 차까지 직접 에스코트했다.
부릉.
시동을 건 차가 군병원으로 출발했다.
이선정 간호사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태수가 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그건 아닌데요. 분위기가 뭔가 달라진 거 같아서요.”
“똑같은데요.”
“아니에요. 얼마 전에 봤을 때랑 확실히 달라요. 뭐랄까, 좀 더 남자다워졌다고 할까? 좌우간 뭔가 안정되고 묵직해진 느낌이에요.”
이선정 간호사의 감각이 무서웠다.
아니, 여자의 육감은 정말 날카로웠다.
태수는 은은한 미소만 지으며 차를 몰아갔다.
솔직히 그녀도 막연한 느낌이었다.
1년 내내 함께하며 매일 붙어 있었기에 어렴풋이 느낀 터였다. 그게 무언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군병원은 태수의 빌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위병소에서 신원 확인 후 안으로 들어가자 주차장이 먼저 보였다. 주차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니 하얀색의 커다란 병원 건물이 보였다.
이선정 간호사가 놀랍단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보다 크네요.”
“한국 내 군병원 중에서 가장 클 겁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군의관 출신 선배님에게 들은 거죠.”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일 뿐, 다른 병원과 크게 차이 나는 건 없었다.
미리 받아 둔 안내문을 참고하며 집결 장소로 이동했다.
곧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문 근처에 서 있던 군인이 다가와 물었다.
“실례지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초청받아 왔습니다.”
“그럼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태수, 이선정입니다.”
태수가 말하자 군인은 들고 있던 종이에 참석 여부를 표시했다.
힐끔 쳐다보니 그 인원이 꽤나 많았다. 국방부와 보건복지부에서 제대로 해 보겠다더니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사이 표시를 마친 군인이 회의실 문을 열며 말했다.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끄덕.
태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화답한 후 이선정 간호사와 함께 들어섰다.
회의실 안은 이미 많은 남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태수의 등장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글쎄.”
“옆에 여자는 뭐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는 이야기지만 썩 듣기 좋진 않았다.
태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이 이런데 이선정 간호사의 기분은 어떨까.
걱정된 태수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선정 간호사의 안색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
“아, 저런 이야기들은 많이 들어서 괜찮아요. 불만이 있다면 잘생긴 선생님들이 없어서 눈이 피곤한 거죠.”
이선정 간호사는 나름 강단을 보였다.
카슈미르 격전지에서 단련해서 그런지 웬만한 뒷담화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태수야, 아니지, 최태수 선생.”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태수가 멈칫했다.
태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의사들까지도 살짝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최태수?”
“대전 신속대응센터 최태수 말하는 건가?”
“하긴 그 친구도 보건의로 발령받았다고 했는데.”
“그럼 진짜 저 의사가 최태수야?”
다들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본 모양이다.
태수는 몰랐지만 여러 사건들로 인해 의사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탓이다.
레지던트 1년 차 때 외국행.
레지던트 4년 차에 신속대응센터 에이스로 급부상.
제임스와 NGO 의사들의 대전 신속대응센터 방문.
어영부영 묻혔지만 연성대학병원이 뒤집어진 사건.
비공식적으로 스미스 박사가 방한한 것까지.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게 태수였기에 이름은 알고 있었다. 물론 의사들 사이에서만 이름이 알려진 정도였다.
사실 이 정도면 외부에서도 알 법했다.
그러나 석정현 이사장이나 박완용 센터장 등등 태수를 욕심내는 주변인들이 외부로 소식을 알리는 걸 악착같이 막았다.
그러나 태수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의사가 누군지가 더욱 궁금했다.
태수가 옆에서 다가오는 상대를 바라봤다.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인상.
안경테까지도 가느다란 탓인지 차가움이 더욱 돋보이는 또래의 남자였다.
세상 그 누구보다 태수를 가장 먼저 탐냈던 의사.
연성대학병원 인턴 동기인 이기준의 미소 띤 얼굴이었다.
이기준이 앞에 도착해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태수가 손을 맞잡자 힐끔 내려다본 이기준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굳은살이 너무 늘어서 이젠 딱딱하다, 야.”
“그러는 너도.”
“어떻게 생긴 굳은살인지는 나중에 확인해 보고. 옆에는 누구?”
이기준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를 소개했다.
“나랑 같이 예전부터 수술했던 간호사님.”
“예전부터라면 카슈미르 때부터?”
끄덕.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거짓말도 아니기에 태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이기준이 크게 반응했다.
“카슈미르에서 활약하신 분이라면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죠. 최 선생 인턴 동기인 이기준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솔직히 태수 옆에 서 계셔서 좀 궁금했습니다. 최 선생이 워낙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해서요.
“저도 최 선생님 성격은 잘 알죠. 가끔 너무 혼자 다녀서 문제기도 하고요.”
이선정 간호사는 호감을 보이는 이기준에게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론 완전 도시 남자 스타일인 이기준의 외모와 분위기도 한몫했다.
이기준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런 태수가 걱정돼서 같이 오신 모양입니다. 동기로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제가 자리로 안내해도 될까요? 지정 좌석은 없어서 제 옆자리로 안내할까 하는데요.”
“저야 감사하죠.”
“이쪽입니다.”
이기준은 친절하게 이선정 간호사를 안내했다. 덕분에 태수도 엉거주춤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이기준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태수가 옆에 앉아 바라보자 이기준은 빙글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가 많아진 거 같은데.”
“동기 보니까 좋아서.”
“그보다…….”
태수가 그 일을 따지고 들려 하자 이기준이 먼저 말했다.
“어떻게 그 성격은 변하질 않아.”
“…….”
“흥분하지 마. 아니, 이젠 흥분할 수도 없겠지만.”
“뭔 소리야?”
스윽.
이기준이 주변을 턱짓했다.
태수가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에는 뭔가 마땅치 않던 시선들이 어느새 변해 있었다.
“카슈미르에서부터 지금까지 같이 다녔다는 거야?”
“그럼 저 간호사 실력도 대단하다는 이야기잖아.”
“보건복지부에서도 이쪽 일에 도움이 될 거 같으니까 허락했겠지.”
어느새 이선정 간호사에 대한 말들이 달라져 있었다.
태수의 시선이 다시 이기준에게로 향했다.
이기준은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면서 말했다.
“좋게 풀어 가자고.”
“…….”
“낯선 사람 경계하는 건 당연하잖아.”
“그래서 일부러 그런 거라고?”
태수가 차갑게 묻자 이기준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성격을 내가 좀 알잖아. 널 무시하는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무시하면 폭발하는 거.”
“…….”
“처음부터 서로 문제 만들지 말자고.”
이기준의 말이 꼭 틀리진 않았다.
좌우간 이선정 간호사에 대한 시선들이 달라진 건 좋은 일이었다.
“처세술이 많이 발달한 거 같은데.”
“내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라서 그렇겠지.”
“이번 일은 고맙다고 할게.”
“딱딱하기는.”
그러나 이기준은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 뒤로는 서로 못 나눈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때 그랬잖아.”
“그때 박 선배가 난리였지. 네가 먼저…….”
“그러고 보니 박 선배가 신속대응센터에 있지? 혹시…….”
“여전하지. 그 성격 어디 가겠어.”
이선정 간호사는 옆에서 대화를 들으며 두 사람의 지난 이야기와 지금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외의 의사들은 힐끔힐끔 태수 쪽을 쳐다봤다.
그동안 태수에 대해서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 많은 소문들의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눈치도 보였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의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로 들어왔다. 기존의 인원까지 합쳐 대략 30명가량 되는 것 같았다.
어느새 불어난 의사들을 보며 태수가 경탄했다.
“꽤 많은데?”
“외과, 내과 합쳐서 거의 모든 의과에 보건의를 선발했다더라고.”
“보건복지부하고 국방부하고 작정을 한 모양이네.”
“그런가 봐. 두 부처가 목표한 게 전원 치료, 전액 지원이라니까.”
이기준이 뭔가 소식을 듣고 온 건지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인턴 때부터 소문엔 정통했기에 태수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도 궁금한 건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런데?”
“선거가 코앞이잖아.”
“꼭 그런 이유 때문일까?”
“모르지.”
이기준은 어깨를 들썩였다.
정말 모르겠다는 눈빛이었기에 태수도 더 묻지 않았다.
태수가 묘한 얼굴로 다시 의사들을 둘러봤다.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처음으로 가운을 입은 중년의 의사가 들어왔다.
모두 의사들이지만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아 유독 그의 존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군병원 측에서 나온 걸 직감한 보건의들은 알아서 말소리를 줄였다.
곧 넓은 회의실이 조용히 변했다.
“…….”
“…….”
입을 다문 보건의들의 시선은 모두 가운을 입은 중년 의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중년의 의사는 자리한 의사들을 크게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군병원에서 근무하는 김용철 중령입니다.”
옷차림은 보통 의사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말투를 들어 보니 딱 군인이었다.
“우선 첫 만남이니까 존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병원은 민간 병원이 아닌 군 시설로 분류됩니다.”
“…….”
“군 시설에 들어온 만큼 여러분들도 가급적 다나까를 사용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김용철 중령의 말에 보건의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김용철 중령은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이 군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동안은 저희 군의관들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고자 하는 거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아울러 군병원인 만큼 부상 치료 중인 군인들이 많이…….”
김용철 중령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