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90
00693 693화
숨가쁘게 설명하던 김용철 중령이 서둘러 끝내고싶은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컨퍼런스는 여기서 하시면 됩니다. 더 질문 있으십니까?”
“……”
공중보건의들이 모두 침묵했다.
김용철 중령은 태수를 노려보면서도 다른 공중보건의에겐 애써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마무리했다.
“그럼 이쯤에서 제 이야기는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시면 됩니다.”
김용철 중령은 대화를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회의실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 태수를 한 번 흘겨봤다.
텅.
찬바람이 휭하니 불 정도로 회의실 문이 닫힌 순간이었다.
이기준이 태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 조심해야겠다.”
“그러게.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네 뒤에 좀 숨어야겠어.”
“난 등이 작아서 못 숨겨 줘.”
“여전하네.”
“너야말로.”
이기준이 빙긋 웃자 태수도 조금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김용철 중령이 다녀간뒤로 회의실 분위기가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다들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나설 기미도 없다.
태수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사람이 많은 자리에는 누군가가 리더십을 발휘해야한다. 여기도 리더가 없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게 당연했다.
이기준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태수에게 물었다.
“최 선생이 나설 때 같은데?”
“취미 없어.”
“그럼 누가 해야 하나.”
“이 선생이 하지?”
태수가 묻자 이기준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서기엔 선배들이 많아. 공연히 모난 돌 꼴 되고싶지도 않고.”
“잘만하면 이력에 상당한 도움이 될 텐데.”
“그 전에 군의관 선배들하고 멱살잡이부터 하겠지.”
이기준이 고개부터 저었다.
태수가 나선 통에 김용철 중령과 사이가 그리 좋지않게 흘러갔다. 이런 상황에서 나선다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태수도 그 생각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계약 사항을 들먹여 군의관들의 계획을 막았지만 그로 인한 불이익도 감수해야 했다. 감정이 상한 김용철 중령이 고분고분하게 나올리 없었다.
그 첫 번째 여파가 바로 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태수는 그리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중이었다.
똑똑.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일순간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다들 시선이 회의실 문으로 향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군복을 입은 군인이 들어왔다. 파란 십자가가 부착된 걸 보니 의무병인 것 같았다.
그는 한 뭉텅이의 서류를 들고 들어오다 당황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두리번거린 의무병이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누구에게 드려야 됩니까?”
“그게 뭔데요?”
“전해 드리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일단 이리 주세요.”
가까이에 있는 공중보건의가 받아 들자 의무병은 얼른 건네주고 회의실을 떠났다.
다시 공중보건의들끼리 남겨진 순간이다.
이번에는 서류를 들고 있던 공중보건의에게 시선이 쏠렸다.
방금 의무병이 느낀 부담감을 똑같이 경험한 공중보건의는 얼른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서류부터 들춰 내용을 확인했다.
“가만있어 보자, 이게…….”
일부러 들리도록 중얼거리던 그가 멈칫했다.
번뜩.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정형외과 어디 계십니까?”
몇몇 공중보건의들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정형외과입니다만.”
“빨리 확인해 보세요.”
“그럼 그게 다?”
“네, 수술할 아이들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대답하는 공중보건의의 표정이 어느새 굳어져 있었다.
다들 의사다.
그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방금까지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날아갔다. 그리고 얼른 서류를 들고 있는 공중보건의에게 물었다.
“다음은요?”
“내과 쪽 자료도 있습니까?”
“우리 그러지 말고 일단 일어나서 의과별로 모입시다.”
누군가의 의견에 다들 동조했다.
“그럽시다. 신경외과분들 어디 계십니까?”
“소화기 내과는 어디로 가죠?”
“흉부외과는 이쪽으로 오세요!”
우르르.
갑자기 공중보건의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수와 이기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수의 입가에 걸린 은은한 미소를 본 이기준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물었다.
“이것도 예상한 건 아니겠지?”
“어느 정도는.”
“어떻게?”
“다들 의사니까.”
태수는 그 한마디로 이 상황을 정의했다.
이기준이 조금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이건 잔머리라고 해야 하나?”
“기왕이면 노련함이라고 해 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아주 이상한 것만 배웠나 보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흉부외과 쪽으로 봐야지.”
태수의 말에 이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보다 오늘 끝나고 약속 있어?”
“아마 단합대회하지 않을까?”
“분위기상 그렇게 흘러갈 거 같긴 한데. 좌우간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고.”
이기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흉부외과 쪽 공중보건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태수도 이선정 간호사에게 말했다.
“우리도 출발할까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하세요.”
“혹시 이 선생님이랑 친하세요?”
이선정 간호사의 질문에 태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인턴 동기였습니다. 고생할 때 쌓은 정이 무섭죠.”
태수의 대답을 들었지만 이선정 간호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 후, 회의실은 어수선함이 아니라 조금 다른 소란스러움으로 변했다.
우선 의사들이 각 의과별로 분류해 앉았다. 헤아려 보면 각 의과마다 의사의 수가 들쭉날쭉했다.
다만 가장 필수적인 외과 계열이 많았다.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는 각 2~3명씩 구성되어 있었다. 수술팀으로 구성을 잡아 보면 한 명 정도 수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데 비해 태수의 주변은 의사들이 많았다.
바로 외과였다.
어떤 병원이든 핵심이 되는 건 역시 외과인 탓이다.
주변에 자리한 의사들의 수는 총 5명이다. 두 팀이 수술하고 1명이 보조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
그 외에는 내과 계열이 각각 2~3명씩 자리하고 있었다.
30명이라는 대인원을 의과별로 나눠 놓으니 그렇게 많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후 각 의과별로 자리한 의사들은 우선 자기 소개부터 이어 갔다.
곧 지급될 가운에 이름이 새겨져 있을 터였지만 자기 입으로 직접 소개하는 건 또 달랐다.
“전문의 2년 차 최태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태수가 인사하자 오른쪽부터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순한 인상에 얼굴이 동그란 의사가 말했다.
“나도 반가워요. 3년 차 성재경입니다.”
그 뒤로 운동을 많이 한 듯 듬직한 체격이 인상적인 의사.
“같은 연차 임진호입니다.”
분명히 남자인데 행동과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고운 의사.
“저도 같네요. 박민철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또랑또랑한 눈빛이 인상적인 의사가 자신을 소개했다.
“전 최 선생님과 같이 2년 차입니다. 유병태입니다.”
모두 자기 이름을 이야기한 뒤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선정 간호사에게로 향했다. 이들 중 홍일점, 아니 이 회의실에 유일한 여자인 탓이기도 했다.
이선정 간호사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제가 제일 연장자가 되었네요. 그래도 여자 나이는 비밀이니까 말씀드리지 않을 거고요. 이선정이라고 해요.”
이선정 간호사까지 소개가 끝난 후였다.
또다시 침묵이 찾아오려 하자 성재경이 나섰다.
“학회에서 얼굴은 한 번씩 본 거 같은데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네요. 최 선생님은 아주 초면인 거 같고요. 좌우간 이렇게 같이 뜻깊은 일을 함께 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자, 시간은 금이라고 했던가요? 일단 소개는 했으니까 여기 아이들의 병세부터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그게 좋겠습니다. 우리끼리 먼저 파악해 놓아야 전 의과 컨퍼런스 때 우선순위를 정하기 좋으니까요.”
“그럼 하나씩 잡고 살펴보도록 하죠.”
성재경과 임진호가 말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이끌어 갔다.
태수는 그런 그들의 의견에 잠자코 따랐다. 아직 나설 이유도 없는데다가 의료계 선배들이기이도 한 탓이다.
지금까지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이중 허접한 실력을 가진 의사는 없다.
태수가 듣기로도 전국에서 근무하는 공중보건의 중에서 실력 좋은 의사들 위주로 선발했다고 들었다.
공중보건의 1년 차는 실력 확인이 되지 않아 제외되었단 소식도 들었다. 그렇게 선발된 인원들이 비단 실력만 좋아서 이 자리에 오진 않았을 터였다.
단순히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지원하기에는 앞으로 일정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이들에게도 태수와 같은 뜨거운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진취적인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태수는 파일 몇 개를 앞으로 끌어다 놓고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픈 아이들이 상당하기에 각자 확인 후 우선순위를 심정적으로 정할 계획이었다.
그 옆에는 이선정 간호사가 꼭 붙어서 같이 확인했다.
첫 번째 환자의 상태가 프린트된 EMR(전자의무기록)이 눈앞에 펼쳐졌다.
“gastrolithiasis(위석증) 환자네요. 나이는 14살이고, 특별한 히스토리(과거 병력)도 없다고 합니다.”
“지정 병원에서 위석을 녹이려고 약물 치료도 많이 해 봤네요. 그런데 아직 제거는 못한 거 같고요.”
“EMR로 보면 그렇게 고통스러운 단계는 아닌 거 같습니다. 일단 뒤로 미루겠습니다.”
“그래요. 지정 병원에 전화해서 콜라라도 좀 먹이라고 해야겠어요.”
태수보다 이선정 간호사가 더 냉정하게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위석증 치료를 위해 탄산음료 섭취를 권장하고, 특히 콜라를 권했다. 콜라의 강한 산성이 돌을 녹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환자를 뒤로한 태수는 두 번째 환자를 살폈다.
서류 속 병세를 확인한 태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베체트(Behcet’s disease)병?”
“베체트병이면 만성 염증성 질환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리고 이 환자의 경우에는 장에 특히 염증이 심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머, 그러네요. 그런데 16살짜리 소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병이에요?”
이선정 간호사가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기에 태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보통 2, 30대 여자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거지, 무조건 그 나이 대에 나타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흔한 병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장에 문제가 생겼다면 외음부까지 확산될 수 있는 상황 아닌가요?”
“맞습니다.”
“여자에게 외음부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데.”
이선정 간호사의 얼굴이 안쓰럽게 변했으나 태수는 냉정하게 말했다.
“중요한 곳이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로 두기에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요.”
“지금 환자를 분류하는 건 치료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 건 아시죠?”
태수가 한 번 더 강조해서 말하자 이선정 간호사도 이내 수긍했다.
“알았어요. 대신에 이 소녀는…….”
“급한 환자부터 해결하고 외음부까지 염증이 확산되기 전에 불러들여야죠.”
그 뒤로 살펴보는 환자들 또한 그리 병세가 가볍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의사들이 살펴본 대부분의 어린 환자들은 여러 이유로 이미 병이 상당히 진행되었을 터였다.
안타까움에 이끌린다면 더욱 중병을 앓고 응급한 환자의 치료가 늦어질 수 있었다.
그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뒤로 미뤘지만 우선순위가 아닐 뿐이다.
꼭 치료해 줄 거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