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695
00698 698화
“늦었을 때가 가장 이르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역시나 내 대답은 같아.”
“아직 우린 젊으니까 천천히 생각하자고. 얼마나 굳은살이 더 박일지 모르지만 난 인내심이 아주 강한 편이야.”
이기준의 말에 태수가 힐끔 쳐다봤다.
역시 진심이다.
오히려 인턴 때보다 더욱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태수는 애초부터 이기준과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태수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보다 악수할 때 손에 굳은살 많던데.”
“차기 에이스가 되려니까 쉽지 않더라고.”
“많이 살렸지?”
“그럼.”
이기준은 흔쾌히 대답했다.
야망이 있지만 그 속에 깔린 의사로서 본연의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태수는 그 하나면 족했다.
스스로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 해도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이기준이라면 충분히 술을 따라 줄 수 있었다.
“한 잔 더?”
“얼마든지.”
“괜찮겠어?”
“아직은.”
“그럼.”
쨍.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태수와 이기준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가장 고된 인턴 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 정이 그만큼 무서웠다.
이기준은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멀어져 갔다.
이번 일에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대화할 시간이 많은 탓이었다.
때마침 이선정 간호사도 의사들 사이에서 벗어나 태수의 옆자리로 다시 다가왔다.
태수가 먼저 물었다.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홍일점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요.”
“앞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실 겁니다.”
“그러게요. 최 선생님 따라다니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그보다 이 선생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하셨어요?”
이선정 간호사가 묻자 태수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인턴 때부터 알고 지내서 그런지 추억거리가 많네요.”
“그 이야기만은 아닌 거 같던데요.”
“야망이 있는 친구입니다.”
태수의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이선정 간호사는 태수를 알기에 오히려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선생님이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는지 몰랐는데요.”
“상대가 꿈을 꾸는데 친구로서 들어 줄 정도는 되죠.”
“꿈으로 만족할 성격은 아닌 거 같던데요.”
“아마도요.”
“저분도 대단하시네요.”
이선정 간호사는 짤막한 대화로도 대강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태수도 그런 이선정 간호사를 알기에 더 말하지 않았다.
술이 몇 잔씩 더 들어가자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술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묘약인 건 확실했다.
그걸 증명하듯이 낯설어 하던 의사들이 하나둘씩 태수에게 다가왔다.
주변에 몰려든 의사들은 주로 외과 계열이었다.
아무래도 태수의 독특한 이력에 대해 궁금해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어떻게 그 위험한 곳에서 지내시게 되었습니까?”
“그땐 그게 저에게 최선이었습니다.”
“위험하진 않으셨고요?”
상대의 질문에 태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나갈 생각이 있으십니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최 선생님도 그렇지만 다른 분들도 의료봉사를 다녀오신 후에 많이 성장하셨다고 들었거든요.”
“경험에는 그만한 곳이 없죠.”
태수가 인정하자 다른 의사가 물어 왔다.
“정말 그렇게 환자가 많습니까?”
“의료캠프에도 많지만, 정말 많은 곳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립된 마을들입니다.”
“거긴 어떻게 가야 합니까?”
“귀동냥을 많이 하다 보니까 방법이 생깁니다.”
태수는 가급적이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물론 그 전에 박종혁 박사와 마찰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
태수의 이야기에 이미 흠뻑 빠져든 의사들이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럼 마을 단위로 이동하게 되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도착한 그 순간부터 몰려오시죠.”
“마을 주민들이 모두요?”
“그건 마을마다 사정이 달라서 평균을 낼 수가 없습니다.”
태수의 대답이 끝나자 먼저 질문한 의사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많이 찾아오면 엄청 힘드실 텐데요.”
“솔직히 지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과가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 세상에 그렇게 안락한 침대가 없으니까요.”
“그렇겠네요.”
“가끔 축포도 들려옵니다.”
미소 띤 태수의 대답에 상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축포라니요?”
“기관총이라든지 고폭탄이라든지, 가끔 자주포 소리도 들리고요. 어쩌면 병원 앞마당에 떨어질수도 있습니다. 몇 번 터지는 걸 보기도 했거든요.”
진짜요?
“그럼요. 진료실 유리창에 파편이 날아와 엉망이 된적도 있습니다.”
“…….”
태연한 태수와 달리 주변에 있는 의사들의 표정이 점점 놀라움으로 변해 갔다.
그 살벌한 곳에서 버텨 왔다는 이야기다.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난 태수의 실력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걸 단편적인 대화로도 알 수 있었다.
다들 놀라는 사이 의료봉사를 이야기했던 의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옆에 있던 의사가 슬쩍 물었다.
“저렇다는데 진짜 갈 거야?”
“…….”
“진지하게 생각해 봐.”
툭툭.
상대가 어깨를 다독였지만 그는 서늘한 가슴을 느끼기에 바빴다.
태수는 그런 의사들과 관계없이 음료수를 들었다. 좀 더 술을 마신다고 해도 주량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공우혁의 말대로 내일부터 바빠질 걸 생각하니 술이 당기지 않았다. 음료수로 가볍게 목을 축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 후로도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 의사들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다음 날.
각각 회의실에 자리한 의사들의 얼굴은 당연히 멀쩡했다. 어제 친분을 다진 만큼 더욱 끈끈해진 표정들이었다.
단상에 선 공우혁이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잘 주무셨습니까?”
“네!”
“전 긴장되어서 못 잤는데요. 다들 저보다 강단이 좋으신 거 같아서 행복합니다.”
공우혁이 농담을 건넸지만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기에 이런 우스갯소리에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공우혁은 그런 의사들을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어제 컨퍼런스를 통해 우선순위로 선정된 아이들은 각 루트를 통해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
“군병원에 도착한 순간 각종 검사부터 진행할 예정입니다. 각 의과에서는 스케줄을 조율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한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오자 공우혁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단상에서 벗어난 그는 회의 책상 상석 가운데에 섰다. 좌우로 나눠서 자리한 의사들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공우혁이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제 앞에 전화기가 한 대 있습니다.”
탁.
공우혁은 상석 앞에 떡하니 자리한 전화기에 손을 올렸다.
다들 시선이 집중되자 이어서 말했다.
“이 전화기는 직통 전화입니다. 다행히 의무병들이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면서 받기로 했답니다. 명심하실 건 이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가 보듬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공우혁이 지목하자 손을 든 의사가 말했다.
“우선순위로 선정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번호를 알려 준 거 같은데, 과연 그 아이들이 전화를 할까요?”
“아마 쉽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하지만 정말 아프면 할 겁니다.”
공우혁의 말에 다른 의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 소녀 가장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이다.
사회에 상처받고, 친구에게도 상처를 받았을 터였다. 사회적 반감이 상당하니 반항기도 상당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라도 당장 죽을 듯이 아프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 마련이다.
그걸 대번에 유추한 태수가 나지막이 뇌까렸다.
“그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너무 조용한 회의실이었기에 태수의 자그마한 목소리도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공감했다.
“없어야죠.”
“그러길 바라긴 하는데…….”
“누군가는 여기서 대기해야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다들 저 전화기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공우혁이 말했다.
“잠시 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정이 시작되더라도 모두가 바쁜 날은 많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회의도 하고 휴식도 할 거니까 누군가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틀린 말도 아니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태수가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공 선생님, 만약 아이들에게 전화가 온다고 해도 문제 되는 게 있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의식이 있는 아이들은 주소를 알려 주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각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건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우선 이 전화기에 발신자 표시가 됩니다. 그리고 112신고센터와 협조가 되어서 전화번호를 알려 주면 바로 발신지를 추적하고, 구급차가 우선적으로 출동할 수 있게 한다고 했습니다.”
“보건복지부와 국방부에서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한 게 마음에 드네요.”
태수의 대답에 다들 공감했다.
“머리 엄청 짜냈겠는데.”
“아이디어를 낸 담당자는 휴가 정도는 보내 줬겠지?”
“안 보내 주면 그건 말이 안 되지.”
의사들이 그렇게 수군거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수군거림이 잦아들자 공우혁이 이어서 말했다.
“슬슬 우리들의 열정을 불태울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어제 가졌던 각오를 지금부터 폭발시켜 봅시다. 이상입니다.”
공우혁이 회의를 마친 순간이다.
벌떡.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각 의과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착할 아이들 모두 상태가 좋지 않아. 검사실부터 개방해 달라고 요청하자고.”
“가뜩이나 날카로운 아이들인데 예민한 사춘기니까 말과 행동 조심하고.”
“일단 수술실로 밀고 들어가야 할 아이들도 있으니까 수술 인력부터 지원 요청해.”
“간호사실에 준비된 약도 확인해 보자고.”
밖으로 향하면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의견을 조율했다.
그 틈에는 태수가 포함된 외과도 함께였다.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며, 순한 인상과 조곤조곤한 말투 탓에 외과 대표가 된 성재경이 태수를 포함한 의사들과 이선정 간호사에게 말했다.
“도착 예정 시간 보니까 3명이 거의 동시에 도착할 것 같던데. 한번 봐 봐.”
일정표를 건네자 다들 빠르게 살피고 옆으로 건넸다.
모두가 확인을 마치고 일정표를 다시 손에 쥔 성재경이 말했다.
“3명 중에 두 아이들을 먼저 수술해야 하는데…….”
“strangulation ileus(교액성 장폐색) 환자는 저와 유 선생이 담당하겠습니다.”
“병세가 가장 심각한 환자로 구분된 아이잖아.”
“그러니까 빨리 수술해야죠.”
태수가 강단 있게 말하자 성재경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다른 2명은 검사 진행하고 판단해서 수술하는 걸로 하자고. 임 선생이 오늘은 헬퍼야.”
“내가? 이거 왜 이래.”
“당장 수술 못해 안달 내지 말자고.”
성재경의 말뜻을 알아들은 임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여기서 첫 수술은 욕심나지.”
“모두 들어가면 뒤에 도착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라고.”
“알았어. 검사, 조치, 확실하게 해 놓을 테니까 다음에는 내가 들어갈 거야.”
임진호는 커다란 덩치만큼 우악스럽게 자기 마음을 알렸다.
수술 진행 계획이 일단락되자 성재경이 말했다.
“그럼 두 팀 모두 수술 계획서부터 작성해서 바로 허락받고, 스텝들 챙겨.”
“수고하십시오.”
인사가 끝나자 외과 의사들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태수와 유병태, 이선정 간호사는 함께 몸을 움직였다.
또랑또랑한 얼굴만큼 적극적인 유병태가 먼저 말했다.
“최 선생은 수술 계획서부터 작성해. 내가 환자 맞이할게.”
“내가 계획서를?”
“집도의가 계획서를 작성해야지, 누가 해. 어제부터 꼭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같이 일하는 동안 많이 부려 먹어. 그래야 하나라도 더 배우지. 먼저 간다.”
유병태는 빠르게 할 말만 마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