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715
00718 718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태수의 시선은 차분하게 이은진의 심장과 연결된 ECG(심전도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행히 유병태가 계속 대화를 건네는 사이 그래프는 많이 안정을 되찾았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입가에서 배어나왔다.
이쯤이면 됐다.
완전하진 않지만 수술을 이어 가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태수는 한 번 더 확인을 위해 마취의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혈압하고 맥박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돌아왔어.”
“이어 가도 되겠죠?”
“현재상태로는 별 이상 없을 거 같아.”
마취의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수는 팔꿈치로 옆에 선 이기준을 가볍게 찔렀다.
툭.
뭔가 감이 왔던지 눈이 커진 이기준이 설마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윽. 왜, 이젠 나보고 수술까지 하라고?”
“그럼 이대로 나가려고?”
“응급상황은 지났잖아.”
“아직 장담 못해.”
태수는 그렇게 말하고 집도의 자리에 다가섰다.
이기준도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며 어시스던트 자리로 향했다. 솔직히 응급처치가 끝났으니 이쯤에서 빠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평소 이기준이라면 그리 함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매력당기는 건 태수와의 수술이었다. 태수가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직접 눈으로 볼,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이야기나 수술영상으론 부족하다.
바로 눈앞에서 봐야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있다.
이기준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태수는 의외로 순순히 이기준이 나서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으나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수술에 온 정신이 쏠린 태수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준비를 마친 태수가 옆에서 우물쭈물거리던 성재경에게 말했다.
“선배님,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우리가……. 아니야. 그렇게 해.”
성재경은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고 별달리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아직 성재경의 체력은 응급처치하느라 기진맥진해 여전히 엉망인 상태였다. 현재 환자 상태가 그나마 좋아졌다고 해도 언제 무슨 일이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
그때는 대처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로 수술을 억지로 이어 가는 건 의사의 도리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버티는 것보다 나가는 게 옳았다.
성재경은 물론 임진호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눈빛을 확인한 태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나가시기 전에 유 선생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계속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아?”
“이미 감정이 많이 흐트러졌습니다.”
태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누가 봐도 이성이 사라진 유병태는 지금 의사가 아니라 이은진의 보호자란 편이 맞았다. 문제가 더 큰 건 의학 지식이 있는 보호자였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다시 이은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기에 수술에서 제외시키는 게 옳았다.
태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성재경이 유병태에게 다가갔다.
유병태는 계속 이은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절거리는 중이었다.
“유 선생, 나가지.”
“아닙니다. 전 더 있겠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저도 의사입니다.”
유병태가 예상외로 강하게 버텼다. 달리 말해 수술실을 쉽게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했다.
성재경이 그런 유병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순간이었다.
태수가 결국 한마디 했다.
“유 선생, 나가.”
“태수야.”
“살려 달라며.”
태수의 굳은 목소리에 유병태도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아는데, 방해하지 않을게.”
“은진이만 유 선생 환자야?”
“…….”
“밖에 다른 아이들도 은진이와 똑같아. 불안감과 싸우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네가 진짜 의사라면 편애는 하지 말아야지.”
태수의 말이 백번 옳았지만 유병태는 반박했다.
“박 선배도 계시고, 성 선배와 임 선배도 나간다며. 그러면 나 한 사람 정도는…….”
“나 한 사람 정도?”
“아니, 그게, 내 말뜻은 그게 아니고…….”
말실수했음을 직감한 유병태가 정정하려 했지만 태수는 싸늘하게 말했다.
“내 수술에 그따위 정신을 가진 의사는 필요 없으니까 당장 나가.”
“최 선생.”
“나가라고 했다. 아니면 이대로 계속 우리끼리 입씨름하고 있던가.”
태수는 수술을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환자를 두고 협박하는 게 아니다. 더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수술을 시작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때 돌아가는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이기준이 말했다.
“유 선생, 끌려와서 나가지도 못하고 어시스던트까지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주지.”
“뭐?”
“난 지금 내 환자들 내팽개치고 온 꼴이라고. 그럼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지 않겠어?”
“그럼 가. 내가 어시스던트할 테니까.”
유병태가 도발적으로 말하자 이기준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지친 몸으로 수술을 하시겠다고? 아니면 환자가 급변하면 게거품 물고 달려들 정신 상태로 보조를 하겠다고?”
“…….”
“서로 더 시간 끌지 말자.”
이기준은 말을 잘라 버렸다.
더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이기준의 저런 모습은 태수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울컥하게 하는 저 화술은 언제 들어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반면, 반박할 수 없는 건 그 말이 옳기 때문이었다.
이선정 간호사가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말씀이 아주 시원한데요?”
“저 말투에 민수가 여러 번 울컥했죠.”
“정 선생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거 같네요. 그보다 어떻게 될까요?”
“나갈 겁니다.”
태수는 확신했다.
태수가 그동안 함께 수술하고 같이 생활했던 유병태라면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의사다.
그사이 유병태는 이기준을 노려봤다.
태수의 말대로 유병태는 이기준의 화술에 가슴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반박할 순 없었다.
이기준은 외과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의사다. 여기 들어와서 수술에 참여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했다.
제세동기를 양손에 쥐고 적절하게 충격을 준 것만으로도 유병태는 이기준에게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유병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수야.”
“알아.”
“……간다.”
“새 팬티는 캐비닛에 있어.”
“자식.”
유병태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나가는 입장이었지만 집도의 부담을 떠안은 태수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다.
성재경, 임진호, 그리고 유병태가 차례로 수술실을 나간 후였다.
지치고 힘겨워하는 의사들이 나가자 수술실 분위기에 활기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태수도 그제야 환부를 다시 내려다봤다.
지혈클램프들이 주요 출혈 부위를 단단히 지혈하고 있었다. 태수가 조금 더 확인하는 사이 이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이제 흉부외과 전문의인 나를 어떻게 부려 먹겠다는 건데?”
“어시스던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눈치껏 해야 한다는 건가?”
“죽어라 해야 할 거야. 네 경력에 흠집 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태수의 말에 이기준이 고개를 슬쩍 저었다.
“세상에 그렇게 무서운 협박이 없네.”
“알면 따라 붙어.”
“그러려고 들어온 거잖아, 집도의 선생.”
이기준은 새롭게 착용한 수술 장갑을 들어 보였다. 얼핏 들으면 가벼운 말투와 다르게 눈빛은 진지했다.
외과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건 태수에 대한 믿음도 있겠지만 스스로 실력에 자부심이 더 큰 모양이었다.
태수는 그런 이기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유야 어찌 됐건 흔쾌히 수술실에 들어와 준 사실만으로도 정말 고마웠다.
같이 수술하는 건 처음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태수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 힘든 인턴 시절부터 이기준의 실력은 선배 레지던트들이 칭찬할 정도였다.
태수가 한창 욕먹고 혼나고 다닐 때 이기준은 레지던트들과 심도 깊게 의학적인 견해를 나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흘렀다.
태수가 비학적인 발전을 이뤘지만 이기준도 놀고 있진 않았으리라. 거의 매일 밤 어울리며 여러 대화를 나눴던 하나만으로도 익히 짐작이 갔다.
짧게 생각을 정리한 후 마음을 가라앉힌 태수는 이기준에게 말했다.
“환자 기다린다. 시작하자.”
“언제든지.”
이기준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간동맥에 생성된 혈종부터 제거하겠습니다. 모스키토 클램프, 메젠바움 베이비.”
“출혈이라. 보비하고 썩션 부탁……. 아, 썩션은 사용 불가라고 했죠.”
이기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선정 간호사가 끼어들었다.
“썩션 사용 가능해요.”
“가능하다고요?”
“하나는 정리해 놓았어요. 나머지는 시간상……”
“언제……. 우리가 잠깐 손을 놓고 있을 때 말입니까?”
이기준이 놀라 물었지만 이선정 간호사는 싱긋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이기준을 보조하는 간호장교에게 부탁했다.
“박 소위님, 썩션 바로 가동되죠?”
“네. 이 간호사님이 청소해 주신 덕분에 바로 가동 가능합니다.”
“그럼 옆에서 보조 좀 잘 부탁드릴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간호장교는 말투만큼 표정도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바로 손을 움직여 이기준에게 썩션과 보비를 건넸다.
피를 흡입하기 위한 썩션, 전기 자극으로 출혈점을 지지는 보비.
두 가지를 건네받고 이기준이 가벼운 무게감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시 피바다 될 일은 없겠습니다.”
“어시스트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걱정 말고 시작하라고. 난 준비 끝났으니까.”
이기준이 찡긋거렸다.
그 시선은 태수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 옆에 있는 이선정 간호사도 함께였다.
저렇게 수술실에서 능동적인 간호사는 이기준도 처음 봤다. 간호사로도 훌륭하지만, 의사들을 다독이는 능력도 출중했다.
그런 간호사가 태수 옆에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다. 아니 시기심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이기준이 잠시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였다.
태수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이기준도 바로 정신을 차리고 태수를 따라 보조를 이어 갔다.
곧 태수와 이기준은 간의 뒷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동맥에 붙어 있는 손톱만 한 종괴와 그 주변에 번진 오돌토돌한 조직들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종괴가 간동맥에 기생한단 느낌이었다.
원인 모를 이유로 상처가 난 간동맥에서 생성된 출혈이 굳어져 만들어진 종괴였기에 기생한단 표현이 옳을지도 몰랐다.
태수는 섣부르게 시작하지 않고 꼼꼼하게 확인한 후 이기준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잘라 내고 문합하는 순서로 진행할 거야.”
“아무리 몸이 자랄 나이라도 간동맥이 너무 짧아지지 않아?”
“재발과 합병증을 줄여야지.”
“하긴 우리 흉부 쪽도 그래. 관상동맥에 돌아다니는 혈전까지도 꼼꼼히 확인해서 재발을 줄일 생각부터 하니까.”
이기준의 말이 길어지는 사이였다.
“먼저 간다.”
태수가 바로 손을 움직이자 이기준이 아차한 얼굴로 따라붙었다.
“넌 항상 급해.”
“느긋할 환자가 아니니까.”
“그건 또 그렇지. 얼른 진행하라고.”
이기준이 슬며시 도발했지만 태수는 반응하지 않았다.
반대편에 선 의사가 누구라도 마음을 조급하게 하지 않았다.
침착하고 안정적으로.
일반적인 수술에서 태수가 추구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응급상황인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의사도 변화하는 건 당연했다.
본격적으로 수술이 시작된 후 태수는 유연하게 손을 움직였다.
“지혈클램프, 티스포셉, 하나 더.”
여러 개의 지혈용 수술 도구를 이용해 혈액을 몇 겹으로 차단했다.
수술 부위가 간동맥이라 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 환자가 아니었기에 좀 더 과감해야했다. 태수는 메젠바움 베이비로 혈종과 그 주변을 거침없이 잘라 냈다.
서걱.
혈종이 잘려 나가자 자잘한 출혈이 생겼다.
그걸 처치하는 건 이기준의 몫이었다.
빨아들이고, 지지고.
보조하는 손길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부드러웠다.
레지던트 시절 수술 경험이 많았단 게 이런 손길로도 증명되었다. 그리고 막상 수술에 들어가니 이기준은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신중한 얼굴로 수술에만 집중했다.
몰입하는 시간이 빠르고 또 짧았다. 냉정한 성격이 수술 중에도 나오는 건지 군더더기가 별로 없었다.
태수는 간동맥을 잘라 내고 문합하는 사이에 이기준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간파했다.
수없이 많은 의사들과 다양한 상황에서 수술했던 태수이기에 다른 의사들보다 그런 쪽으로는 감각이 발달한 탓도 있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속도를 더 올려도 될 것 같았다.
태수는 계산을 마침과 동시에 수술 속도를 올렸다.
“알렌코커, 켈리, 디바키, 믹스터…….”
수술 도구가 쉴 새 없이 바뀌고, 손끝도 살아 움직이듯이 유연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