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730
00733 733화
그 눈빛을 보니 더 물을 수는 없었다.
태수는 이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하늘에서 떨어진 자장면 맛 좀 보자.”
“소감도 말해 주고.”
“당연하지. 이야, 자장면은 진짜 오랜만인데. 어디.”
태수가 얼른 비닐을 벗겨 내고 자장면을 향해 힘차게 젓가락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자장면 속으로 들어간 젓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순간 태수의 손길이 멈추자 유병태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너무 감격해서 우는 거야?”
“그게 아니라…….”
말끝을 흐린 태수가 젓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젓가락에는 퉁퉁 분 자장면이 담겨진 모습 그대로 딸려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본 유병태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 떠올랐다.
“이, 이게 왜 이래? 사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불어.”
“하늘에서 떨어졌다며.”
“어? 아니, 그게…….”
유병태가 말실수를 깨닫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태수는 그런 그에게 미소를 보이며 블록처럼 굳어진 자장면을 힘차게 베어 물었다.
“음.”
“야, 태수야, 그거 먹지 마. PX 갔다 올게.”
“왜, 맛있는데. 추억의 맛이야.”
“우리나 그랬지, 요즘은 레지던트들도 불어 터진 자장면은 안 먹는대. 그러지 말고 얼른 내려놓으라니까.”
유병태가 말렸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젓가락을 억지로 놀려 면과 자장을 뒤섞었다.
대충 비벼지자 태수는 아예 그릇째 들고 흡입했다.
맛?
자장과 면이 따로따로 노는 느낌이다.
하지만 태수는 세상 더없이 맛있는 음식을 대하듯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끄윽! 좋다!”
“독한 놈. 진짜 다 먹었네.”
“최고였어.”
태수가 엄지를 내밀며 환한 표정을 짓자 유병태도 입가에 피식 미소를 그려 보였다.
유병태가 사다 준 자장면을 먹고 힘을 낸 태수는 예정된 오후 수술도 매끄럽게 진행했다.
오늘 하루만 세 건의 수술을 진행했다. 아무리 태수가 체력적으로 단련을 해 왔다고 해도 피곤한 하루였다.
회의실에서 다른 의사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고야 태수도 퇴근길에 올랐다.
유병태가 얼른 다가와 옆에 섰다.
술 마시자고 이야기했었기에 얼른 다가온 모양이다.
피곤한데.
그래도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밖에 나가서까지 자장면을 사다 준 고마운 마음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태수는 미소 띤 얼굴로 먼저 말했다.
“한잔하러 가야지. 거기서 가볍게 밥도 먹자고.”
“아니, 저기, 최 선생.”
“왜?”
“이거 참, 내가 약속한 건데…….”
유병태가 말꼬리를 흐리는 게 의아해 태수가 물었다.
“뭘 뜸을 들여. 그냥 이야기하면 되지.”
“그렇지? 우리 사이에 뭘 꽁하게.”
“우리 사이라, 그렇다고 치고. 무슨 일인데?”
“여자 친구가 위병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가 봐야 할 거 같아.”
유병태의 말에 태수의 눈빛에 작은 놀라움이 스쳤다.
“여자 친구가 있었어?”
“자식. 우리 나이에 요즘 누가 솔로겠냐. 보건소에 검사받으러 온 환자였는데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내가 확 낚아챘지.”
“…….”
태수가 침묵하자 유병태가 멈칫했다.
“너 혹시 여자친구 없……. 아니다.”
“우리야 언제든지 마시면 되니까 가서 좋은 시간 보내.”
“최 선생, 그러니까…….”
“뭘 신경 써. 별일도 아닌데.”
태수가 수더분하게 이야기하자 유병태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보다 빨리 가야지.”
“어?”
“밖에서 기다린다며. 기다리게 하면 되겠냐고.”
“안 되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던데. 먼저 간다.”
유병태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이어서 좌우로 의사들이 인사하며 지나쳐 갔다.
“최 선생, 내일 봐.”
“수고했어.”
“내일은 수술 스케줄 없으니까 맘 편하게 얼굴 보자고.”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의사들이 멀어져 가고 태수 홀로 남았다.
여자 친구라.
요즘 들어서 부쩍 많이 들려오는 이야기다.
외롭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도 있었다.
특히 숙소에 들어가 홀로 불을 켤 때.
그때는 혼자라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인턴, 레지던트 시절은 이래저래 부대끼는 동료들 때문에 그런 걸 느낄 정신이 없었다.
초곡리에서도 일과가 끝나면 식사 약속이나 술 약속이 항상 잡혀 있었기에 외로움을 모르고 지나갔다.
그런데 요즘은 달랐다.
“쓸데없이 집이 커서 그래.”
그는 투덜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태수는 바로 퇴근길에 오르지 않고 501호에 들어갔다.
그르릉.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를 반겼다.
“오셨어요?”
“어째 제가 문병 온 느낌입니다.”
“가운까지 벗고 계시니까 더 그런 거 같네요.”
“저도 그렇지만 이 간호사님은 아예 보호자 같으신데요.”
태수가 힐끔 눈짓을 하자 이선정 간호사가 아래를 내려 보다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쟁반에 배와 과도, 숟가락이 놓여 있던 탓이다.
“회복이 빨라서 오늘부터 미음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수저로 배를 갈아서 먹이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과즙도 많고 산으로 인한 자극이 적으니까 지금 먹기 좋은 과일이죠.”
“선생님도 좀 드실래요?”
“주신다면.”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이선정 간호사가 먼저 주미성에게로 향했다.
태수는 바로 그쪽으로 가지 않고 박지영에게 먼저 다가갔다.
“어이, 말괄량이.”
태수의 부름에 박지영이 발끈했다.
“누가요?”
“‘누가요?’ 한 사람.”
“퇴근 시간 지났는데 왜 와서 시비 거세요.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못 가시는 거예요?”
박지영이 이죽거렸지만 태수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좋은 소식 들려주려고 왔는데 그렇게 냉대하면 되나.”
“내일 수술이라도 해요?”
“내일은 아니고 모레. 내가 집도할 거야.”
태수의 말에 피곤함이 느껴지던 박지영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저 진짜 수술해요?”
“그래. 많이 기다렸지?”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이거 목 늘어난 거 보이시죠?”
“아니. 주름만 보여.”
태수가 진지한 얼굴로 농담하자 박지영이 발끈했다.
“선생님은 자글자글하거든요?”
“남자가 너무 탱탱해도 문제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여자 친구도 없지.”
“저기 있잖아. 배 깎아 주는 여자 친구.”
“흥이네요.”
박지영은 두 사람 사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삐친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때 이선정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싸우고 오세요. 지영이도 먹을래?”
“아니요. 기분 나빠서 못 먹겠어요.”
“애도 아니고. 나중에 먹고 싶으면 말해. 선생님은 어서 오세요.”
이선정 간호사가 부르자 태수는 박지영에게 말했다.
“간다.”
“얼른 가세요.”
“녀석.”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주미성의 병상 쪽으로 걸어갔다.
주미성은 반쯤 앉아서 숟가락으로 갈은 배를 조금씩 떠먹고 있었다.
태수가 근처에 앉자 주미성은 살짝 고개만 숙여 보이고 다시 배에 집중했다.
먼저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좋아진 반응이었다.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소곳한 자세로 배를 깎던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왜요?’
‘미성이요.’
‘많이 좋아졌죠?’
당사자가 앞에 있기에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다.
수술실에서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두 사람에게 이런 대화 정도야 눈빛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선정 간호사가 밝게 웃으며 배를 내밀었다.
와삭.
받아 든 배를 크게 한입 베어 문 태수가 주미성을 바라봤다.
주미성은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지 어깨를 움츠렸지만 고개 돌려 외면하진 않았다.
더 지켜보면 반발이 일지도 모르기에 태수는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영수는 오늘도 안 보이네요?”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 조금 늦어지나 봐요.”
“중학생만 돼도 얼굴 보기 힘들다는 요새 시류가 와 닿네요.”
“먹고 있으면 오겠죠.”
이선정 간호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행히도 주영수는 병원으로 오는 것에 거부감은 없는 거 같았다.
아니면 유일한 가족인 누나가 입원해 있기에 꼭 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태수는 배를 씹으며 병실을 둘러봤다.
뭔가 이상했다.
보통 입원을 하면 집에서 이것저것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주미성의 병상 주변은 온통 병원에서 지급한 물품들뿐이었다.
입원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고려해 준비해 놔서 불편한 건 없겠지만, 그래도 평소 익숙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태수의 눈빛을 보고 눈치빠르게 이선정 간호사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그보다 이거 달고 맛있네요. 어디서 사셨습니까?”
태수는 말을 돌렸다.
이선정 간호사와는 어떤 이야기라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미성이 앞에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굳이 꺼낼 생각이 없었다.
태수의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이선정 간호사는 능청맞게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
“제가 어디 나갈 시간이나 있나요.”
“그럼 이걸 어디서…….”
“수술실 간호장교들이 줬어요. 선물 들어온 거라고 같이 먹자고 나눠 주더라고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태수가 멈칫했다.
“이거 다른 사람들 것도 아니고 군인들 건 받아먹으면 좀 미안한데.”
“호의로 준 건 그냥 받는 거라면서요.”
“그거야 그렇죠. 나중에 뭐라도 사 드려야겠습니다.”
“그렇게 다 돌고 도는 거죠. 선생님 말씀대로요.”
이선정 간호사의 말에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같습니다.”
“좀 더 드세요.”
“많이 먹으려고요.”
태수는 거부하지 않고 깎아 놓은 배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도 주미성에게는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에게 들은 대로 하고 있었다.
남자랑 같은 공간에 있어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 주란 주문이었다.
무심하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게 얼마나 좋은 효과를 보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전문의의 조언대로 했다.
주미성도 태수를 하루에 몇 번씩 봐서 그런지 같은 공간에 있는 걸 그렇게 무서워하진 않는 것 같았다.
배를 모두 먹고 잠깐 수다도 떤 후였다.
이제 가야 할 때였기에 태수가 이선정 간호사에게 물었다.
“오늘도 여기 계실 겁니까?”
“아니요. 오늘은 집에 가서 옷 좀 갈아입고 해야 돼요.”
“그럼 가시죠. 미성아, 내일 보자.”
태수가 먼저 인사하자 주미성이 힐끔 쳐다보고는 살짝 고개만 숙였다.
역시 질문 외의 대화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태수는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던 중 박지영에게 말했다.
“너무 삐쳐 있지 말고, 내일 오후부터는 금식해야 되니까 밥 많이 먹어 둬.”
“알았어요.”
“자식. 간다.”
“안녕히 가세요.”
박지영은 언제 삐쳤냐는 듯이 살갑게 인사했다.
수술 소식이 그만큼 반가운 모양이었다.
진통제로 고통을 느끼지 않더라도 병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갑갑함이 강한 것 같았다.
태수의 차에 오른 두 사람은 위병소를 통과했다.
내리막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던 중 태수가 이선정 간호사에게 물었다.
“동생이 집에 다녀오지 않았던 거 같은데요.”
“그런 거 같아요. 그런데 물어보진 못했어요. 어쩌면 집에서 가져올 게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보다 이젠 시선을 돌리진 않던데요.”
“선생님은 매일 몇 번씩 보니까 그래도 적응이 좀 되나 봐요. 조용히 선생님과 어떻게 만났는지도 물어보고 그랬어요.”
그 소리에 운전하던 태수가 살짝 놀랐다.
“그런 것도 물어봅니까?”
“우리 둘이 하도 붙어 다니니까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카슈미르로 가게 된 계기부터 이야기했죠.”
“그건…….”
“피 공포증이요? 이젠 과거 이야기잖아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오히려 제가 공포증을 이겨 낸 걸 미성이가 유심히 듣던데요.”
이선정 간호사의 밝은 목소리에 태수는 안도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역시 차를 타고 오면 금방이네요. 벌써 빌라가 보이는데요?”
“식사하고 가시죠.”
“그러려고요.”
이선정 간호사가 수더분하게 대답하자 태수도 빌라로 향하는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속도를 더한 차는 곧 빌라 입구에 접근했다.
노을도 점점 사라져 가는 저녁 무렵이라 주변이 어두웠다.
라이트를 번쩍이며 태수가 주차장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숨어 있었다는 듯이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자 태수가 깜짝 놀라 급정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