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741
00744 744화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에게 물었다.
“택배 시키셨어요?”
“아니요.”
“그럼 저게 뭐예요?”
“일단 가 보죠.”
두 사람은 좀 더 빠르게 걸어 스티로폼 상자 앞에 도착했다.
스티로폼 상자는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제법 컸다. 그런데 택배로 온 게 아닌지 택배 용지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붙어 있는 건 투박한 글씨가 인상적인 메모지였다.
-언제 올지 몰라서 그냥 가.
누군지 적혀 있지도 않았다.
그게 더더욱 의아했다.
“도대체 누굴까요?”
“전혀 감이 안 잡히네요. 일단 들어가시죠. 끙.”
들어 보니 상당히 무거웠다.
이 속에 뭐가 들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집 안에 들어간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바로 스티로폼 상자부터 열었다.
사락.
뚜껑을 들추자 꽉 찬 내용물이 보였다.
계란, 감자, 생선들, 그리고 물김치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건 생선이었다. 아이스 팩에 담겨 있어 싱싱함이 유지되어 있는 상태다.
이런 농수산품을 보낼 곳은?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동시에 떠오르는 곳을 말했다.
“초곡리.”
“초곡리에서 보낸 거 같은데요.”
그런데 누가?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두 가지 의문점은 풀리지 않았다.
잠시 내려다보던 태수가 물김치를 보고는 눈빛을 반짝였다.
이거면 충분하다.
그 생각으로 태수는 얼른 물김치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음, 이 맛은……. 이장님이 보내신 거 같은데요.”
“어디요? 어어, 맞아요. 사모님 솜씨예요.”
이선정 간호사가 기억하는 맛이 맞다면 확실했다.
“그보다 어떻게 여길 알고 오신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전화부터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차, 그러네요. 잠시 실례 좀.”
“오늘 저녁은 생선찜이에요.”
“그리운 맛으로 부탁드립니다.”
이선정 간호사가 주방에 들어간 사이, 태수는 휴대폰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이기남 이장에게 전화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이기남 이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퇴근을 이렇게 늦게 해.”
투박한 표현과 목소리가 여전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지만 떨어져 있었다는 걸 잊을 만큼 익숙했다.
태수도 초곡리에 머물던 그 시간처럼 정겹게 반박했다.
“오셨으면 기다리시지, 그냥 가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언제 올지 알고 기다려.”
“언제 왔다 가셨는데요?”
“2시에 도착했었나? 아마 그럴 거야.”
이기남 이장의 목소리에 태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시간이면 저도 일하고 있을 시간이죠. 그보다 전화라도 한번 주시기 그랬습니까.”
“수술을 하고 있는지, 자빠져 자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
“전에는 새벽에도 전화하셨습니다.”
태수가 대답하자 이기남 이장의 목소리가 더욱 투박하게 변했다.
“이젠 어른한테 꼬박꼬박 말대꾸까지 하고.”
“아쉬워서 그러죠. 여기까지 오셨는데 얼굴도 못 뵌 저는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나도 집에 와야지. 거기서 계속 죽치고 기다리면 되겠어?”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면 되죠.”
태수가 섭섭함을 표현했지만 이기남 이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은 집에서 자야지.”
“그보다 여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박 선생이 그제 전화했었어. 최 선생네서 며칠 놀다가 내려간다고. 몸 건강히 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
“선배님이요?”
태수는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초곡리에서 보건의로 근무할 때 박성민이 주기적으로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이기남 이장과 몇몇 마을 어른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런 인연으로 꾸준히 연락을 이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수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묻자 이기남 이장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놈은 면상은 안 비춰도 전화는 하는데, 언놈은 이것도 저것도 안 하니, 원.”
“죄송합니다.”
“그래서 애들은 잘 째고 있어?”
“염려해 주신 덕분에 큰 문제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태수는 조금 숙연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아쉬움에 투덜거렸지만 전화 한 통 못한 죄가 크기에 더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이기남 이장은 그런 이유로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거 애새끼들이 뭐 그렇게 아파. 하여간 요즘 애들은 약해 빠져가지고.”
“사정이 있는 애들이잖습니까. 어른들이 잘못한 것도 많습니다.”
“뭐, 그거야 그렇지. 그보다 언제 와?”
이기남 이장이 화제를 돌리자 태수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요.”
“거기서 등 따숩고 배부르게 지내니까 아예 돌아올 생각이 없남?”
“그건 아닙니다. 이곳이 절 더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이죠.”
태수의 말에 이기남 이장은 톡 쏘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우리는 최 선생 필요 없는 줄 알아?”
“혹시 누가 편찮으십니까?”
“아픈 놈들이 한둘이겠냐고.”
“그러면 제가 보건소로 전화를 해서…….”
태수가 서두르려 하자 이기남 이장이 딱 잘랐다.
“거 말라비틀어진 멸치같이 생긴 놈은 왜 찾아.”
“네?”
“그 의사 내과 담당이래. 가면 약만 줘. 팔이 아파도, 다리가 쑤셔도 약만 준다고.”
“…….”
할 말을 잃은 태수가 조용히 있자 이기남 이장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얼른 내려와서 물리치료도 좀 하고, 쨀 놈들은 좀 째고 그러란 말이야.”
“정 편찮으시면 제가 삼척병원에 전화해 놓겠습니다.”
“결국 돌아올 생각은 없다는 거잖아.”
“……지금은 힘들 거 같습니다.”
태수는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태수도 초곡리에서 받은 관심과 사랑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그때 이기남 이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래서 그때 나한테 말했던 거처럼 우리한테 받은 걸 애들한테 돌려주고 있나?”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족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아직 힘이 모자란 가 봅니다.”
태수의 대답에 이기남 이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 보나마나 라면이나 먹고 그러니까 힘이 없는 거야. 한국 사람은 밥하고 반찬을 먹어야 힘이 난다니까.”
“이 간호사님이 잘 챙겨 주고 계십니다.”
“선정이가 챙겨 주기는. 그 녀석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판인데. 됐고, 가끔 이것저것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이기남 이장의 말에 태수가 멈칫했다.
“뭘 또 보내 주신다고요.”
“많이 먹으라고. 많이 먹고 하는 일 다 잘 마무리 짓고 돌아오라고. 필요 없다고 하면 아마 마을 부녀회에서 달려갈지도 몰라.”
“이장님.”
“목소리 가라앉은 거 봐라. 남자새끼 목소리가 그래서 뭐에 써먹는다고.”
이기남 이장의 목소리에 약간 신경질이 느껴졌다.
평생 바다와 싸우며 살아온 그에겐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태수도 알기에 목소리에 힘을 더했다.
“저 목소리 씩씩합니다.”
“쥐어짜지 말고. 내 개인적인 욕심은 당장이라도 끌고 오고 싶어. 나에게는 우리 마을이 더 중요하니까.”
“…….”
“최 선생이 결정한 거라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돌아와. 집도 거의 다 지어 가는데 주인이 빨리 와서 자빠져 봐야 할 거 아니냐고.”
여러 말을 이어서 했지만 결론은 보고 싶다는 것이다.
괜한 핑계를 대고 있단 걸 알기에 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조만간 시간 내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누가 놀러 오래. 아예 돌아오라니까.”
“그건 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보다 보내 주신 거 잘 먹고 씩씩하게 일하겠습니다.”
“애먼 데 힘쓰지 말고 빨리빨리 애들 치료해 주고 돌아와. 그리고 건강하게 돌아와. 그래야 돌아와서 바로 우리 진료해 주지. 그만 끊자고.”
이기남 이장의 목소리가 통화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그게 태수를 뭉클하게 했다.
스쳐 지나갈 인연이 아닌 앞으로도 지속될 사이였다.
태수도 그 마음은 확고했다.
다만 지금은 그쪽으로 갈 수 없을 뿐이었다.
그게 조금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곧 그런 마음을 털어 냈다.
이기남 이장의 말이 옳았다.
밥 많이 먹고 힘내서 열심히 아이들을 수술하면 된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이 빨리 끝나게 된다면 초곡리로 돌아가면 된다.
항상 염려해 주고 따스하게 감싸 주는 초곡리 주민들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몸에 힘도 생기는 것 같았다.
주말 동안 통통하고 싱싱한 생선으로 매끼 포식한 태수는 약간 살이 올랐다.
그렇게 축적된 에너지는 아이들을 위해 쓰였다.
“최 선생이 더 열심히 하네.”
“이거 우리 보라고 열심히 하는 거지?”
“그렇지.”
태수가 의욕이 넘칠수록 다른 의사들도 자극이 되는 모양이었다.
꼭 태수 한 사람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지만 시발점이 된 건 맞았다.
월요일이라 아이들을 살펴보고 또 검사도 진행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바삐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태수가 이선정 간호사에게 말했다.
“미성이의 외적인 부분들은 모두 치료가 된 상태입니다. 이젠 집에서 약 잘 먹고 소독해 주면 될 정도입니다.”
“그렇죠.”
“퇴원시켜야 할 거 같은데요.”
태수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이선정 간호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알기 아는데…….”
“저도 미성이의 마음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건 압니다.”
“…….”
“담당 보건소에 연락해서 여자 정신과 의사를 소개받든지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거로 끝인가요?”
약간 실망한 듯한 이선정 간호사 목소리에 태수가 빙그레 웃었다.
“아뇨. 보건복지부에게로 이미 보고서 올렸습니다. 아마 조만간내로 미성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가 될 겁니다.”
“나쁜 놈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태수가 차분하게 말하자 이선정 간호사는 바로 알아들었다.
“알았어요. 대신에 정신과 치료에 대해선 제가 이야기할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다고 제 임의대로 여기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거라도 해야지요.”
“역시입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많이 신경 써 주셔서 좋아졌잖아요. 저도 그거면 만족해요. 우리가 모든 걸 할 순 없단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선정 간호사는 미소를 지으며 멀어져 갔다.
태수도 이런 이야기가 마음 편하진 않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봐도 주미성을 계속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순 없었다.
잠시 후.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에게 다시 다가왔다.
“보내고 왔어요.”
“마지막 인사도 못했네요.”
“그게 좋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날씨가 꾸물꾸물해서 보내는데 미안하긴 하더라고요.”
“집엔 어떻게 간답니까?”
태수가 묻자 이선정 간호사가 애써 미소를 보였다.
“택시 타고 가라고 했어요. 용돈이라고 좀 챙겨 줬고요.”
“순순히 받았습니까?”
“실랑이했죠. 그래도 어떻게 해요. 이럴 때는 나이가 깡패라니까요. 그리고 혹시 몰라서 제 전화번호도 줬어요.”
“잘하셨습니다. 아마 마음 둘 곳이 필요하면 연락할 겁니다.”
“그래야죠. 자, 미성이는 미성이고, 우리는 우리 일 할까요?”
이선정 간호사가 어깨를 쭉 펴며 우울한 기분을 털어 내려 했다.
주미성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치료를 마치고 군병원을 떠난 아이들이 제법 되었다. 그 아이들을 담당하던 의사들도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다.
그저 실력을 키우려 자원한 장소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돕고자 찾아온 곳이다.
그만큼 의사들이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태수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우르릉.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내리려나.”
저기압이라 그런지 괜히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태수가 간호사실에서 차트를 확인할 때였다.
유병태가 홀딱 젖은 몸으로 다가왔다.
“억수로 퍼붓네.”
“그렇게 많이 내려?”
“이거 봐 봐. PX 간다고 잠깐 건물 밖에 나갔다 왔는데도 이 모양이야.”
“엄청난가 보네.”
태수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유병태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날은 괜히 불안한데.”
“그런 소리 말고. 비가 한두 번 내리는 것도 아닌데.”
“나도 이런 소리 하기 싫다고.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이 그래.”
유병태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