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771
00774 774화
한참 날아가는 헬기 아래는 빌딩 숲을 지나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좀 더 날아가더니 커다란 규모의 군시설 안으로 진입했다.
태수가 알기로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기지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규모인 동두천 기지였다.
그런데 건물들을 내려다보는 태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건물 배치는 물론이거니와 동선까지.
처음 방문한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잠시 생각해 보니 카슈미르에서 봤던 PKO 군부대와 유사했다.
카슈미르에 주둔하고 있던 건 PKO(평화유지군)였지만, 미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태수가 상공에서 구경하는 사이, 헬기는 서서히 착륙장에 내려섰다.
이미 안전벨트를 풀고 있던 태수는 미군 소령과 함께 내렸다.
타타타타.
뒤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여전히 요란하게 들려왔다. 엔진을 끄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탓이다.
착륙장 밖으로 향하던 태수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군용 지프를 탈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건 고급 세단이었다.
앞 번호판을 보니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안내를 맡은 육군 소령이 뒷좌석을 열며 태수에게 말했다.
“클라크 장군께서 관용차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
예상치 못한 융숭한 대접에 태수는 할 말이 없었다.
태수가 대답이 없자 그가 이어서 말했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일단 가시죠.”
응급환자가 있다고 했으니 태수는 더 생각하지 않고 뒷좌석에 올랐다.
그런데 소령은 탑승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동시에 고급 세단은 미끄러지듯이 출발했다. 소령이 탑승하지 않아 태수는 조금 놀랐지만 운전병에게 묻진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으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헬기 착륙장을 벗어나 조금 더 달리자 태수를 태운 차량은 이내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 앞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태수가 상대를 확인했다. 백인인데 군모를 깊게 눌러써서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의아해하던 사이, 그가 먼저 태수에게 다가와 영어로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닥터 최.”
자신을 아는 미군이 또 있다?
태수의 시선이 바로 명찰로 향했다.
-라이언.
그 이름을 확인한 태수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인사를 하며 군모를 살짝 올린 그는 태수의 기억 속에 있는 라이언 상병이 맞았다.
거수경례를 올리는 손길 곳곳에 새겨진 자잘한 상처도 여전했다.
이잠바크에서 생사를 오가던 그를 사력을 다해 수술했던 기억도 동시에 떠올랐다.
“라이언 상병.”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그럼…… 중사?”
태수가 계급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묻자 라이언 상병, 아니 중사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식구들이 걱정해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전역하신다더니요.”
“그럴까 생각했는데 이 생활에 젖어 버려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지겹다면서요.”
예전에 들었던 말을 들먹이자 라이언 중사가 슬쩍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부상당했을 때는 무슨 생각인들 못하겠습니까. 지나고 나니까 그것도 이젠 추억이 되었습니다.”
“하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까요. 자세한 건 나중에 듣고, 우선 응급환자에게 안내해 주십시오.”
“응급……. 아, 이쪽입니다.”
라이언 중사는 뭐라고 하려다 중간에 말을 바꿨다.
뒤따르던 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라이언 중사의 안내를 받은 태수는 건물 맨 위층에 마련된 방 앞에 섰다.
아무리 군시설이라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군병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안내역을 맡은 라이언 중사가 태수에게 말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는 할 일을 마쳤는지 미련 없이 돌아갔다.
그 모습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좌우간 이 문으로 들어서면 알게 된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태수는 고민하지 않고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익.
안으로 들어간 태수는 조금 놀랐다. 예상보다 훨씬 커다란 집무실 크기 때문이었다.
책상에서 일어서서 태수를 향해 선 백인의 중년인이 있었다.
그를 본 순간 태수 얼굴에 반가움이 서렸다.
“클라크 장군님.”
“반갑습니다, 닥터 최.”
클라크 장군은 예전과 같은 부드러운 저음과 밝은 얼굴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가까이 마주 서자 클라크 준장이 스스럼없이 와락 끌어안았다. 태수도 무거운 악력을 느끼며 마주 안았다.
잠시 반가운 해후가 끝나자 웃음기가 남아있던 태수가 서둘러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유엔 파병 끝나니까 승진시켜서 한국으로 파병을 또 보냈습니다.”
“원래 평화유지군이 아니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카슈미르의 정세가 불안한 시기여서 PKO와 협조해서 파병을 나갔던 겁니다.”
“그러셨군요. 아니지, 그보다 환자 어디 있습니까?”
태수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심각한 얼굴로 물을 때였다.
클라크 장군이 갑자기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
영문을 모르는 태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조금 더 크게 웃던 클라크 장군이 태수에게 말했다.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십니까?”
“네?”
“제가 언제 환자가 있다고 한 적 있습니까?”
클라크 장군이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태수는 당황했다.
“통화로 분명히…….”
“닥터 최가 응급이냐고 먼저 물어보셨습니다.”
“…….”
태수는 입을 다물고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 봤다.
이내 그때가 떠올랐는지 그는 아차 했다.
응급이란 말을 먼저 꺼낸 건 자신이었고, 클라크 장군은 장단을 맞춰 준 듯 싶었다.
태수가 멋쩍은 얼굴이 되자 클라크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환자는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전 오히려 아주 안심하고 또 안도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때와 지금의 닥터 최가 똑같아서 말입니다.”
클라크 장군의 말에 태수는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의욕만 앞섭니다.”
“무슨 말씀을. 환자에겐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이 있는 의사란 걸 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일단 앉으시죠.”
“먼저 앉으셔야죠.”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먼저 앉히려 작은 다툼을 벌였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싸움이라 그런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리했다.
클라크 장군은 상석이 아니라 태수의 반대편에 자리했다. 그 하나만으로도 클라크 장군이 태수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이잠바크에서 라이언 중사를 수술한 후부터였다.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태수도 속으로 자그맣게 감탄했다.
그사이 클라크 장군이 태수에게 말했다.
“이런 곳에 모셔서 죄송합니다. 저도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아서 이동하기가 썩 쉽지 않습니다.”
“아직 안정이 되지 않으셨다면…….”
“한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그 전까지 계속 카슈미르에 계셨던 겁니까?”
태수의 질문에 클라크 장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레바논에 잠깐 있었고, 본국에 복귀해서 휴가도 좀 즐긴 후에 주한미군 으로 발령받아 오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신지요?”
“아, 그때 화상통화를 몇 번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안 그래도 가족들 모두 닥터 최 안부를 궁금해했습니다.”
“같이 안 들어오셨습니까?”
“제가 안정되면 들어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때 한번 연락 주십시오. 한국에 오시면 아주 제대로 대접해 드리고 싶으니까요.”
태수가 다짐하듯 약속하자 클라크 장군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언제나 똑같은 닥터 최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감사드려야죠. 이렇게 절 초대해 주셨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태수가 말끝을 흐리자 클라크 장군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군병원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
클라크 장군이 순간 멈칫했다.
그에 태수는 얼른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캐물으려는 건 아니고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당황하시니까 제가 더 민망하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닥터 제임스에게 들었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야 한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군의관은 아닌데요.”
“그건 아직 광택도 벗겨지지 않은 별의 힘을 빌렸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클라크 장군은 슬쩍 말을 돌렸다.
태수도 한국에 주한미군 장성으로 파견된 그가 작정하고 찾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어디 있는지 쉽게 찾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수소문하던 중에 닥터 최가 곤란하다는 걸 알고 기분이 참 더러워졌었습니다.”
“음.”
“예전처럼 툭 까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부러 헬기를 보냈습니다. 그쪽에서 닥터 최를 계속 압박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말입니다.”
클라크 장군은 정말 모든 일을 알고 있는지 차분하게 이야기하다 점점 격하게 흥분했다.
이젠 태수가 만류해야 할 정도였다.
“진정 좀 하시고…….”
“이게 진정할 일입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그따위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저도 뭐 기분이 썩 좋진 않습니다만.”
“군병원 내부적으로 징계위원회까지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의 생명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한 의사를 별 같잖은 규정따위로 징계하다니,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클라크 장군의 격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태수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클라크 장군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수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에 클라크 장군이 멈칫했다.
“지금 제 모습이 우스우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는데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책망하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클라크 장군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수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전에 이리 흥분하셨던 기억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나 봅니다.”
“카슈미스에서 제가 쫓아낸 그놈들 말입니까?”
“저는 그때 외출한 군인들이 술 한잔하고 다툴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군인들끼리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인과는 다투면 안 됩니다. 그 순간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예비 살인자들이 됩니다.”
클라크 장군이 확고한 목소리로 말하자 태수가 뒷말을 이었다.
“그때 저에게 그러셨죠. 군인은 전문적인 살인 교육을 받은 놈들이라 통제가 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그래서 민간인과 마찰을 일으킨 그들을 모두 강제 전역시키셨고요.”
“그 분대장이 와서 따져서 그 새끼까지 잘라 버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 일을 다시 떠올려도 하등 부끄러움이 없는 듯 클라크 장군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태수는 그 시절 기억을 좀 더 끄집어내며 물었다.
“그들은 군에서 쫓겨나고 얼마 후에 현지인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군을 등에 업고 난리를 피웠으니 쫓겨난 후에 보복을 당해도 싸죠.”
“그때도 출동 안 시키셨죠?”
“민간인들끼리의 일이라 군은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클라크 장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는 참 다정다감하신데, 군 기본자세에 대해서만큼은 정말 누구보다 칼날 같으십니다.”
“그게 지금 저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한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저도 존경하는 거고요.”
태수가 슬쩍 분위기를 바꾸려 했지만 클라크 장군은 외려 화제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저도 그래서 그 군병원의 군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국민의 생명이 위급한 순간인데 군병원에 들어오는 게 뭐가 문젭니까. 그리고 군병원 지침에도 응급시에는 민간인을 수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그렇죠.”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크 장군이 이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