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776
00779 779화
이윽고 클라크 준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잘 컸습니다. 장래 희망이 닥터 최 같은 외과 의사랍니다.”
“…….”
태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닥터 최.”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시르에게 전해 주십시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입니다.”
진심이다.
카프레네, 그리고 제임스에 이어 수많은 의사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 누군가를 도와 의사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할 생각이다.
그제야 클라크 준장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꼭 전해 주지요. 그리고…….”
말꼬리를 흐리는 클라크 준장을 보며 태수가 입을 열었다.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사비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고요. 자기가 본 최고의 의사는 닥터 최라고.”
울컥했다.
태수는 격동 치는 심장박동을 도대체 조절할 길이 없었다.
아차한 클라크 준장이 서둘러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
“그나저나 한국에 와서 일이 많으셨다면서요?”
“네.”
그러나 태수의 입에서 나온 건 단답형 대답뿐이다.
다시 침묵이 이어지자 이번엔 태수가 아차한 심정으로 변했다.
더 있으면 실수할 듯했다.
“이만 가 볼랍니다.”
“이거 제가 공연히…….”
“아닙니다. 듣고 싶었던 소식이기도 합니다.”
“음, 오늘은 분위기가 그러니 다음에 식사라도 합시다.”
“그러시죠. 그럼.”
손을 동시에 놓은 순간 태수는 바로 뒤돌아 걸어갔다.
클라크 장군 또한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움직였다.
그게 카슈미르에서 잦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 그들만의 룰이었다.
집무실 밖에는 라이언 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시죠.”
“부탁드립니다.”
라이언 중사가 앞서자 태수가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건물을 벗어나니 널찍한 마당에 3대의 차량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군용 지프, 관용차, 마지막으로는 군용 트럭이었다.
3대가 줄지어 서 있자 태수가 아리송한 얼굴로 라이언에게 물었다.
“왜 차가 세 대나 됩니까?”
“그건 목적지에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
“이거 뭔가 상당히 불안한데요.”
“만족하실 거라 확신합니다.”
라이언 중사가 단언하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클라크 장군님에게 이미 호의를 거부 없이 받는다고 말씀드려서 물리진 못하겠네요.”
“그럼 관용차로 모시겠습니다.”
“영광입니다.”
“배웅을 맡게 된 제가 더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라이언 중사는 태수를 관용차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태수는 머리를 채우는 사비 생각에서 헤어 나오려 최대한 애썼다. 이대로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공연한 우울감만 줄 뿐이다.
마음을 바꿔야 했기에 그는 걸어가며 눈빛을 번뜩거렸다.
미군 장군의 관용차를 타고 복귀한다면 어떨까.
아마 군병원이 제대로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태수는 군병원 관계자들이 당황하는 걸 꼭 보고 싶었다. 그래야 그동안 제약을 당한 설움이 통쾌하게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거절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생각하는 사이, 태수는 관용차에 올랐다.
라이언 중사는 관용차가 아니라 앞에 있는 군용 지프에 선탑했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니 군용 트럭 조수석에 샘 중사가 타고 있었다.
부웅.
그렇게 둘러보는 동안 관용차는 미끄러지듯이 출발했다.
미군의 보호 속에 분당으로 향하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비 생각이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지만 앞으로 닥칠 일도 대비해야 했다.
어느덧 태수를 태운 차량은 분당에 들어섰다. 조금 더 달린 관용차는 그가 거주하는 빌라 입구에 멈춰 섰다.
관용차에서 내린 태수는 다가오는 라이언 중사와 샘 중사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이거 제 집까지 알고 계신 줄은 몰랐는데요.”
“신상 제대로 털었습니다.”
“이래서 개인 신상 정보가 중요하다는 거네요.”
“아무리 보호하시려 해도 불가능한 것도 있는 법입니다.”
샘 중사의 대답이 짓궂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기에 조금은 민감한 대화도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태수는 만 하루 만에 돌아온 숙소를 바라보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바로 병원에 가지 않고 왜 여기로 오신 겁니까?”
“집에서 차 한 잔 얻어 마시려는데, 실례입니까?”
“저는 별 상관 없는데…….”
태수는 주미성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조금 자신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낯선 남자, 그것도 외국인들이 집에 들어가게 된다면?
게다가 단단한 체격에 큰 덩치.
남자 공포증이 남아 있는 주미성이 어찌 나올지 염려스러웠다.
영문을 모르는 라이언 중사와 샘 중사가 멀거니 바라보자 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 집에 누가 좀 있어서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선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인주의가 강한 미군들이라서 그런지 별다른 질문 없이 이해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태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냥 절 주십시오.”
“혼자는 힘드실 겁니다.”
“그럼 문 앞까지만 가져다주시면 제가 들여놓겠습니다.”
“썰. 그렇게 하겠습니다. 애들 내려라.”
샘 중사가 지시를 내리자 라이언 중사가 크게 외쳤다.
“하차!”
누구에게?
태수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군용 트럭 뒤에서 4명의 군인이 빠르게 내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들도 어제 같이 술을 마신 분대원들이었다.
생각도 못한 상황에 태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저분들은 언제…….”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 트럭에 탔는지.”
샘 중사의 넉살에 태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이거 너무 감사한데요.”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안내해 주십시오.”
“이쪽입니다.”
태수가 먼저 움직이는 사이, 샘 중사와 라이언 중사, 그리고 분대원들은 군용 지프로 향했다.
트렁크를 열자 그 속이 상자들로 꽉 차 있었다.
그 모든 걸 준비해 준 건 당연히 클라크 장군일 터였다.
태수는 더 놀라고 싶지도 않았다. 놀라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던 탓이다.
건장한 군인들인 만큼 커다란 상자를 하나씩 어깨에 지고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태수는 상자에 손도 못 대게 했다. 접근조차 철저히 막으며 미군들은 상자를 옮겼다.
그사이 태수는 얼른 집에 들어가서 주미성을 불렀다.
“미성아.”
“…….”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신발장을 확인했다.
주미성의 신발이 없었다.
의아한 태수였지만 일단 현관문 앞을 오가는 미군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요.”
“그럼 안으로 옮겨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태수는 미군들을 번거롭게 해서 미안했지만 상자가 너무도 많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마친 태수가 빌라 밖으로 나왔다. 다들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자 그가 다가가 말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그리고 미군 군수 물품 중 하나인 씨레이션도 그렇고, 집이 꽉 찬 거 같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드리면 장군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제가 따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이젠 병원으로 가는 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가기 전에 식사부터 하시죠. 꼭 대접해 드리고 싶네요.”
태수가 강권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식으로 거하게 식사를 대접한 후에야 태수는 다시 미군들과 군병원으로 향했다.
위병소에 도착하자 태수가 나서서 위병 사수에게 다가갔다.
출퇴근할 때 자주 봤던 얼굴이었다.
“복귀했습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아, 네. 그런데 미군 차량들은…….”
“같이 들어갈 겁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위병 사수는 헐레벌떡 위병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위병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시 관용차에 탑승한 태수는 군용 지프를 앞세워 군병원으로 들어갔다.
언덕을 올라 병원 앞에 차량들이 일렬로 멈춰 섰다.
태수가 관용차에서 내리는 사이, 앞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짙은 초록색의 승용차였는데, 위에는 경광등이 달려 있고 커다랗게 ‘헌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 차량이 병원 문 앞에 멈춰 있는 게 의아했다.
태수가 바라보는 사이, 샘 중사가 다가와 정중히 물었다.
“하차할 게 좀 있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저쪽에 내려!”
샘 중사가 소리치자 라이언 중사와 다른 분대원들이 이번에는 군용 트럭에서 무언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두툼한 천막이 덮여 있었기에 몰랐지만 그 속에도 상자들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저것도 분명 클라크 장군이 군병원에 보여 주기 위해 준비한 게 확실했다.
태수가 미군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
이런 걸 보여 줘야 군병원에서도 그를 홀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마치 친정집에 들렀다가 돌아온 것처럼 선물 보따리가 정말 어마어마했다.
미군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를 내리는 사이였다.
병원 현관문이 열리고 헌병들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헌병들 사이에 김용철 중령이 같이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가.
앞으로 내밀고 있는 양손은 얇은 천으로 덮여 있는 모습이다.
연행되어 가는 걸 보니 역시 이번 일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태수가 생각하는 사이 헌병들과 김용철 중령이 옆을 지나갔다.
그때 김용철 중령이 멈춰 서서 태수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미군들이 데려다주기까지 했나 보네. 이런 내 모습을 보니 이제 만족하나?”
“이런 상황은 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지?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걸 말이야.”
헌병대에 끌려가는 입장인데도 김용철 중령의 말투가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태수가 침묵하고 있자 김용철 중령이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조만간 내가 준비한 아주 반가운 선물이 도착할 테니까.”
“뭔지는 몰라도 썩 반가울 거 같진 않은데요.”
“아니야. 반가울 거야. 후후.”
김용철 중령은 자그맣게 웃으며 헌병대 차량으로 모습을 감췄다.
선물이라.
태수는 그 말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그때 헌병 대령이 병원 현관으로 나왔다.
미군 차량들을 본 그가 움찔하더니 좌우를 둘러봤다. 그러고는 태수를 발견하고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최태수 선생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충성. 먼저 이번 일에 대해 불편을 겪으신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육본에서 이번 일에 대한 수사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헌병 대령은 거수경례까지 하며 태수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말했다.
헌병 대령이라고 하면 군대에서는 어깨 좀 펴고 목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갈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육군 본부를 들먹이며 태수에게 저자세를 보였다.
주한미군 사령관의 입김이 상당히 강하다는 걸 다시금 경험할 수 있었다.
태수는 헌병 대령에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대로 여기 상황실을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미군들은 뭘 나르는 겁니까?”
헌병 대령이 의아하게 묻자 태수가 어깨를 들썩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선물 받은 거라서요.”
“저렇게 많은 걸 말입니까?”
“궁금하시다면 동두천 클라크 장군님에게 연락해 보십시오.”
태수가 다소 뻣뻣하게 대답했지만 헌병 대령은 개의치 않았다.
“아닙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수고하십시오.”
“네. 충성.”
가볍게 거수경례를 올린 후 헌병 대령이 헌병대 차량에 탑승했다.
부웅.
차가 출발하는 사이였다.
차창을 통해 김용철 중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태수를 봤는지 한 번 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보였다.
태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선물을 준비했다.
그 소리가 계속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