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796
00799 799화
태수가 깜짝 놀란 얼굴로 변했다.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이네요. 아, 그보다 저쪽에 일이 좀 있어서요. 아, 최 선생도 알아 둬서 나쁜 건 없지요.”
“어떤 일입니까?”
태수가 지친 얼굴로 묻자 김성국 기자가 대답했다.
“초보 사냥꾼들, 그러니까 총을 쏜 2명 모두 방금 경찰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총탄개조라 뭐라나.”
“역시 2명이네요. 그보다 지금 연행되었다니요? 수술을 시작한 지가…….”
“엄청 오래 지났죠. 경찰들도 아까 도착해 있었고. 그런데 최 선생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던데요?”
김성국 기자의 말에 태수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했다.
“아니, 도대체 왜요?”
“환자가 살아야 이걸 과실치사죄로 적용할지, 아니면 미필적 살인미수인 오발 사고로 적용할지 판단이 선다고요.”
“경찰이 절 안답니까?”
“그 형사 이름이 뭐라더라…… 강, 뭐였는데.”
김성국 기자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였다.
태수는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혹시 강승철 형사님은 아니시죠?”
“맞아. 그러고 보니 강 형사도 최 선생을 알고 있는 거 같던데.”
“근처에 계시는 동문 선배님 소개로 인사한 적이 있습니다.”
태수는 그 지친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핑계를 만들어 냈다. 주미성의 일만큼은 절대 알려지지 않길 바란 마음이었다.
그러나 김성국 기자는 날카로운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의사와 형사, 이렇게 알고 지내기 쉽지 않은데.”
“좀 알고 지낸다고 나쁜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하긴요. 의사도 사고 치고, 형사도 다치니까.”
“그보다 강 형사님이 기다려 주셨네요.”
태수가 원점으로 돌아오자 김성국 기자가 말했다.
“나도 좀 놀랐어요. 보통 형사들 안 그러거든. 전화 한 통 떡 해서 살았어요? 죽었어요? 이런다고요.”
“그러겠죠.”
“좌우간 최 선생이 수술 마치고 나왔다니까 환자 상태는 묻지도 않고 오발 사건으로 조사한다고 하더라고요. 그쪽도 최 선생이 잘 고치는 의사란 소문을 들었나?”
“거기까지 소문났으면 영광이죠.”
“그건 그렇고…….”
김성국 기자는 말끝을 흐리더니 자신의 손에 들린 수첩과 태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눈치에 태수는 인터뷰를 각오했다.
기자들은 워낙 성격이 제멋대로였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 온 좋은 이미지가 180도 바뀔 수도 있었다.
펜의 힘이 그만큼 무섭단 걸 알기에 태수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탁.
김성국 기자가 수첩을 보란 듯이 덮고 주머니에 넣었다.
“인터뷰는 쥐뿔.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이렇게 지친 의사한테 묻긴 뭘 물어.”
“절이라도 할까요?”
“그것도 몸이 좀 회복하면 받기로 하고요. 지금부터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합시다.”
기록하지 않겠다는 건 개인적인 이야기란 뜻이기도 했다.
태수는 오히려 그의 제안에 의아함을 보였다.
“말씀하시죠.”
“사실 수술 지켜보는 내내 난 기사 한 줄도 못 썼어요. 사람 새끼라면 그 필사적인 모습을 보면서 기사를 쓰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런가요?”
“그때, 응급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납디다.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연관도 없는 환자의 보호자가 된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
태수가 조용히 바라보자 김성국 기자가 이어서 말했다.
“아 참, 그 수술받는 사람 진짜 보호자는 지금 졸도해서 응급실에 있습니다.”
“그렇군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보호자가 최 선생 수술을 봤으면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흠흠.”
잠깐 목을 가다듬은 김성국 기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최태수 선생이 의사인 건 축복이라고요.”
“…….”
“진짜 수고했어요. 먼저 갑니다.”
툭툭.
김성국 기자는 가볍게 태수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태수는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길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길이 여기였다.
잠깐이나마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턱.
다시 벽에 머리를 기댄 태수의 얼굴에 복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 하하.”
허탈한 듯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점점 웃음으로 변해 갔다.
“하하하.”
웃음만 흐르는 게 아니라 눈시울도 붉어졌다.
최태수가 의사인 건 축복이다.
그 한 문장이 왜 이렇게 가슴 벅차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격정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선정 간호사를 먼저 바래다준 태수는 숙소 현관에 도착했다.
달달 떨리는 다리로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간 태수는 잠시 멈칫했다.
많이 늦은 시간인데도 집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던 탓이다.
“불 켜 놓고 자나?”
아직 남아 있는 불안감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신발을 털어서 벗어 버린 태수가 신발장을 지나 거실로 향한 순간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주미성이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이제 오세요?”
은은한 미소가 걸린 얼굴은 곱다란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그리고 목소리도 너무나 듣기 좋았다.
그보다 태수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날 기다린 거야?”
“네.”
“그냥 자지 그랬어. 언제 들어올지 알고.”
“연락도 없으셔서 걱정했어요.”
주미성은 대답하면서도 태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마 처음인 것 같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 가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끼익.
옆에서 방문이 열리며 주영수가 나오더니 태수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어요?”
“넌 왜 아직도 안 자?”
“선생님이 안 들어오셨잖아요.”
“…….”
태수는 되려 할 말이 없었다.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가끔 주미성이 지친 태수를 위해 식탁에 빵을 올려 두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면서 맞아 주는 건 처음이다.
이 느낌은 정말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태수도 남자라 그런지 곱고 좋은 말보다는 퉁명스러운 말투가 먼저 튀어나왔다.
“자식들. 때가 되면 자야지.”
“그보다 식사는 하셨어요?”
“그럼, 시간이…….”
꼬르륵.
말과 달리 아우성치는 배에 태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태수가 멋쩍은 표정으로 변하자 주미성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식사 준비할게요.”
그리고 주미성은 돌아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순간 태수와 주영수의 눈이 마주쳤다.
주미성의 저런 모습은 두 남자 모두 처음 보는 탓이었다.
“영수야, 내 귀가 이상하니?”
“전 졸린가 봐요.”
“넌 졸릴 때 됐어.”
“네. 빨리 자야 될 거 같아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주영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주영수가 누나를 두고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커다란 변화 중에 하나였다.
그동안 해준 거라고는 TV 보면서 같이 떠든 것뿐이었다.
그것도 석정현 이사장이 힌트를 줘서 시험적으로 한 일이었다. 그게 이런 효과를 보일지는 태수도 몰랐다.
잠시 서 있는 사이 부엌에서 주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벌써?”
몇 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 이상했다.
하지만 태수는 지친 몸을 이끌어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에 올라온 건 다름 아닌 미군 식량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질리도록 먹은 음식 중에 하나였다.
스물 몇 가지나 되는 각각의 맛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다.
가정식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미군 식량을 준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식탁에 앉은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주미성을 바라봤다.
“…….”
“제가 선생님 입맛을 몰라서요.”
“나 아무거나 잘 먹어.”
태수의 말에 주미성이 멈칫했다.
“그럼 다른 거라도…….”
“아니야. 아무거나 잘 먹는다니까.”
치직.
태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미군 식량을 펼쳤다.
그사이 주미성은 태수가 부담을 가질 거라 생각했는지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
주미성이 막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미성아.”
태수의 부름에 주미성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답을 하지 않았지만 바로 이어서 태수의 말이 들려왔다.
“다음에는 네가 만든 밥을 먹어 보고 싶어.”
“……네.”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한 주미성은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텅.
식탁에서 문소리를 들은 태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미군 식량을 먹기 시작했다.
분명히 질리도록 먹었던 음식인데 맛이 달랐다.
늦은 밤, 자신을 위해 준비해 준 주미성의 정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태수는 깜짝 놀랐다. 해가 중천에 뜨다 못해 조금 있으면 질 시간이었다.
‘환자!’
깜짝 놀란 태수가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시에 옆에 둔 휴대폰을 집어 들고 공우혁에게 전화했다.
“아, 최 선생, 이제 일어났어?”
“너무 퍼 잔 거 같습니다.”
“그렇게 수술하고 안 퍼지면 그게 사람이냐고.”
“그래도 수술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는데요.”
태수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지자 되려 공우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최 선생은 기계가 아니야. 그리고 환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조금 전에 깨어났고, 사고 전후 상황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수술 부위 경과와 바이탈은 어떻습니까?”
“우선 심장은…….”
공우혁은 내과 전문의답게 어떤 증상을 보이고 어떤 조치를 했는지 의학 용어를 곁들여 이야기했다.
“……그런 상황이야.”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그보다 선배는 좀 쉬셨습니까?”
“나야 알아서 잘 쉬지. 당직 근무자와 교대로 쉬고 있으니까 최 선생이나 걱정해.”
“끄응. 그래야겠습니다. 온몸이 쑤시네요.”
그제야 태수가 앓는 소리를 내자 공우혁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느껴졌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안 그래도 우리끼리 이야기를 해 봤는데, 어제 수술한 의사들 모두 주말까지 아예 푹 쉬는 게 좋겠다고 결론이 났어.”
“주말까지요?”
“어차피 당장 수술할 애들도 없잖아. 책임자에게 물었더니 알아서 하라던데.”
“그래도 저희가 모두 빠지면…….”
태수가 얼버무릴 무렵 공우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필요하면 전화할게.”
“그럼 대기하겠……. 선배, 하나 여쭤 봐도 됩니까?”
태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바꿨다.
공우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뭔데?”
“영외로 나가도 되는 겁니까?”
“아, 대전에 다녀오게? 그렇게 해. 중령에게 미리 승인받아 주지. 기왕 쉬는 거면 좋은 사람 만나서 술도 한잔하는 게 좋지.”
“대전이 아니라 강원도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태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래야 비상시 연락할 때 착오가 없는 탓이다.
나름 신중한 부탁인데도 공우혁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전이나 강원도나 여기서는 한 시간 차이잖아. 그 정도는 우리가 버티겠지.”
“그럼 다녀와도 되는 겁니까?”
“마음 놓고 편안하게 다녀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리고 수고하십시오.”
태수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공우혁의 회신은 이내 왔다.
– 잘 쉬다 와. 고생했어.
“좋았어.”
태수가 생각한 곳은 초곡리였다.
수술 중에 이선정 간호사과 흘리듯이 나눈 대화였지만 진심이었다. 조금 지쳐 가는 이때에 초곡리에 가면 뭔가 재충전할 계기가 있음직 싶었다.
허락도 받았겠다, 이젠 이선정 간호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다.
다시 전화를 하려 했지만 목이 따끔따끔하게 아파 왔다. 피곤한 데다 일어나자마자 잠긴 목으로 통화를 했더니 뻑뻑한 느낌이다.
일단 나가서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 할 듯 싶었다.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태수가 비실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호호호. 그래서 전투 식량을 드렸다고?”
“……진짜 뭘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낯익은 목소리들에 시선을 돌려 보자 거실 소파에서 주미성과 이선정 간호사가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