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04
00807 807화
곧 두 사람은 승강기 앞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공우혁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수습할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맞습니다. 이건 수습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갈 수는 없잖아.”
공우혁의 걱정에 태수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부낄 생각은 없습니다. 중심을 잡고 버티고 서 있어야죠.”
“어떻게?”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지 아직 막막합니다.”
태수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다.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갑갑해질 뿐이었다.
그건 옆에 선 공우혁도 마찬가지였다.
태수와 공우혁은 다시 성재경이 기다리는 회의실에 도착했다.
공우혁이 태수에게 말했다.
“나가서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오늘은 머리끝까지 얻어 마셔도 됩니까?”
“술집 술 다 마셔.”
“꼬장도 부릴 거 같은데요.”
“각오했어.”
공우혁이 애써 호탕하게 말하는 사이 태수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끼익.
무심코 안으로 들어가던 태수와 공우혁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매일 아침 컨퍼런스 때처럼 모든 공중보건의들이 자리에 앉아 있던 탓이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몰라.”
태수와 공우혁은 돌처럼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소식을 듣고 온 건지 태수와 공우혁을 보자마자 물어 왔다.
“왔어?”
“왔으니까 보이잖아. 그보다 이야기는 어떻게 됐는데?”
“김 중령, 이 인간을 어찌 해야 하는 거야.”
중간중간 욕설도 들려올 정도로 공중보건의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때 성재경이 다가와 말했다.
“둘이 올라간 후에 한 명씩 들어오더니 어느새 모두 출근했더라고.”
“성 선생이 연락했어?”
“아니. 알아서 들어오던데.”
성재경의 대답이 태수의 귀에 쏙 들어왔다.
그 말인즉, 자신이 걱정되어 왔다는 뜻이다.
쉬는 날에 이렇게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태수는 가슴이 뭉클했다.
암담하기만 하던 앞날에 가느다란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리로 향한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가 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긴 어떻게…….”
“유 선생님이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이선정 간호사가 선수를 쳤다. 태수에게 눈치껏 이야기하란 사인도 숨어 있었다.
그걸 모르는 유병태가 바로 이어서 말했다.
“이런 일에는 이 간호사님이 빠지면 안 되지.”
“그럼요. 역시 유 선생님 센스가 최고라니까요.”
“거봐. 그런데 어떻게 왔냐고 물으면 실례 아니야?”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의 모습에 태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실례했네.”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하고 넘어갈게. 일단 앉아. 앉아서 숨부터 좀 고르라고.”
유병태의 말에 태수는 곧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임진호와 박민철이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회의실이 조용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공중보건의들도 열이 있는 대로 받은 상태였다. 몇몇 공중보건의들은 얼굴까지 벌게진 모습이다.
그사이 단상에 선 공우혁이 말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로 이 시간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우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비난이 들려왔다.
“공 선생,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와야 되는 거 아니냐고.”
모두의 원성이 들려왔지만 공우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좌우간 일단 상황은 모두 아실 거 같고, 최 선생의 의견부터 들으셔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태수도 예상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향한 격려와 위로의 시선들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태수는 그런 공중보건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저 때문에 바쁜 일을 저치고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부터 건넸다.
다들 그 인사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태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수는 그런 그들에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런 난치병 건은 상황상 피해 갈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럼 진짜 하겠다고?”
“이거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
공중보건의들은 태수의 미래를 걱정했다.
지금 군병원에서 군 관계자들이 다가오지 않는 건 순전히 태수 덕이었다. 그런 태수에게 타격이 가는 일이기에 더더욱 반기지 않았다.
태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정정 기사를 내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문제?”
“우선 불우한 아이들을 수술하는 이 일이 여기서 끝날 수 있습니다.”
“음.”
그건 옳은 말이었다.
보건복지부와 국방부가 합동해서 진행하는 이 일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정작 큰일에서 발을 빼면 국민들이 외면할 것이고, 이 지원 사업은 당연히 끝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여러분들은 언론의 집중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최 선생이 담당 의사라고 해도 우리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가 되자 태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런 비난보다 두려운 건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피하면 누구도 자신들을 치료해 주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느낄 겁니다.”
그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격한 공감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건 그렇지. 신문을 보고 아이들도 희망을 가질 텐데.”
“아이들이 뭐라 하겠어. 거부하면 의사를 얼마나 속물이라고 생각할 거냐 이거야.”
“이거 결국은 최 선생 말대로 어떻게 되었든 진행이 되어야 할 일이라는 거네.”
그런 이야기가 계속됐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다시 회의실에 침묵이 찾아오자 태수가 말했다.
“많은 아이들을 수술할 순 없을 겁니다. 한 번에 한 명 내지 두 명, 그렇게 적은 인원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확인하고, 수술을 계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그렇게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의 아이들입니다. 솔직히 저 혼자는 감히 엄두가 안 납니다.”
“…….”
공중보건의들이 침묵하자 태수는 진중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여기 계시는 분들에게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걸 쏟아 보면 안 될까요?”
태수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꺼냈다.
공중보건의들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태수의 말은 그 어떤 것도 틀리지 않았다.
모든 게 사실이었고, 진심이었다.
그걸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다들 복잡한지 대답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스윽.
유병태가 천천히 손을 들며 크게 말했다.
“전 할 겁니다.”
“…….”
“어차피 수술팀이라고 해 봐야 최 선생이 집도, 제가 어시스던트 들어가면 되는 문제 아닙니까. 그럼 다른 분들은 좀 자유로우실 수 있을 겁니다.”
유병태의 말에 공우혁이 물었다.
“유 선생이 최 선생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거야?”
“못할 거 뭐 있습니까. 피 터지게 공부해서 취득한 의사 자격증이 위험하다고요? 그 전에 왜 의사가 됐는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
“저도 돈 벌고 떵떵거리며 살려고 눈물 콧물 빼 가면서 의사 됐는데요. 최소한 아픈 사람을 외면하면서까지 돈 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유병태의 다소 도발적인 말에 공우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데 유 선생은 내과 쪽도 케어할 수 있어?”
“……그건 아니죠.”
그때였다.
흉부외과 소속 조현민이 유병태에게 물었다.
“그럼 유 선생은 흉부외과 수술도 어시스던트할 수 있나?”
“힘들겠죠.”
그 말이 시작이었다.
“정형외과는?”
“신경외과는? 최 선생도 신경외과는 못한다며.”
“내과뿐이야? 소화기내과도 있어.”
“우리 순환기내과는 폼인 줄 알아?”
다들 한마디씩 하자 유병태가 얼른 두 손을 들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고요. 제가 어떻게 그걸 다 합니까.”
유병태의 항복에 다른 공중보건의들이 날카로운 눈빛을 거뒀다.
“다 하지도 못할 거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때 공우혁이 장내를 정리했다.
“그렇게 따지는 건 이제 그만하기로 하고요. 결정들은 내리셨습니까?”
공우혁이 묻자 조현민이 손을 들었다.
“저는 할 겁니다.”
“저도요.”
쑥쑥.
마치 봄날 새순이 돋아나듯이 여기저기에서 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손을 들지 않은 몇몇 공중보건의들도 있었다.
그중 태수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공중보건의, 이기준은 딴청 피우는 얼굴이었다. 그 외에 손을 들지 않은 공중보건의들은 평소에 이기준과 같이 몰려다니던 이들이었다.
모두가 따가운 시선으로 보든지 말든지 그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기준이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어 변명에 나섰다.
“저도 최 선생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도와줄 겁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쪽으로만 쏠려 있다면 2차로 선별된 불우 아이들 수술은 누가 담당합니까? 전 그 점이 염려되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 선생, 조금 전에 최 선생이 한두 명씩만 수술한다고 했는데요. 그럼 그렇게 경계를 그어 놓을 필요가 있을까요?”
공우혁이 이치에 맞게 따져 묻자 이기준의 얼굴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러나 다시금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온 이기준은 이내 손을 들었다.
“그 부분은 제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저도 참가합니다.”
“저도 하겠습니다.”
나머지 의사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손을 들어야 했다.
태수는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어떤 유능한 인재들이라도 이번 일에는 참가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잠깐의 소란이 있었지만 모든 공중보건의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패기만만한 젊은 공중보건의들이 대부분이라 그런지 결정이 나니 이후의 일들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그다음 순서는 역시 처음으로 수술할 아이를 선별하는 일이었다.
선별 대상인 아이들의 정보가 복사되어 각각 공중보건의들에게 전달되었다.
이건 김용철 중령이 준비한 것이다.
그럴싸한 서류를 만들려면 아이들을 무턱대고 수술한다고 할 수 없었다.
몇몇 아이들의 증상을 정확하게 기재해야 했는데, 그로 인해서 총 10명의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신상 명세와 병원 기록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서류가 이 상황에서는 요긴하게 쓰였다. 하지만 김용철 중령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공중보건의는 아무도 없었다.
공중보건의들은 전과 같이 우선적으로 아이들의 증상에 대해 각 의과별로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전 의과가 함께 컨퍼런스를 이어 갔다.
“이 아이의 경우에는…….”
“그 증상이 위험하고 안쓰럽지만, 이 아이가 먼저…….”
“그 아이는 생활적인 부분부터 관리를 해야…….”
“잠깐의 방심이 우선순위를 바꿀…….”
의학적인 토론보다 누구를 먼저 수술 대상으로 선정할지 고민했다.
그때 한 공중보건의의 한탄이 들렸다.
“미치겠네. 누구 하나 편한……”
차마 뒷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다들 같은 심정이다.
난치병 아이들.
누구 하나 심각하지 않은 아이가 없는 탓이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이라면 선별된 아이들은 당장 생명이 위급한 증상이 없단 점이다.
물론 수술에 들어가면 상황은 백팔십도로 달라진다.
그렇다고 안한다면?
시한부 생명이거나 평생 고통속에 살아야 한다.
공중보건의 얼굴들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