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08
00811 811화
그 표정을 본 태수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는 김석준 국장은 이 일에 정말 무관하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
흥분도 잠시, 오랜 공무원 경험, 특히 국장이란 자리가 자리인 만큼 김석준 국장은 표정 관리도 빨랐다.
그는 이내 차분해진 얼굴로 태수에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일단 이 일은 없던 걸로 하시죠. 최 선생님과 공중보건의들로 향할 비난은 제가 모두 감수하겠습니다.”
“그럼 애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그 부분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김석준 국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태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난치병이라는 게 의욕만으로 치료가 되는 병이 아니니까요.”
“그 말씀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그래서 여쭙는 겁니다. 저희가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아니요. 아마 없던 일이 될 겁니다.”
김석준 국장의 말을 듣는 순간 태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결국 진행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네요.”
“전 반대입니다. 최 선생님은 이제 막 유명해지고 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난치병 수술에 실패한다면 돌이키기 힘든 결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인기, 명예, 물론 중요하죠. 남자로서 세상에 이름 한 번 날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명예와 인기는 다시 잡을 기회가 오겠지만, 그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태수가 침착하게 말하자 김석준 국장은 조금 갑갑하단 얼굴로 말했다.
“자그마한 실수가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백번 잘 해도 한 번의 실패에 비난의 목소리가 커질 겁니다.”
“제가 아는 의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의사란 직업은 칭찬만 듣기 힘든 직업입니다.”
“…….”
“정말 자신 좋은 일만 하면 그건 의사가 아니라 장사꾼 소리 듣는 지름길이죠.”
태수의 목소리는 조용조용했지만 패기가 물씬 묻어났다.
그런 태수를 바라보며 김석준 국장이 한 번 더 물었다.
“제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이라 마지막으로 권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감내할 테니까 없던 일로 하시죠.”
“뭐라고 변명하실 겁니까?”
“할 말은 많습니다. 이런 경우엔 예산이 부족하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최태수와 공중보건의들은 하려 했지만 재정상 없던 일이 되었다. 이 정도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김석준 국장의 말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진짜 솔깃한 제안이네요. 그렇게만 된다면 누구도 저와 공중보건의들을 비난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런 언론 플레이는 저희가 전문입니다. 그러니까…….”
“하지만 기대하는 아이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성패를 떠나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날려 버리면 그 녀석들에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태수는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김석준 국장을 향한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고 해맑은 미소도 여전했다.
절대 번복하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한 김석준 국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것도 잠시였다.
번뜩.
다시 눈을 뜬 그는 바짝 살아난 눈빛으로 태수에게 말했다.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전 아직 경험도 실력도 미천합니다. 그러니까 수술을 집도해 주실 의사를 추천해 주실 수 있습니까? 대신 어시스던트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알아보겠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태수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석준 국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일단은 두드려 봐야죠. 우선 한국에 있는 모든 병원에 협조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보건복지부라는 이름을 걸면 쉽게 무시하진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태수가 말끝을 흐리자 김석준 국장이 얼른 물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실은 미국을 좀 다녀왔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태수는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따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김석준 국장이 크게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특별 케이스입니다. 거기에 어렵사리 추천이 되었고요.”
“그러시다면 가셔야죠. 그 일은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출발 준비 하셔도 됩니다.”
“일정에 여유가 좀 있어야 하는데요.”
“그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석준 국장은 시원하게 대답해 줬다.
너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자 태수가 외려 미안했다.
“제가 너무 부담을 드리는 거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요. 다 떠나서 아버님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저희 식구들은 행복합니다.”
“…….”
“그 행복을 다시 느끼고 더 깊게 만들어 주신 분의 부탁입니다. 게다가 좋은 일 아닙니까?
안 할 이유가 없네요.”
김석준 국장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서려 있기에 태수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몇 마디 대화가 오간 후 자리에서 일어난 김석준 국장이 말했다.
“오늘은 아무런 생각 마시고 쉬십시오. 결과는 최대한 빨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지요. 다음에 웃으면서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김석준 국장이 손을 내밀자 태수가 가볍게 잡았다.
따스한 손이다.
태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악수를 마친 김석준 국장은 잰걸음으로 앞에 대기 중인 대형차 뒷좌석에 올랐다.
부웅.
이내 대형차가 멀어져 가자 태수는 다시 야외 테이블에 자리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의 진행이었다.
이전에는 군병원장을 통해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 미국행이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았다.
일이 잘 풀리려나?
태수는 천천히 하늘을 바라봤다.
곧 미국으로 떠날 날이 다가올 터였다.
그 생각 때문인지 카프레네의 얼굴이 저 멀리 하늘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곧 갑니다.”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증.
의미가 특별하다.
다른 누구보다 태수에게 깊은 의미가 담긴 자격증이다.
저녁 무렵.
군병원 근처에서 가장 커다란 식당에는 오늘따라 공중보건의들이 가득했다.
처음 만나서 친목을 다질 때와 같은 식당이다. 식당 2층을 전세 냈는지 공중보건의들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공우혁이 기세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주목.”
땡땡.
빈 병을 가볍게 치며 알리자 소란스럽던 2층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공우혁이 크게 말했다.
“오늘은 어떤 생각도 하지 마시고 마음껏 즐기셔도 됩니다.”
그 소리에 어떤 공중보건의가 짓궂게 말했다.
“이 술고래들이 얼마나 마실 줄 알고요!”
“으하하!”
다들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공우혁도 같이 웃으며 말했다.
“보건복지부에서 알아서 해 준다니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그럼 진짜 허리띠 풉니다.”
“허리띠뿐 아니라 목 단추도 충분히 풀어 두세요. 자, 그럼,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우혁이 크게 외치자 공중보건의들도 따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쨍쨍!
사방에서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본격적인 식사 및 음주가 시작되었다.
한 자리에서 얌전히 마시는 공중보건의도 있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을 권하는 공중보건의도 있었다.
그렇게 북적북적한 모습에도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공중보건의들도 지금은 의사가 아니라 또래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정말 소탈하게 먹고 마셨다.
그런 식당 한 곳에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자리했다.
“최 선생, 한 잔 받아야지.”
“아이고, 이 간호사님, 잔이 비셨네.”
사방에서 권하는 술을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빼지 않고 받고 따랐다.
잠깐 사이에 폭음을 해서 그런지 술고래인 태수도 알딸딸할 정도였다.
그나마 그는 양호한 편이었다. 상대적으로 주량이 약한 이선정 간호사는 이미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이선정 간호사는 얼른 술잔에 물을 부어 놓고 태수에게 투덜거렸다.
“요즘 대학생들도 저렇게 안 마셔요.”
“그 대학생들이 의사가 되면 아마 더 마실 겁니다.”
“나도 기쁘고 다들 고생한 건 아는데, 좀 적당히 따라 주시지.”
이선정 간호사가 싫지 않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 유병태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뻘건 얼굴로 방실방실 미소를 지었다.
“제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잔들 비우시고.”
“지금 저 술 따라 주시려고 오신 건 아니죠?”
이선정 간호사가 살짝 노려봤지만 유병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요. 당연히 고생하신 우리 이 간호사님에게……. 왜 때려? 좀 가만히 있어 봐.”
유병태가 허벅지를 때리는 태수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나 태수는 더욱 차지게 때리며 유병태를 만류했다.
“야, 아니야. 지금은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이 간호사님한테 한 잔 드릴 의무가 있는 놈이란 말이다.”
“너 취했어. 그만하라고.”
“그럼 취했지. 이렇게 퍼 마시고 안 취하면 그게 사람이냐.”
유병태는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태수를 밀어냈다.
그러자 이선정 간호사가 눈빛을 번뜩이며 유병태에게 물었다.
“저 한 잔 따라 주시면 열 잔 드셔야 하는데.”
“그럼 전 또 열 잔 따라 드리죠.”
“그럼 백 잔인데?”
“이 간호사님이 따라 주시는 거라면 배가 터져도 마셔야죠.”
“좋아요. 한번 해 봐요.”
이선정 간호사가 체념한 말투로 응대했다. 이미 눈빛도 전투적으로 돌변했다.
태수는 그런 이선정 간호사를 외면했다. 저럴 때는 말려 봐야 소용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선정 간호사도 뒷감당 생각 안 하고 독하게 마시면 태수 못지않았다.
‘병태야, 안녕.’
속으로 인사를 한 태수는 불똥이 튀지 않게 슬쩍 자리를 피했다.
이후 태수는 몇몇 공중보건의들에게 술을 받으며 창가 자리로 옮겨 왔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북적거렸기에 상대적으로 한가해진 자리였다.
태수가 여유롭게 고기를 구울 때였다.
“자리 있어?”
반대편에서 물어 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자 이기준의 얼굴이 보였다.
“주인 없는 거 같은데.”
“그럼 실례.”
이기준이 자리에 앉아 불판을 내려다봤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술병을 들어 이기준에게 내밀었다.
“우리도 한 잔 마셔야지.”
“그래야지.”
서로 잔을 채우고 한 잔 쭉 마신 후였다.
이기준이 태수에게 먼저 물었다.
“나한테 섭섭한 거 없어?”
“없어.”
“그럼 다행이고.”
오가는 말은 짧고 침묵은 길었다.
다시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이기준이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건데?”
“뭘?”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증.”
“방법이 생기겠지.”
태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기준에게 자세하게 설명할 기분은 아니었다.
이기준도 별다른 표정을 보이진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앞에는 불판이 아닌 천 길 낭떠러지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인턴 동기.
물론 소중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다.
제임스 박사에게 받은 영향 중 하나였다.
다음 날.
태수는 머리가 깨지는 고통을 느끼며 일어났다.
“으으으.”
머리를 부여잡은 태수는 방을 나가 냉장고로 향했다.
물을 꺼내 들 때였다. 주미성의 방문이 열리더니 이선정 간호사가 헝클어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물, 저도 물.”
태수의 손에 있는 물병을 낚아챈 이선정 간호사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태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저도 몰라요.”
“제가 분명히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저도 제 방으로 들어와……. 참 나.”
기억을 떠올리던 태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선정 간호사도 익숙한 집이라 주미성의 방을 찾아 들어간 것 같았다.
얼마나 마셨는지 집에 찾아 들어온 것만 해도 용한 일이었다.
우선 갈증부터 해결한 후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거실에 드러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