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50
00853 853화
태수도 시간 끌지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제임스. 어디십니까?”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한데, 일어나 있었나?”
“지금 막 SICU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태수의 말에 제임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니, 태수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목소리를 냈다.
“환자 경과는?”
“체온은 안정적이고…….”
태수는 방금 확인한 리카르도의 상태를 최대한 정확하게 제임스에게 알렸다. 그러자 곧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별한 이상은 없을 거 같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이쪽으로 넘어오지. 존스홉킨스 병원 대각선 블록에 있는 노천카페야.”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태수는 정중히 통화를 마치자마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존스홉킨스 대학병원 옆 블록 노천카페에 태수와 제임스가 자리해 있었다.
가볍게 식사를 마치자 테이블에는 커피가 놓였다.
“하암.”
태수가 고개 돌려 하품을 하자 제임스가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밥을 먹었더니 노곤한가? 역시 환자 때문에 너무 일찍 일어난 모양이야.”
“그건 아니고, 그냥 눈이 떠졌습니다.”
“그렇게 긴 수술을 마치고 몇 시간 안 잤는데 눈이 떠졌다라.”
제임스는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태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탓이다.
태수도 사실대로 이야기해 봐야 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것 같아서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흠흠. 어쨌든 그렇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큰 수술이다 보니 신경이 많이 쓰였겠지.”
“그것도 그렇고, 전문의 자격증 취득한 게 너무 기뻤던 거 같습니다.”
태수는 대화 중에 슬쩍 사실을 얹었다.
제임스도 그제야 말을 돌렸다.
“학수고대하던 일이니 그만큼 기쁨도 컸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리가 있나. 닥터 최에게 흉부외과란 카프레네일 텐데.”
이래서 살아온 연륜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듯 싶었다.
제임스가 콕 집어서 말하자 태수는 순순히 수긍했다.
“말씀대로입니다.”
“그럼 하나 묻지. 만약 이번 기회가 없었다면 어떻게 했겠나?”
“시간이 더 필요했겠지만 결국 자격증을 취득했을 겁니다.”
“그 친구가 이 말을 직접 들었어야 했는데.”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태수가 대답하자 제임스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빠질 수 없는 게 카프레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나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침묵했다.
무거워진 마음으로 태수가 반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 할 무렵, 제임스는 가만히 바라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요.”
“사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닥터 최가 수술한 영상을 확인했어.”
“제 수술 영상을요?”
태수는 제임스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탓이다.
제임스는 그런 태수의 놀라움에도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수술 영상을 보면서 의문점이 들더군.”
“말씀하십시오.”
“T형 바치스타 수술법, 어떻게 알았지?”
“그거야 당연히…….”
태수가 대답하려는 사이 제임스가 손을 내밀며 질문을 바꿨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질문이니까 바꾸지. 어떻게 그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지?”
“…….”
“내가 닥터 최 앞에서 그 수술을 한 건 기억해. 하지만 한 번 본 수술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한다면, 그건 믿지 못하겠어.”
제임스는 아예 태수가 댈 핑계를 예상하고 사전에 차단했다.
태수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카프레네의 기억을 토대로 진행한 수술법이었다.
성공에 확신을 두고 수술을 진행했고, 결과도 좋았다. 하지만 제임스가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제임스가 나타날 걸 알았다고 해도 T형 바치스타 수술법을 그대로 밀고 나갔을 터였다.
환자에게 최선의 수술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하면 됐다.
그런데.
문제는 제임스의 말대로 한 번 본 수술을 따라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던 일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줄줄 말할 수 없는 일이기에 빠르게 머리를 굴려 다른 핑계를 만들어 냈다.
“기억하시죠, 제가 초곡리에 있을 때 카프레네 박사님과 제임스의 임상 기록을 보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걸 정말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태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임스가 고개를 저었다.
“변명치고는 상당히 빈약해. 이론상으로 공부해서 그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다면 임상 경험이라는 말은 사라질 테니까 말이야.”
“…….”
“닥터 최, 우리의 신뢰가 여기서 깨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탁.
제임스는 테이블에 양손을 올려놓고 태수를 향해 바짝 몸을 내밀었다.
이번 대답만큼은 무조건 들어야겠단 표현이었다.
태수도 그걸 알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사실대로 털어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태수는 말할 수 없었다.
우선 누구라도 쉽게, 아니 당연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성격이었다. 그런 제임스에게 그 이야기를 해 봐야 얼마나 이해를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었다.
태수는 제임스와 관계가 틀어지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리던 그는 문득 좋은 핑곗거리가 떠올랐다.
“사실 T형 바치스타 수술에 대한 집도 경험이 있습니다.”
“경험이 있다?”
“네. 신속대응센터에서 응급상황시 어쩔수없이 적합한 케이스의 환자들에게 몇 번 수술해 봤습니다.”
태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양심에 찔렸지만 지금은 밝힐 수 없어 그래야만 했다.
제임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말했다.
“신속대응센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카프레네와 매우 흡사한 그 손놀림은 뭐라 말할 거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태수가 반문하자 제임스는 더욱 예리하게 물어 왔다.
“T형 바치스타 수술을 할 때 닥터 최의 손놀림은 카프레네와 비슷, 아니 똑같았어. 다른 의사들은 몰라도 나와 스미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건…….”
“그건?”
제임스가 독촉하자 태수는 아찔함을 느꼈다.
제임스뿐만이 아니라 스미스도 의심하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카프레네의 수술 습관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핑계에 또 하나의 핑계를 더해야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1년 가까이 치프 생활을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억해.”
“상당히 농땡이 부렸다고 말씀드린 것도 기억하십니까?”
“물론.”
제임스의 기억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흘려들을 수 있는 말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의심을 보이는 점도 이해가 되었다.
기억력 좋다고 감탄만 할 게 아니라 변명부터 풀어놔야 했다.
“그 1년 동안 사실 카프레네의 의술에 대해 깊게 공부했습니다.”
“음, 계속해.”
“한국의 외과 전문의 준비도 해야 했지만, 사실 아시다시피 저와 카프레네의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제임스도 그 부분은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덕에 태수도 다음 이야기를 이어 가는 데 죄책감이 덜했다.
“카슈미르에 있는 2년 동안 지식보다 실전으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계적인 부분이 부족하다고 느꼈고요.”
“음.”
“그래서 한국에 있는 카프레네의 모든 저서를 수집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들은 지금 모두 정민수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사실이기에 태수는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다.
사실과 거짓이 적절하게 조화된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태수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기도 했다.
‘더는……. 죄송합니다.’
말할 수 없어 눈빛으로만 미안함을 보내야 했다.
제임스는 그런 태수를 잠시 빤히 바라봤다.
모든 걸 꿰뚫을 것 같은 투명한 눈빛이었다. 마주하고 있는 태수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눈빛을 마주했다.
이내 제임스의 입이 열렸다.
“믿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카프레네의 수술법은 많이 연구했나?”
“사실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만, 제임스가 보내 주신 임상 기록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지금도 연구 중이고요.”
그건 사실이었기에 태수는 휴대폰에 정리된 임상 기록 자료를 내보였다.
슬쩍 훑어본 제임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아보지 못하게 핵심 단어들을 꼬아서 적어 놓은 거 같은데.”
“누가 보면 어쩝니까. 이건 절대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왜?”
“남 좋은 일 시킬 만큼 제가 마음이 넓진 않아서요.”
태수가 욕심을 내보였지만 제임스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욕심을 부리고 싶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
“저한테는 이겁니다. 하하.”
태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사이 궁금증이 풀린 제임스는 원래의 그윽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나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나?”
“제임스…… 에 대한 연구요?”
“혹시 흉부외과 쪽만 생각하고 외과를 게을리하는 건 아니겠지?”
약간은 기대 어린 제임스의 눈빛을 본 태수가 호탕하게 대답했다.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난 눈앞에서 본 걸 제일 신뢰하지. 닥터 최가 공부했다면 공부를 한 거지만, 성과는 눈으로 확인해야 확실해지는 거 아니겠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제가 갑자기 환자를 찾아서 수술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고요.”
태수가 난감한 표정을 보일 때였다.
제임스는 걸려들었다는 듯이 진한 눈빛으로 태수에게 말했다.
“마침 내가 여기로 올 때 환자 한 명을 데리고 왔네만.”
“제임스가 데려온 환자면 직접 수술하셔야죠.”
“나도 물론 그럴 예정이었는데……. 닥터 최에게만 솔직하게 말하지. 체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가고 있어.”
제임스의 말에 태수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나이가 몇인데.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 가는 걸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때지.”
“다른 의사는 몰라도 제임스는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왜?”
제임스가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태수는 굳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에게 제임스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습니까. 그렇게 약한 말씀을 하시면 전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다고 흘러가는 세월을 막아 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방법이 있겠죠.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억지로 시간을 벌어도 결국 끝은 찾아와. 죽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제임스의 마지막 말이 태수의 가슴을 후볐다.
카프레네는 허망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제임스와의 시간은 끝이 다가온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어떤 말도 쉽게 내뱉을 수 없게 했다.
침묵하는 태수를 바라보며 제임스는 외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좌우간 당장 일선에서 손을 뗄 생각은 없으니까 시한부 선고 받은 노인네 바라보듯이 할 필요는 없어.”
“…….”
“괜찮다니깐.”
제임스가 다소 강하게 말했다.
태수는 그제야 얼른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이상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면 제임스를 더욱 슬프게 할 상황이다.
태수는 일단 꽉 막힌 목부터 풀어냈다.
“흠흠. 그래서 저에게 수술을 맡기시겠다고요?”
“그래. 그런데 내가 닥터 최에게 챙겨 줄 수술비는 전혀 없는데, 어쩌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섭섭합니다.”
“그래도 미 동부권 병원들의 외과장들 시선을 빼앗은 유망주를 공짜로 부려 먹긴 좀 그런데.”
제임스가 슬쩍 말하자 태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럼 어시스던트라도 들어와 주십시오.”
“내가?”
“미래가 창창한 유망주라서 제임스 정도 되는 의사가 어시스던트해 주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태수가 넉살을 잔뜩 부리자 제임스가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