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52
00855 855화
한국에서 자격증이 없어서 간병인 생활을 했다지만, 수술실에서 김혁권은 정말 날아다닐 정도였다.
혹독한 주변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전한 실력이지만, 김혁권 나름대로 흥미를 느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취득 기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 게 의아했다.
그때 김혁권이 같이 흥분했다.
“나도 그거 때문에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알아요?”
“무슨…….”
“말도 마요. 그냥 결과만 보라고.”
생각하기도 싫은지 김혁권은 질색했다.
저렇게 싫어하는데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난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제한된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태수와 김혁권은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다.
나머지는 술 한잔 기울이면서 하는 걸로 미루고 두 사람은 소회의실로 돌아왔다.
그 둘의 밝은 얼굴을 확인한 제임스가 말했다.
“급한 이야기는 거의 끝낸 거 같은 얼굴들이야.”
“배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수가 제임스에게 한 번, 그리고 의료진들에게 또 한 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보통 서양인들에게는 낯선 인사법이지만 이들에겐 익숙한 모습이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태수와 김혁권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태수의 옆에는 브레드 김이 자리한 상태였다.
브레드 김은 긴말하지 않고 주먹을 슬쩍 내밀었다.
탁.
태수가 가볍게 부딪치며 찡긋거리자 브레드 김도 똑같은 표정을 보였다.
짧고 간결한 인사만 나누고 남은 이야기는 나중을 기약해야 했다.
그 후 태수는 이작손과 간호사들과도 눈인사를 한 번 더 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제임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제 시작해도 되나?”
“물론입니다.”
“그래,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환자와 수술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브레드.”
제임스의 부름에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브레드 김이 단상에 준비해 놓은 노트북으로 향했다.
팟!
노트북을 작동하자 빔 프로젝터가 하얀 벽에 강한 빛을 쏘아 냈다.
그 빛은 검사 결과들을 그림으로 만들어 냈다.
“우선 환자의 상태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보시다시피 만성신부전을 앓고 있으며, 양쪽 신장의 가동률은 대략…….”
브레드 김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귀를 열고 경청하던 태수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경우, 보통 환자의 이름과 나이를 먼저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는 지역, 혹은 어느 나라인지라도 알려 준다.
보통은 같은 나라 환자를 수술하기에 그런 이야기가 오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NGO에서 봉사를 나간 나라는 수도 없이 많았고, 그에 따른 병의 원인이 다르기에 나라를 밝히는 걸 원칙으로 했다.
게다가 나이.
그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환자의 연령대에 따라 사용되는 약이 다르고, 수술에 필요한 세부적인 도구들이 변화할 수 있던 탓이다.
그러나 브레드 김은 끝까지 그 이야기를 숨기고 증상만 이야기했다.
“……여기까지입니다.”
브레드 김의 말이 끝나자 제임스가 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닥터 최, 수술은 큰 문제 없겠지?”
“환자의 히스토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 수술을 합니까?”
“그건 알려 주는 것보다 직접 만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야.”
제임스의 말에 태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혹시 제가 아는 분입니까?”
“만나 보면 알겠지.”
“그래도 환자의 성별과 나이는 알려 주십시오.”
태수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제임스는 김혁권을 바라봤다.
“어떻게 되지?”
“나이는 60대 중반이고, 남자 환자입니다.”
김혁권은 다소 반항적인 평소 말투가 아니라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언제나 신중하게.
그게 이들의 대화 방법이기도 했다.
태수도 알기에 이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60대 중반.
만성신부전증으로 왼쪽 신장은 대략 50퍼센트 정도 손상되었고, 오른쪽 신장은 85퍼센트 가량 손상되었다고 했다.
당연히 오른쪽 신장을 이식할 계획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태수의 시선이 검사 영상이 떠오른 소회의장 벽으로 향했다.
오른쪽 신장에 집중된 CT와 MRI 영상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태수는 그 영상을 뚫어져라 확인했다.
소회의실 내부는 곧 조용해졌다. 아니, 고요할 정도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다들 태수가 확인하는 순간을 침묵으로 배려했다.
그건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병원에서도 그렇지만 특히나 NGO는 집도의에 대한 배려가 깊다.
나이와 직위도 이 순간만큼은 벗어던진 채 각자 한 사람의 의료진으로 변했다.
가장 권위 있고 인지도가 높은 제임스가 만든 시스템이기도 했다.
태수는 그런 고요함 가운데 수술 과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다.
신장이식.
단순히 기존 신장을 제거하고 새로운 신장을 연결하는 수술이 아니었다.
기존 신장을 남겨 둔 채 그 아래쪽에 기증받은 신장을 추가로 연결하는 수술이었다.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다?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환자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 판단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태수는 문득 생각난 걸 제임스에게 물었다.
“이식할 신장은 준비된 겁니까?”
“앞으로 3일 후에 날아올 예정이야. deceased donor transplantation(뇌사자 신장이식)으로 진행될 거고.”
“음.”
“전쟁 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뇌사자가 된 경우지. 그 가족이 어려운 결정을 내려 준 거고.”
제임스가 추가로 이야기하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인 나라에서는 흔하게 발생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그렇다고 익숙해질 순 없었다.
한쪽 가슴이 아린 건 태수도 어쩔 수 없었다.
잔인한 말이겠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 생각만 하기로 했다.
“그럼 공여자(장기를 기증할 사람)과 수혜자(장기를 기증받을 사람)은 같은 나라 사람입니까?”
“같은 아시아 지역이지만 나라나 환경은 달라.”
“우선 신장이 도착하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검사 후 안정적인 수준인지부터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건 닥터 최가 알아서 해. 이 병원에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확인만 되면 바로 수술에 들어가고, 급성면역거부반응을 지켜보는 걸로 하겠습니다.”
태수는 수술에 큰 무리가 없을 거 같은 직감이 들었지만 한 번 더 확인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 그럼 질문?”
“없습니다.”
“좋아.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널스 김이 닥터 최를 안내해서 환자에게 데려가도록.”
널스 김.
간호사가 된 김혁권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김혁권은 바로 대답하며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닥터 최, 갑시다.”
“그러시죠.”
태수는 이들이 꽁꽁 숨기고 알려 주지 않은 환자를 볼 수 있단 사실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회의실을 나선 태수는 김혁권과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김혁권이 태수를 바라보며 슬쩍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요. 심장에 안 좋으니까.”
“도대체 누군데 이러시는 겁니까?”
“보면 알지.”
김혁권은 그렇게 말하고 태수보다 한 걸음 더 앞서 걸었다.
태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잠시 후, 김혁권은 태수를 어느 병실 앞으로 안내했다.
“여깁니다.”
드르륵.
김혁권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태수도 이내 몸을 움직였다.
병실에 들어서자 창문 쪽으로 배치된 병상이 보였고, 그 옆에는 이동식 혈액 투석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만성신부전 환자에게는 필수적인 의료기기였다.
탁해진 피를 신장이 걸러 주는데, 만성신부전 환자는 그 기능이 현격히 떨어진다. 그 탁해진 피를 대신 깨끗하게 걸러 주는 게 바로 혈액 투석기였다.
태수는 혈액 투석기를 뒤로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를 바라봤다.
그 순간 태수의 눈빛이 급격히 떨렸다.
홀쭉하다 못해 가죽을 씌워 놓은 듯이 마른 얼굴.
그 때문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고, 턱 선은 날카로울 정도로 뾰족했다.
이불이 덮여 있는 몸도 얼마나 말랐는지 갈비뼈 모양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태수가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라…… 함?”
정확한 이름은 압둘라함.
태수가 파견 나갔던 카슈미르의 첫 마을, 이잠바크의 마을 촌장이었다.
태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라함이 스르륵 눈을 떴다. 퀭한 눈으로 태수를 확인한 그의 눈빛이 급속도로 떨렸다.
라함의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
인도어였다.
태수도 너무 많이 들어 본 말이라 그 뜻을 익히 알고 있었다.
“신이시여.”
라함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려 왔다.
태수도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출렁이는 마음을 애써 달래며 겨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라함은 불분명한 영어 발음으로 대답했다.
“이제 나이를 먹었다는 거겠죠.”
“그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몇 년 사이에 몸이 이렇게 안 좋아질 수 있습니까?”
“어쩌면 다시 닥터 최를 만나게 해 주시려 시련을 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함은 그 모든 탓을 하늘에 돌렸다.
이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하다는 건 태수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인정할 순 없었다.
“어떤 신이 자신을 믿는 사람을 아프게 한답니까?”
“과정은 힘들었지만 이렇게 만났으면 된 겁니다.”
“무슨…….”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아요.”
라함은 기운 없는 얼굴로도 인자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이잠바크에서 보았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태수는 그 미소를 보고선 더 따질 수가 없었다.
제임스와 스텝들이 왜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가 라함이라는 걸 알았다면 태수는 감정에 흔들렸을 터였다.
병을 대하는 데 그만큼 미련한 짓은 없었다.
미연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병을 냉정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환자에 대해 전혀 알려 주지 않았던 겁니까?”
태수가 김혁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김혁권도 할 말이 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오늘 아침에 알았어요.”
“네?”
“난 오늘 아침에 합류했다니까. 오자마자 환자부터 보라고 해서 왔더니 이 노인네가 이렇게 누워 있잖아요.”
김혁권은 라함이 듣고 있음에도 거침없이 영어로 이야기했다.
라함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해도 듣는 건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혁권의 말에는 악의 없는 짜증이 가득했다.
그게 그의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라함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태수는 그런 김혁권에게 물었다.
“그럼 아예 모르셨다는 겁니까?”
“모르다 뿐이에요? 카슈미르에 있어야 할 사람이 내 앞에 있는데 얼마나 놀랐는데요.”
“일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요.”
태수는 김혁권을 향한 시선을 다시 라함에게로 돌렸다.
“불편하시면 인도어로 말씀하세요. 공짜 통역사가 옆에 지키고 서 있으니까요.”
“좌우간 닥터 최만큼 날 부려 먹을 사람은 이 세상에 둘도 없다니까.”
김혁권이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태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건 라함도 마찬가지인지 인도어로 뭐라고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영어가 되지만 다양한 어휘를 구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화를 원활하게 이어 가려면 김혁권의 통역 실력을 빌리는 게 좋았다.
라함의 이야기를 듣던 김혁권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태수가 궁금해하는 사이 김혁권이 라함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닥터 최가 떠난 후로 이잠바크는 정말 많이 안정됐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 군부에서 불가침 지역으로 선포했다고 하고요.”
“그렇군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NGO 의료진들이 방문해서 마을 사람들의 건강도 좋아졌고, 건물도 새로 짓기 시작하고 이주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이젠 시장도 열린다네요.”
“그건 좋은 일 아닙니까?”
태수가 묻자 김혁권은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말했다.
“모두한테 좋은 일이죠. 그런데 딱 한 사람한테만 안 좋은 일이고요.”
“설마……?”
“그 모든 걸 처리해야 하는 라함은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김혁권의 말에 태수가 기억을 되살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