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54
00857 857화
라함은 태수에게 물질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사람이다. 태수는 오히려 호기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더 비싼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시급이 제일 센 간병인으로 했다니까요. 아주 확실하게 간병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쇼.”
“네. 비싸면 잘하겠죠.”
“왜요, 혹시 비용이 부담돼서 그래?”
김혁권이 툭하니 물어 오자 태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그렇지. 우리 닥터 최는 화끈한 남자니까.”
“제가 좀 화끈하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같은 영세 의료진들을 위해 오늘 한턱내시나?”
김혁권은 은근슬쩍 태수에게 계산을 미뤘다.
미국에서 계속 생활했다면 김혁권의 주머니도 상당히 부풀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짠돌이 기질이야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은근히 짠돌이란 소리를 듣지만 김혁권에게는 역시 새 발의 피였다.
그렇다고 김혁권의 제안이 부담스러운 건 결코 아니었다.
보건의 월급도 상당히 센 편이었다. 부모님 생활비와 용돈을 제외하고 자신과 아이들의 생활비를 빼더라도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돈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값어치로 환산한다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드시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거 다 주문하세요.”
“봤죠? 닥터 최가 이렇게 남자답다니까요. 뭐 합니까? 얼른 주문들 합시다.”
김혁권이 결정을 내려 버리자 NGO 의사들도 바빠졌다.
“비싼 건 모르겠고 많이 먹자고. 난 텐더로인스테이크 더블로!”
“그거 좋네. 나는 거기다가 샐러드도 추가.”
“입가심도 해야죠. 맥주 한 잔씩 돌리고, 안주 할 것도 주문할게요.”
인원이 많다 보니 점점 주문하는 양이 늘어났다.
그래도 태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문명과 떨어진 곳에서 지내는 NGO 의료진들이다. 게다가 월급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한다.
일반 의사들에게 존경받는 의사들이라지만 생활이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그런 그들에 비하면 태수가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편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특별한 날인데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평소에 나누지 못한 대화를 나누고, 마음껏 먹고 쉬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스미스와 약속이 있던 제임스도 중간에 합류해 밤이 늦도록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아직 리카르도 수술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태수지만 이 순간만큼은 피로도 잊었다.
다음 날부터 태수와 김혁권, 그리고 NGO 의료진은 하루 종일 함께했다.
아침나절에 라함의 상태를 확인하고, 병원을 나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었다.
오후에 또 라함을 만난 후 다른 장소로 옮기고,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중간 태수와 김혁권은 라함과 시간을 갖기도 했다.
제임스가 함께할 때도 있지만 여러 일정 때문에 같이 있지 못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도 태수와 김혁권, 그리고 NGO 의료진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재미를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저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아니었다.
모두의 관심사가 의료와 수술이었기에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특히 이번 라함의 이식수술이 주요 대화 포인트가 되었다.
이작손은 마취의지만 많은 수술을 지켜봤기에 간접적인 경험이 상당했다.
“신장 수술만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니라 간 수치라든지…….”
“그 부분은 이작손이 전담해 주십시오. 전 이번 수술에서…….”
태수가 의견을 내면 어시스던트로 내정된 브레드 김이 말을 받았다.
“이럴 때 내 경우를 이야기하면…….”
“그럼 제 생각은…….”
“그렇지. 그럴 때는 그렇지만, 반대로…….”
브레드 김은 자신의 집도 경험을 태수에게 이야기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경력으로 봐도 원래 브레드 김이 집도해야 할 수술이다.
하지만 제임스가 막았다.
-이번 수술은 닥터 최가 집도한다.
그 말을 거부할 의료진은 아무도 없었다.
브레드 김이나 이작손도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다.
태수는 그게 더 의아했다.
제임스가 자신에게 이식수술 기회를 준다고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은 모르는 무슨 이야기가 오간 건지.
그 속내까지 알 순 없었다.
그렇게 훌쩍 3일이 지났다.
태수는 수술 대기실에 수술복을 입은 채로 대기 중이었다.
며칠 사이 회포를 푼 김혁권과 NGO 의료진들은 이미 수술을 준비 중이었다.
태수도 함께 준비하려 했지만 수술실 입구에서 김혁권에게 거부당했다.
-집도의면 집도의답게 굽시다. 서로 위치 애매하게 하지 말고.
언제 들어도 김혁권의 말투는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또 틀린 건 없기에 태수는 지금 수술 대기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라함의 수술이다.
검사상 그리 힘든 수술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수술엔 실수가 없어야 한다.
라함은 혼자의 몸이 아니라 이잠바크 촌장이었다. 그의 수술 성패가 이잠바크에 미칠 영향을 태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부담을 느끼고 있진 않았다. 리카르도를 수술했듯이 똑같은 마음으로 대할 터였다.
아니, 라함과 리카르도는 태수에게 똑같은 환자였다.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변화할 수술 실력이라면 웃기는 일이다.
누구라도 최선을 다한다.
그 마음이 전부였다.
물론 친분이 있기에 좀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말짱 거짓말이다.
태수는 굳이 그런 생각을 억누르진 않았다.
적절한 압박감은 집중도를 높이는 데 좋은 탓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 시계를 보자 수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짝!
“가자.”
얼굴을 가볍게 때리며 정신을 집중한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준비를 마친 태수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드르릉.
수술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김혁권이 집도의 보조 간호사로 서 있던 탓이다.
순간 멍해진 태수에게 김혁권이 수술 가운을 펼치며 태수에게 다가왔다.
“왜 정신 빠진 사람처럼 서 있습니까?”
“혁권 씨가 수술실에서 다가오는 게 낯설면서도 반가워서요.”
“낯선 건 또 뭡니까?”
“신속대응센터에서 수술실만 들어가려면 가로막혀서 못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을 지금 왜 합니까.”
“그만큼 그때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거죠.”
“별……. 됐으니까 이거나 빨리 입어요.”
김혁권은 지난 일을 떠올리는 걸 그리 반기지 않았다.
태수도 계속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때 그랬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또 하나 신선한 모습이 있었다.
김혁권에게 자리를 내어준 캐서린 간호사가 마취의인 이작손 보조 간호사로 올라간 모습이었다.
제임스와 수많은 수술을 해낸 그녀의 경력은 NGO 간호사들 중에서도 최고에 속했다.
그런 그녀가 물러난 건 태수와 김혁권을 배려한 일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김혁권이 수술 보조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단 걸 인정한 것 같았다.
태수는 스텝들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에야 라함에게 다가갔다.
라함은 아직 마취 전이라 태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인자한 표정을 지은 라함이 먼저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네?”
“혹시 상황이 좋지 않으면…….”
라함의 차분한 이야기를 듣던 태수가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닥터 최가 수술해 주는 건데 뭐가 두렵습니까.”
“…….”
“삶도 죽음도 신의 뜻이라고 평생 배우고 익히며 살았습니다. 신이 보내 주신 닥터 최의 손에서라면 내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라함이 마치 성자와 같은 맑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만큼 태수에 대한 믿음이 강하단 증거였다.
태수는 아직까지 이런 환자는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되레 당황스러웠다.
“이잠바크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있지요.”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닥터 최의 말대로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난 그저 닥터 최가 수술해 준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엔 평온함과 태수에 대한 믿음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은 태수를 상당히 난감하게 했다.
그때 라함이 스르륵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전 준비됐습니다.”
“전 아직 안 된 거 같은데요.”
“그럼 준비되시면 시작하세요.”
라함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환자가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인데 의사가 무슨 힘이 있을까.
태수의 시선이 이작손에게로 향했다.
이작손은 태수를 향해 원을 그리며 바이탈이 안정적이란 사인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본 태수는 라함을 다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라함.”
“말씀하세요.”
“꼭 다시 보겠다고 말씀하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 편하게 수술합니다.”
“닥터 최가 그렇게 말하라고 한다면 말해야죠. 꼭 다시 봅시다.”
라함의 목소리는 끝까지 태평했다.
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작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캐서린이 다가와 라함의 얼굴에 인공호흡기를 씌웠다. 그와 동시에 이작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general anesthetic(전신마취제) 투여합니다. 하나, 둘…… 마취되었습니다. 이어서 근육이완제 투여합니다.”
이작손이 수술의 시작인 마취를 이어 가던 중이었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김혁권이 다가와 한국어로 말했다.
“이 노인네도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요.”
“이렇게 당황스러운 시작은 저도 처음입니다.”
“닥터 최가 그때 너무 활약을 많이 했던 거지.”
“제가 또 뭘요.”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지금 우리가 거기서 어떤 수술들을 했는지 일일이 열거해 봐요?”
“아니요.”
“그런데 무슨 말이 많아. 내가 봤을 때 라함도 사람 쉽게 믿는 스타일 아닙디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걸 보면 닥터 최는 역시 대단해.”
김혁권은 툴툴거리는 것 같았지만 결국 태수의 칭찬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때 어시스던트 자리에 선 브레드 김이 말했다.
“난 신속대응센터에서 닥터 최가 대단하단 걸 알았다니까요.”
“그럼 나보다 후배시네.”
“그건 아니죠. 난 NGO 캠프에서 닥터 최가 그 교수인가 뭔가를 밀어내는 모습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인데.”
“그럼 나보다 선배 하시든가.”
김혁권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묘한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한 브레드 김의 눈웃음은 짙어져 갈 뿐이었다.
태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제 수술 시작할 겁니다. 잡담은 나중에.”
“알겠습니다. 차분하게 마음 좀 가라앉히고.”
브레드 김은 오랜만에 태수와 수술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다소 들뜬 목소리를 억누르기에 바빴다.
잠깐 침묵이 흐르는 사이 들떴던 수술실 분위기는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모두 수술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로들이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 데에 이골이 났기에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 분위기를 직감한 태수도 위치를 잡고 섰다.
이제 선언을 해야 할 때였다.
“수술…….”
그르릉.
태수가 선언하는 사이 갑자기 수술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수술복 차림의 제임스가 들어왔다.
누굴 만나러 간다고 했었는데.
그뿐만이 아니라 태수에게 집도를 맡겨 놓고 수술실에 들어온 것도 의아했다.
태수는 제임스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수술해.”
제임스는 수술에 참여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적극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 그의 손에는 클립보드가 들려 있었다.
제임스는 클립보드를 들고 천천히 태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의료 카트에 놓인 수술 도구를 내려다봤다.
“눈에 익은 수술 도구들이야.”
“제 몸과 같은 녀석들입니다.”
“얼마나 손에 익었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두 눈 부릅뜨고 보셔야 할 겁니다. 제 손이 너무 빨라서요.”
태수는 일부러 넉살을 부렸다.
지금까지 제임스의 신장이식 수술에 여러 번 어시스던트로 참가했다.
그런 태수가 이젠 집도를 해야 할 입장이다.
어떤 수술이든지 처음 시도하게 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