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63
00866 866화
태수도 이 순간만큼은 카프레네의 지식을 십분 활용했다.
게다가 제임스가 보내 준 자료들까지 더해서 이야기했다.
그런 태수의 폭넓은 지식에 오히려 스미스와 제임스가 놀랍단 눈초리였다.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태수가 이런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단 걸 몰랐단 눈치였다.
스미스의 시선이 제임스에게로 향했다.
제임스는 바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그런 놀라움은 잠시뿐이었다.
서로 국적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과 나이가 달라도 환자에 대한 의학적인 견해를 나누는 건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태수가 제대로 이해하고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때부터는 정말 피 터지는 의견 교환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의견 교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모이면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모이면 세 사람이.
좌우간 누군가 만났다 하면 그 이야기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 말고 격론을 펼친 적도 있고.
술을 마시며 의견을 나누다가 고주망태가 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자주 마주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의학적인 신뢰나 인간적인 믿음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요 며칠 사이 태수는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제임스, 스미스와 함께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던 탓이다.
카프레네의 지식을 마음껏 드러내고, 자신이 공부한 모든 걸 다해 부딪쳐야 할 상대들이다.
그런 상대들과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얻는 게 너무도 많았다.
그동안 조금은 정체되어 있던 의학적 깊이가 더욱 깊어지는 걸 스스로도 느낄 정도였다.
게다가 첫 번째 난치병 환자인 문지철을 어떻게 수술해야 할지 가닥도 잡혀 갔다.
오늘은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문지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오늘 최종적으로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확률을 올린 상태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보다 오늘도 환자에 대한 격론을 펼칠 생각에 태수는 더욱 신이 나는 것 같았다.
“룰루.”
콧노래까지 부르며 샤워를 마친 태수가 샤워실 문을 연 순간이다.
띠리릭!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자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간 태수가 상대를 확인했다.
공우혁의 전화였다.
요 며칠 사이 간간이 통화했기에 태수는 반가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님.”
“최 선생.”
공우혁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아 있자 태수도 들뜬 마음이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안 좋은 소식이야.”
“…….”
“문지철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어.”
공우혁의 말에 태수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누, 누가 죽어요?”
“문지철.”
“그…….”
“그래, 첫 번째로 수술하자고 내정된 난치병 환자 말이야.”
공우혁의 말에 태수는 얼른 고개를 털고 정신부터 차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집 앞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그쪽 관할 경찰이 알려 왔어. 시속 20킬로미터도 안 되는 느린 속도였는데 전신의 뼈가 부러져서 현장에서 즉사한 거 같아.”
“음…….”
“기껏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이런 소식을 전해 줘야 하다니.”
“아닙니다. 일단 이쪽 일부터 빨리 정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태수는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마쳤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허탈했다.
자신의 노력이 헛되었다는 건 관심도 없었다.
그 어린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떠나보냈다는 게 허탈했다.
태수가 눈 사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미국에서 시간을 너무 허비한 건 아니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고 필요 없는 시간을 보내진 않았다.
매 순간이 문지철의 수술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오늘도 신바람이 난 건 문지철에 대한 수술에 가닥을 잡고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이젠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 순간 그는 어깨가 너무도 무거웠다.
태수는 그길로 부지런히 가방을 챙겼다.
귀국 비행기 표만 구한다면 서둘러 돌아갈 생각이었다.
슬픈 소식을 접하고 이대로 미국에 머무른다면 도무지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 듯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보다 하루 정도 앞당겨진 일정이지만 전혀 개의치않았다. 어차피 미국에서 얻을 건 다 챙겼기에 미련도 없었다.
달리다시피 호텔을 나선 태수는 제일 먼저 존스홉킨스 병원으로 향했다.
서둘러 스미스의 방에 도착했지만 자리에 없었다.
“어쩌죠, 박사님 수술 들어가셨는데요.”
“언제 끝나나요?”
“그리 어려운 수술이 아니라고 하시니 한두시간내로 오실겁니다.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스미스 박사 비서는 태수가 스미스와 친분이 있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제지없이 방 안으로 안내했다.
주인 없는 방이었지만 익숙했기에 태수는 캐리어를 한쪽에 놓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사이를 틈 타 제임스에게 전화했다.
“빨리 오라고 재촉 전화도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사실…….”
태수는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을 여과 없이 전달했다. 그러자 제임스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좌우간 일단 그쪽으로 가지.”
제임스의 마음도 영 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입안이 텁텁했다.
잠시 후, 수술이 끝나고 돌아온 스미스와 급히 나타난 제임스가 나란히 소파에 자리했다.
스미스도 소식을 들었기에 오가는 대화 자체가 없었다. 무거울 정도로 침묵만이 방을 짓누를 뿐이다.
한참을 이어진 긴 침묵 끝에 제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브레드 김은 공항으로 바로 갈 거야. 뉴욕에서 건너오는 길이니까 두어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데이먼이 지금 항공권 구하는 중이야. 브레드 김과 합류해서 갈 수 있게 조치해 놓았으니까 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스미스가 이어서 말하자 태수가 두 의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보다 닥터 최, 내가 한마디 해도 되나?”
나지막한 제임스의 물음에 태수는 몸을 곧추세웠다.
“말씀하세요.”
“그 아이의 사고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닥터 최가 죄책감은 갖지 않았으면 좋겠네.”
“…….”
“닥터 최는 그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했어. 결론을 말한다면 둘이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제임스의 말에 스미스도 한마디 보탰다.
“난 좀 냉정하게 말하지. 그 환자의 경우를 보면 우리 세 사람이 머리를 합쳐도 15퍼센트 안팎의 성공 확률밖에 이끌어내지 못했어.”
“…….”
“후유증에 대한 부분은 이제야 생각하려고 했던 부분이고. 어쩌면 그 아이를 위해서도 그 사고가 나았을지도 몰라.”
“이제 14살이었습니다.”
태수가 말하자 스미스는 덤덤하게 반론을 펼쳤다.
“우리 병원에도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소아암이나 백혈병, 그 외에 다른 질환으로 생사를 오가고 있어. 그 아이들은?”
“저도 제가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는 건 압니다.”
“그 아이도 그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야.”
스미스는 태수의 마음을 사정없이 꼬집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 심정을 태수도 모르진 않았다.
“저도 그 아이를 무조건 완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음.”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제가 유일한 희망이었을 텐데…….”
“…….”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게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태수가 속마음을 토해 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제임스가 무거운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자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
“생각하나? 우리의 대화가 한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맞습니다.”
태수도 그 점은 인정했다.
세 사람의 치열한 토론은 비단 문지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병이나, 다른 병에 대해서도 깊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사이 태수도 카프레네의 지식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동안 경험했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제임스는 그런 태수에게 말했다.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은 안타깝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
“다른 아이들이 기다린다며.”
“네,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연한 태수의 눈빛을 본 제임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힘내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거면 됐어. 그보다 출발 시간까지는 좀 여유가 있는 거 같은데.”
“가능하다면 라함과 리카르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까 합니다.”
“그래야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태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섰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였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스미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강한 줄 알았는데, 아직 어려.”
“그래서 더 매력적인 부분도 있지.”
“음.”
“두 환자를 만나서 위로를 하는 게 아니라, 닥터 최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제임스의 말뜻을 알아챘는지 스미스가 말했다.
“그렇게 되겠지.”
“그럴 거야.”
“그보다 자네는 언제 움직이나?”
“닥터 최가 출발하면 나도 바로 떠나야지. 일정이 많이 늦어졌으니까.”
제임스의 말을 들은 스미스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복잡한 시선이다.
마주 보던 제임스가 슬쩍 농담을 던졌다.
“같이 가려나?”
“나중에.”
스미스가 슬쩍 한발을 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임스가 넌지시 정곡을 찔렀다.
“하긴 자네가 간다면 존스홉킨스에서 가만있겠나?”
“제임스 자네는 막무가내로 갔지않나?”
“성격차이지.”
제임스가 빙그레 웃으며 넘어갔다.
그사이 태수는 자신이 수술했던 두 환자를 찾아갔다.
먼저 라함에게 향했다.
일반 병실에 자리한 라함은 언제나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만한 경과였다.
수술 후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살이 올라 있었다.
꺼멓고 누렇던 안색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눈빛에도 좀 더 힘이 들어갔다.
태수는 이미 직감했지만 천천히 다가서며 확인차 라함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다 좋습니다.”
“그러지 마시고요.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이식된 신장이 아주 잘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당뇨도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고요.”
“다행입니다.”
태수가 다행이라는 얼굴로 대답하자 라함은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보다 닥터 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여전히 그런 거짓말은 서투르신 거 같습니다.”
라함은 더듬더듬 영어로 말했다.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들도 많았지만, 태수도 마구잡이로 배운 영어였기에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서툴다니요?”
“얼굴에 쓰여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요.”
“한국에 돌아가야 돼서요.”
“그것뿐입니까?”
라함은 깊은 눈빛으로 태수를 바라봤다.
전쟁터에서 평생을 살아온 라함이라 그런지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태수는 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사실…….”
태수가 문지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라함이 잠시 생각한 후 천천히 생각을 쏟아냈다.
“그래도 그 아이는 행복했겠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그런 희망조차 느끼지 못하고 죽어 가니까요.”
“…….”
“그게 닥터 최가 오기 전 이잠바크의 아이들이라는 건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라함이 길게 이야기했지만 진심이 느껴졌기에 태수는 잠자코 들었다.
침묵하는 태수를 바라보며 라함은 말을 이어 갔다.
“이젠 이잠바크의 아이들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먼저 죽어간 아이들에 대해 절망하고 있을 거 같습니까?”
“…….”
태수가 대답하지 못하자 라함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전에 제가…….”
“닥터 최가 그 아이를 방치한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태수의 대답을 들은 라함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