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89
00892 892화
“여기 오시기 전에 마산 군통합병원장으로 계셨다고 했어요.”
“원래 군인?”
“아마도 그러시겠죠.”
“이상하네. 전 군대에 앞뒤 꽉꽉 막힌 사람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요.”
묘한 얼굴로 말하는 태수를 본 박연주 중위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멋진 분들도 많습니다. 아니, 많아요.”
“말투는 좀 더 적응하셔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들끼리 계속 연습하고 있는데, 입에 붙어서 그런지 쉽지가 않네요.”
“그래도 전보다는 덜 딱딱하고 대화하기도 편하네요. 앞으로도 부드럽게 잘 부탁드립니다.”
태수가 넉살 좋게 인사하자 박연주 중위도 화답했다.
“최선을 다해서 보조하겠…… 할게요.”
“그럼 최선을 다해서 저에게 외과 차트를 주시겠습니까?”
태수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박연주 중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한데 그건 안 되겠는데요.”
“방금 최선을 다해서 보조해 주시겠다면서요.”
“차트 드리면 아이들 보러 가실 거잖아요.”
“물론입니다. 심심해서 차트 볼 만큼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박연주 중위는 반대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안 돼요. 성 선생님께서 혹시 선생님이 차트 달라고 하면 절대 주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건 제가 나중에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해요.”
박연주 중위는 밝게 웃는 낯으로 거절했다.
말투는 부드러워졌다지만 목소리에 담긴 힘은 군인이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강인했다.
태수도 그녀가 왜 차트를 주지 않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성재경의 오더라고 해도 몰래 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난치병 수술을 전담하는 태수가 다른 아이들 일에 관여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다.
마음은 아는데 태수도 그럴 순 없는 입장이었다.
“제가 아주 몰래, 누구도 모르게 다녀올 테니까 잠깐만 주세요.”
“자꾸 이러시면 성 선생님 호출할 겁니다.”
“말투, 말투.”
“그런 협박도 소용없습니다. 군인으로서 한 번 상급자에게 받은 지시는 절대 어길…… 수 없어요.”
박연주 중위는 말하다가 스스로 실수를 알았는지 얼른 말투를 바꿨다.
그래도 태수에게 차트를 줄 수 없단 눈빛은 단호했다.
부탁이 통하지 않자 태수는 입안이 썼다.
“이거 참.”
“그러게 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냐고.”
익숙한 목소리에 옆을 바라보니 유병태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수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차트 좀 달라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나는 잘못이 아니라도 너는 잘못이지. 난치병 환자에만 전념하기로 해 놓고 이러면 반칙이라니까.”
“수술은 잘 끝나고, 지금 여 선배가 중환자실에 가 있는 상황이고.”
“그럼 넌 쉬어야 하는 상황이고. 박 중위, 불시에 최 선생이 찾아와도 절대 차트 주면 안 됩니다.”
유병태가 말하자 박연주 중위는 대답 대신 결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턱짓한 유병태가 다시 태수에게 말했다.
“봤지?”
“나 참.”
“그리고 어제 그런 대수술을 끝내 놓고 바로 환자를 보겠다는 것도 웃기는 거라고. 얼굴이 아주 못쓰게 망가졌는데 말이야.”
“못쓸 정도는 아니지.”
“내가 보기에는 완전히 맛이 갔어. 포도당 하나 놔줄까?”
유병태의 물음에 태수는 어이없이 바라봤다.
“그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거든요.”
“그럼 회의실에서 차 한잔 마시자.”
“방금 마시고 왔어.”
“한 잔 더 해. 자자, 갑시다.”
유병태는 아예 태수의 어깨를 돌려 뒤에서 밀었다.
태수는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 회의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태수는 별다른 일 없이 오후를 보내야 했다.
유병태가 한참 시끄럽게 떠들다가 사라지고, 성재경과 임진호, 박민철이 한 번씩 회의실에 들른 게 전부였다.
태수는 잠깐 틈을 타 중환자실로 향했지만 입구에서 공우혁의 손에 가로막혔다.
-오늘은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쉬라니까.
그 말이 전부일 뿐이었다.
슬쩍 아이들의 병실에 들어가려 해도 주변을 지나던 보건의들이 밀어냈다.
철저할 정도로 태수가 불우 아이들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결국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회의실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하네요.”
“좋게 생각하세요.”
“마음 써 주는 건 아는데……. 에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태수가 찌뿌듯한 몸을 뒤틀고 책상에 푹 엎드렸다.
어떻게도 하지 못한다면 그냥 자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태수라고 기운이 펄펄 나서 아이들을 살펴보려는 건 아니었다. 여러 일로 부재중인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다른 보건의들이 고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막을 줄은 몰랐다.
태수가 엎드린 채 잠을 청할 때였다. 이선정 간호사가 나지막이 물었다.
“주무세요?”
“네, 잡니다.”
태수의 삐쭉거리는 목소리에도 이선정 간호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이어서 물었다.
“오늘 신문 아직 안 보셨죠?”
“신문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것 좀 보세요.”
“저 잔다니까요.”
“네. 주무시는 거 아니까 일어나서 좀 보시라고요.”
이선정 간호사가 재차 권하자 태수는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척.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이 다가오자 태수는 휴대폰 액정을 가득 채운 기사 목록부터 확인했다.
“난치병 성공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네요.”
“사회면에서는 조회수가 제일 높던데요.”
“그렇겠죠. 다들 관심이 많았던 수술이니까요.”
태수의 덤덤한 이야기에 이선정 간호사가 외려 물었다.
“다들 칭찬 일색인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감사한 일인데 거기에 마음이 휩쓸리고 싶지 않습니다.”
“왜요?”
“지금도 가지고 있는 부담이 너무 커질 거 같아서요. 그냥 좀 더 쉬겠습니다.”
태수는 휴대폰을 돌려주고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기사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태수도 이름을 올렸다. 거기에 일일이 반응하는 게 더욱 피곤했기에 차라리 신경을 끊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런 태수도 이기준의 말은 귓전을 맴돌았다.
-사고 쳤으니까 저녁에 뉴스 봐.
솔직히 궁금했다.
밤에 방영되는 뉴스라고 했기에 지금은 그저 한숨 자는 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오후 내내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회의실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어제 수술에 참여했던 조현민과 여성현이 들어와서 쉬었다 나가긴 했다.
이기준은 일찍 퇴근했단 말만 들었을 뿐이다.
호의로 쉬게 해 준다는데 기어코 나갈 수도 없어 갑갑할 뿐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다.
저녁 무렵.
퇴근한 태수가 빌라 앞에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차 뒤쪽으로 돌아가자 같이 타고 왔던 이선정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집에 들어갈게요. 진짜 피곤해서 밥 생각도 없네요.”
“그렇게 하세요.”
“애들한테 말 좀 잘 해 주시고요. 내일 뵈어요.”
이선정 간호사는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태수도 뒤돌아 빌라 입구로 향했다.
걸어가는 사이 태수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낮에 옥상에서 이기준이 인터뷰가 뉴스에 방영된다고 했던 말이 계속 신경이 쓰인 탓이다.
집에 도착한 태수는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았다.
기다란 소파에 태수와 주영수가 늘어진 자세로 앉아 있었고, 1인 소파에는 주미성이 편안한 옷차림으로 자리한 모습이다.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젠 조금 헝클어진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TV에서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하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레퍼토리 때문인지 다들 표정이 심드렁했다.
태수가 힐끔 시간을 확인하자 뉴스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을 보니 영혼 없는 얼굴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 굳이 뉴스를 시청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진짜 재미가 없어 태수가 주영수에게 슬쩍 물었다.
“재밌어?”
“그냥 보는 거예요. 내일 학교 가면 애들이 이야기할 텐데 저도 할 말은 있어야 되니까요.”
“참 피곤하게 산다.”
“일단 대충 봤으니까 숙제하러 들어갈게요. 전 솔직히 TV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요.”
주영수가 일어나자 태수가 물었다.
“이따가 야식 먹을래?”
“삼촌 드시면 당연히 저도 먹어야죠.”
“그럼 이따 부를게. 고생해라.”
“네. 숙제하고 다시 나올게요.”
주영수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주미성이 다가와 태수에게 리모컨을 내밀었다.
“저도 들어갈게요.”
“보는 거 아니었어?”
“평일에 하는 예능은 좀 식상해서요. 저도 숙제하고 책 좀 볼게요.”
“그래라.”
태수가 리모컨을 받아 들자 주미성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태수는 TV로 시선이 향했다.
-하하하.
-호호.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데 태수는 왜 웃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뉴스 방영 시간이 되자 태수는 채널을 돌렸다.
마침 뉴스가 시작되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얇은 금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중년의 아나운서가 소식을 전했다.
-첫 소식입니다…….
뉴스를 보는 태수의 시선은 예능을 볼 때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좋은 소식보다 안 좋은 소식들이 더 많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태수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다음 소식입니다. 분당의 군병원에서 난치병 수술을 하는 건 여러 매체를 통해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첫 번째 난치병 수술이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화면이 바뀌더니 군병원 풍경이 보였다.
영상이 움직이는 사이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촬영을 허락받은 분당의 군병원 내부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부터 보건복지부와 국방부가 공동으로 불우한 아이들 수술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요…….
기자의 설명이 상당히 상세하게 이어졌다. 신문이나 몇몇 잡지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뉴스에서 다뤄진 건 처음인 탓이다.
화면은 같은 장면을 거의 반복적으로 보여 줬다. 군 시설이기에 촬영할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제한적인 탓이다.
화면이 계속 돌아가는 사이 기자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그렇게 이번 사업의 취지와 현재의 수술 현황까지 이야기가 된 후였다.
본격적인 난치병 수술에 관한 설명도 이어졌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TV로 보는 건 태수에게도 신선한 일이었다.
기자의 설명이 끝나고 화면이 바뀌더니 수술장 앞에 선 이기준의 모습이 보였다.
수술 직후에 촬영한 거라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었다.
하지만 평소의 차가운 눈빛이 아니라 부드럽고 선한 인상을 내보이고 있었다.
태수는 그 모습이 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기준의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곧 이기준의 인터뷰 내용이 들려왔다.
-이번 수술의 성공은 어느 한 의사의 열정에 감동한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인터뷰였다.
태수는 의아했다.
겨우 이 정도 인터뷰로 이기준이 그런 이야기를 할 리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앞뒤로 인터뷰가 길게 이어졌는데 편집해서 핵심만 방영하는 것 같았다.
수술의 집도의가 이기준이 아닌 탓인지도 모른다.
일단 이기준의 모습을 확인한 태수는 더 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리모컨을 다시 쥐는 순간 그가 멈칫했다.
빈 수술실을 비추는 영상으로 화면이 바뀌었는데 자신의 얼굴이 오른쪽 상단에 떠오른 탓이었다.
여권사진보다 조금 더 커다란 사진이었기에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걸 본 태수는 사레가 들렸다.
“큭! 저걸 왜…….”
일부러 인터뷰를 미뤘는데 결국 자신의 얼굴이 떠오른 게 어이가 없었다.
그사이에도 기자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집도한 의사는 최태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