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08
00911 911화
턱.
깍지 낀 두 손까지 회의 테이블에 올린 이기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수술 어시스던트는 결정됐어?”
“너 흉부잖아.”
“누구는 외과에 흉부외과까지 수술하는데, 나라고 어시스던트를 못할 건 없지.”
“자신 있어?”
태수가 반대로 묻자 이기준이 잠시 고민하다 반문했다.
“최 선생은?”
“…….”
“나도 마찬가지야. 자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한번 부딪치기로 한 거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아서 찾아왔어.”
이기준의 눈빛이 적극적이다.
태수는 그 눈빛을 보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크게 놀랐다.
무슨 마음일까?
짐작하긴 힘들었다.
그러나 태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흉부라면 모를까, 복부는 같이 하기 힘들 거 같은데.”
“예상은 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하니까 마음이 썩 좋지는 않네.”
“그래도 먼저 찾아와 줘서 고마워.”
“실없는 놈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최, 아니 태수야.”
이기준이 이름을 부르자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반응했다.
“왜?”
“이번에도 성공해라.”
“…….”
“믿을지 모르지만 진심이야.”
이기준이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봐야지.”
“그래, 노력하겠지.”
이기준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눈으로 검사 결과를 봐도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심폐 기능 쪽에 문제가 덜하다는 정도.
그 외에는 고유찬과 비슷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윤사라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 이후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기준이 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그건 약속할게.”
“그럼 됐어. 간다.”
끼익.
이기준이 문을 연 순간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멈칫한 성재경과 깜짝 놀란 유병태의 모습이 보였다.
놀라던 유병태의 표정이 바로 경계로 바뀌었다.
“이 선생이 여긴 어쩐 일이야?”
“동기인 태수 보러오는데도 이유가 필요해?”
“…….”
“어시스던트가 결정된 모양이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기준은 성재경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먼저 두 사람을 지나쳤다.
성재경과 유병태는 이기준과 반대로 소회의실로 들어왔다.
탁.
문을 닫은 순간 유병태가 얼른 태수에게 물었다.
“저 자식이 여길 왜 와?”
“걱정돼서 왔다던데.”
“고양이가 쥐 생각 하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는 이리저리 뒤로 빼던 놈이 난치병 수술만 보면 아주 게거품 물고 달려드네. 그렇게 유명해지고 싶나.”
유병태가 단단히 오해하자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만 있는 건 아니니까 너무 열 내지 마.”
“에라, 정신 차려, 이 순둥아.”
유병태가 투덜거리는 사이 성재경이 말했다.
“그만 떠들고 앉아.”
“네네, 앉습니다.”
뺀질거리며 대답한 유병태가 성재경 옆에 앉았다.
태수는 가타부타 이야기할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 선생이 어시스던트하는 겁니까?”
“아니. 내가 할 거야.”
성재경이 대답하자 유병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바득바득 우겨 봤는데 결국 밀렸어.”
“최 선생 만나서 응원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해서 데려온 거야.”
성재경의 뒷말을 들은 태수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
“우리 사이에 당연한 거지.”
“며칠 전에 음료수하고 도시락도 잘 먹었고.”
“……그건 어떻게…….”
유병태가 움찔하며 말하자 태수는 덤덤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유병태는 태수의 추측에 말려들었단 느낌을 받았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괜히 주변이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더, 덥네. 그렇죠?”
“딱 좋은데.”
“성 선배는 몸이 차서 그래요. 아, 덥다. 아차, 내가 할 일이 있었는데. 좌우간 두 분은 외과 쪽에 신경 끄시고 난치병 쪽에만 집중하세요. 먼저 갑니다.”
유병태는 괜한 핑계를 대며 빠르게 소회의실을 나갔다. 그러자 성재경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친구도 참 물건이야. 굳이 같이 오겠다고 부득불 우기더니 바람처럼 사라지네.”
“그게 유 선생 장점이죠. 고맙기도 하고요.”
“장점이라면 장점이긴 하지. 그보다 보다시피 이번 수술은 내가 어시스던트로 들어가기로 했어. 괜찮아?”
성재경이 묻자 태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할 소리. 자, 이제 이후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볼까?”
“3일 동안 스테로이드 치료를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그사이에 수술팀을 소집해서 수술 진행 방향을 결정해야겠죠.”
“이제 바빠지겠네.”
“그럴 거 같습니다.”
“그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진행하자고. 한시라도 서두르면 좋으니까.”
성재경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술팀이 모두 소환되었다.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당연히 고정이었다.
어시스던트로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재경으로 낙점되었다.
마취의는 마찬가지로 여성현, 마취 보조 간호장교로는 박시은 중위.
그리고 이번에 새로 참가하게 된 건 어시스던트 보조 간호장교인 최소현 중위였다.
태수가 최소현 중위에게 인사했다.
“자원하셨다고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간단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때 여성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억지로 끌려온 거야. 유찬이 수술 때 그렇게 힘들었는데 또 밀어 넣다니.”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됐어. 그래서 이번 수술은 어쩔거야?”
여성현이 바로 본론을 물었다.
툴툴거리는 말투와 달리 눈빛은 적극적이었다.
말은 그래도 이번 수술에도 분명 자원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끝까지 보이지 않으려 했다.
여성현의 성격을 모른다면 상당히 불쾌한 말투이기도 했다. 물론 태수는 그의 성격을 알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태수와 의료진들이 본격적으로 수술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다들 소문으로 접하셨듯이 이번 수술은 루푸스입니다. 검사 결과를 보시면…….”
태수가 루푸스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며 수술 계획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조금 잠잠했던 언론도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난치병 수술. 이번에는 루푸스다
-루푸스는 어떤 병인가
어디서 소식을 듣는지 몰라도 기자들은 발 빠르게 기사를 올렸다.
루푸스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기사화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윤사라의 경우는 일반적인 루푸스와 달라 그 부분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기사에 실렸다.
점점 기사의 수가 많아지자 확인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당연히 그에 따른 반응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꼭 살려 주세요. 응원합니다.
-루푸스가 이렇게 무서운 병인지 몰랐어요. 진짜 힘들었을 텐데, 견뎌 낸 아이가 대견합니다.
-저도 루푸스를 앓고 있습니다. 저는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아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 아이도 그렇게 호전될 거라 믿어요.
대체적으로 옹호하는 글이 많았지만, 역시 어딜 가나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루푸스면 그냥 스테로이드 몇 번 처방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이렇게 수선을 떨 일인지.
-저도 루푸스를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병 아니에요. 이번에는 언론에서 많이 부풀리는 거 같네요.
-역시 보건복지부하고 국방부에서 언플을 시작하네요. 시나리오가 딱 그런 거 같더라니.
-루푸스를 그렇게 부풀리다니. 보건의들도 결국은 유명해지고 싶었던 모양이네요. 실망이 큽니다.
루푸스를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의견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들의 말도 옳았다.
루푸스란 초기에 적당한 치료만 받으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병이었다.
광과민성 증상 때문에 자외선 차단제를 꾸준히 발라 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정도뿐이다.
조금 귀찮지만 그런 부분만 조심하면 일상생활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윤사라는 그런 루푸스 증상과 병세가 너무도 달랐다. 그걸 모른 사람들은 기사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 갔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수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의견이 갈렸지만 어디서도 자세한 보충 기사를 내지 않았다.
특히 보건복지부가 조용했다.
구태여 반응할 이유가 없단 뜻이기도 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대응이다.
섣불리 반박 기사를 내 봐야 감정싸움으로 변할 소지가 컸다.
한편, 태수와 수술팀원들은 밖의 상황을 몰랐다. 당장 수술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랐던 탓이다.
“그래서……”
태수의 설명이 끝난 후부터 다들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만큼 윤사라의 상황이 좋지 않단 뜻이다.
“최 선생,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이런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적용하는 건 괜찮죠. 제 말은…….”
“……그게 좋겠어.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치열하다 못해 전투적인 회의만 계속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태수는 회의 중간중간 윤사라의 병실을 방문했다. 상태를 확인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말동무가 되어 주기 위해서였다.
병실에 들어선 태수가 누워 있는 윤사라에게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병실이 갑갑하진 않아?”
“아니요. 여기 엄청 넓은데요. 제가 사는 집보다 훨씬 넓어서 갑갑하지 않아요.”
윤사라는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태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무너진 면역 체계에 스테로이드가 투여되며 소리 없는 전쟁을 펼치는 중이다. 진통제까지 동원되어야 할 정도로 윤사라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태수는 그 모습이 더욱 안타까웠다.
마음과 달리 그도 같이 웃어 보이며 물었다.
“지루하지는 않고?”
“창밖으로 저기 아래까지 볼 수 있어서 지루한 걸 모르겠어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들하고 간호사 언니들이 자주 들르셔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 주세요.”
“무슨 좋은 말?”
“이런저런 이야기요. 특히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책으로는 많이 봤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거든요.”
윤사라는 꿈 많은 소녀처럼 상상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는 슬픈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바뀌기도 했다.
“…….”
태수는 그 모습을 그저 가슴에 담아 둘 뿐이었다.
상상하는 윤사라의 얼굴에 황홀함이 떠오를 때 태수가 이어서 물었다.
“사라는 책 많이 봐?”
“아프지 않을 때는 많이 봤는데, 요즘은 별로요.”
“그래. 몸이 좋아지면 또 읽을 수 있을 거야. 이제 몇 가지 확인 좀 할게.”
“네.”
윤사라는 반복된 일과 중 하나였기에 크게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태수는 여러 기계들의 수치를 차트에 기록했다.
그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도 맡아 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윤사라의 복부 상황을 확인했다.
매일 검사실을 돌아다닐 수 없기에 이런 방법을 시도했다.
검사를 하는 사이 윤사라는 가급적이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태수가 편안하게 확인할 수 있게 배려해 줬다.
덕분에 태수도 검사에 더 열중할 수 있었다.
이내 검사를 마친 태수가 시선을 돌려 윤사라를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옆모습이 보였다.
시선을 마주할 때와 달리 미소가 사라진 얼굴이다.
태수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분명히 지금 윤사라의 표정에서 공허함이 느껴졌다.
바다를 상상할 때는 밝았던 눈빛이 어느 순간 구슬프게 변해 있었다.
아픔에 익숙해지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그리고 윤사라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그리고 지금은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에 지쳤을 터였다.
그저 자신의 아픔을 알아줄 사람이 없으니 웃을 뿐이다.
그 웃음 속에 짙은 공허함이 담겨 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지속된 아픔에 몸도 마음도 너무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걸 느낀 태수의 눈빛이 덩달아 복잡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