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10
00913 913화
윤사라의 현재 마음은 어떠할까.
태수가 그동안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윤사라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오랜 투병생활로 삶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해가 가는 것이 루푸스의 증상 중 하나인 피부 발진으로 인해 친구들도 모두 떠나갔다.
그리고 애초부터 돌봐줄 사람 없이 혼자 살아왔다.
원래 고통을 잘 참는 게 아니라, 고통을 참고 살아야 했었다. 그런 아픔이 행복보다는 슬픔을 먼저 알게 만들었다.
윤사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 슬픈 눈빛도 이젠 이해가 되었다.
고농도의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데도 이렇게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병과 싸울 의지가 많지 않단 걸 유추할 수 있었다.
“아차.”
태수가 머리를 쳤다.
윤사라가 군병원이 좋다고 한 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있던 탓이다.
갑갑한 병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건 수시로 누군가 드나들며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보건의들과 간호장교들은 측은한 마음에 한 번 더 윤사라를 찾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수는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수술이 어렵다고 생각하더라도 태수만은 달랐다.
살리고자 하는 의지는 있다.
하지만 환자가 지쳤다. 그리고 두려움에 깊이 잠겨 있어 역시나 하는 체념의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이건 무척이나 커다란 문제였다.
뭐가 원인인지 알았으니 이젠 해결책을 떠올려야 할 때다.
그때 윤사라의 구슬픈 목소리가 떠올랐다.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 기억에 태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거야.’
주미성과 주영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바다를 본 아이들이 해맑게 웃던 모습.
그 이후 자신과 급격히 가까워지고, 스스로의 생활에도 열정적으로 변했다.
그걸 떠올린 태수가 눈빛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수는 바로 공우혁을 찾았다.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자 공우혁이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공 선배.”
“아, 최 선생, 그래, 무슨 일이야?”
“바다 좀 보러 다녀오겠습니다.”
“뚱딴지같이 무슨?”
공우혁이 뜨악한 얼굴로 바라봤으나 태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뒷말을 이어 갔다.
“사라가 바다를 보고 싶어 하네요.”
“최 선생, 설마…….”
“설마 뭐요?”
태수가 묻자 공우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전 지금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그럼 됐어. 그런데 왜 이 상황에서 간다는 거야?”
공우혁의 물음에 태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삶의 희망을 찾아 주려고요.”
“음.”
“다녀와도 됩니까?”
태수가 다시 묻자 공우혁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그건 최 선생 재량껏 할 문제야. 나한테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면 되는 거라고.”
“그래도 그건 아니죠.”
“아니고 맞고가 문제는 아니니까 넘어가고. 바다에 가면 사라가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꼭 찾아야죠.”
태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공우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출발하는 걸로 하고. 누구누구 데려갈 생각이지?”
“이 간호사님이랑 조촐하게 다녀올까 합니다.”
“알았어. 그럼 오늘 저녁에는 내가 사라를 담당할게. 최대한 컨디션을 끌어올려 놓아야 재밌게 놀 수 있겠지.”
공우혁의 말에 태수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젠 다른 환자로 바꾸라고 권하지 않으십니까?”
“안 해.”
“…….”
“왜 안 하냐고? 환자라면 융통성도 없고 고집불통에 일단 직진부터 하는 의사 때문이야. 그런데 그런 고지식한 의사가 싫지는 않아.”
공우혁이 뚱한 얼굴로 바라보자 태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누군지 몰라도 진짜 고집은 센가 봅니다.”
“놀고 있네. 좌우간 오늘은 나한테 맡기고 여행 준비나 해.”
툭.
공우혁은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짚은 후 간호사실 쪽으로 걸어갔다. 억지로 웃고 있지만 괴로운 얼굴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수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태수는 결정된 사실을 수술팀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최 선생 없으니까 우리도 좀 쉬자고. 시어머니가 자리 비우면 원래 구박받던 며느리들은 쉬는 거라고.”
“여 선생 말이 맞지. 그동안 밀린 잠도 좀 푹 자야겠으니까. 우리 데려갈 생각 하지 말고 다녀와.”
여성현에 이어 성재경까지 나서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겉으로 한 말과 달리 윤사라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오겠다는 태수 말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사이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에게 다가섰다.
“아무리 어리고 환자라도 남녀가 유별한데 한방에서 자겠다는 건 아니죠?”
“이 간호사님은 절대로 모시고 갈 겁니다.”
“그럼 저부터 준비해야겠네요. 짐도 챙겨야 하고 이야기할 데도 있으니까 먼저 실례할게요.”
순탄한 여행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청한 이선정 간호사가 먼저 소회의실을 나갔다.
자신의 원룸에 이어 태수의 숙소까지 다녀올 게 분명했다.
짐도 챙기고 주미성과 주영수를 안심시키러 떠난 길이기에 태수는 잡지 않았다.
이선정 간호사가 소회의실을 나가자 뒤따라 여성현과 성재경, 그리고 박시은 중위와 최소현 중위도 움직였다.
여성현이 문으로 향하며 태수에게 말했다.
“우리는 사우나 가서 몸 좀 지지고 푹 쉬러 갈 거니까 연락하지 마.”
“먼저 갈게.”
성재경과 간호장교들이 이어서 여성현의 뒤를 따랐다.
그런 수술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태수는 섭섭하긴커녕 마음으로 고마웠다.
끝도 없는 회의에 그들도 지쳤을 터였다.
잠깐이라도 쉴 수 있다면 쉬는 게 당연했다.
탁.
그들까지 모두 나가자 태수 혼자 소회의실에 자리했다.
여행을 떠날 장소와 어떤 일정으로 움직일 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러던 태수가 멈칫했다.
생각지 못한 문제 하나가 생각났다.
태수는 평소 말이 많지 않았다. 이선정 간호사는 상냥하지만 분위기를 띄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하며 여행의 분위기를 밝게 해 줄 사람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분이 계시지.’
태수가 생각하는 그는 바로 박성민 선배였다.
일전에 갔던 낚시터에서도 마음이 복잡한 태수에게 끊임없이 농담을 건넸다. 그런 농담이 여행의 분위기를 상당히 좌우했었다.
이번엔 특히 박성민의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꼭 필요한 여행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박성민은 흉부외과 전문의였다.
특히 윤사라와 같은 심각한 루푸스 환자의 경우 혈전으로 인해 관상동맥이 급성으로 막힐 위험도 생각해야 했다.
그럴 때 태수가 응급조치를 하더라도 옆에서 보조해 줄 의사가 필요했다.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도 역시 박성민이 같이 여행을 가면 좋은 점이 많았다.
생각을 굳힌 태수는 우선 박성민에게 연락했다.
“흐으음, 여기 보고 계신다. 태수 말해라, 오바.”
잠에서 깬 것 같은데도 역시 첫 마디부터 범상치 않았다.
태수는 속내를 감추고 조심스레 물었다.
“주무셨습니까?”
“넌 내가 낚시터에서 이야기할 때 뭐 들었냐. 이번 주 근무는 야간이라고 했어, 안 했어?”
“하셨던 거 같습니다.”
“그걸 들은 녀석이. 지금이 몇 시냐? 눈앞이 뿌옇게 변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네. 그러니까 설라무네…….”
박성민이 비몽사몽하자 태수가 말했다.
“3시쯤 됐습니다.”
“벌써? 아, 젠장. 일어났어야 했네. 그래, 우리 태수의 알람으로 잠에서 깨니까 기분이 엄청나게 꿀꿀하다. 어디 오후 3시에 전화해 주는 여자 없나?”
“선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아아, 그렇지. 그러니까 니가 지금 나한테 뭘 물었냐. 내가 지금 정신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는 중이라 뭘 물었는지 기억이 안 나.”
“아직 안 물었는데요.”
태수는 진중하게 대답했지만 박성민의 목소리가 일순간 딱 끊어졌다.
그리고 잠깐 시간이 지난 후에 조금 또랑또랑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그래. 지금부터 이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님께 전화한 이유에 대해서 거짓 없이, 아주 세포 하나 꿈틀거리는 게 보일 정도로 자세하게 말해 보거라.”
“여행 가시죠.”
태수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잠시 후, 태수는 박성민과의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 일이라면 신속대응센터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히어로인 이 박성민 님이 적격이지. 내가 팀장님한테 보고한 후에 결과 듣고 바로 연락 줄게.
박성민은 태수의 기대대로 흔쾌하게 승낙했다.
아직 상부의 결정이 남았지만 그것도 태수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띠링!
문자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대로 박성민의 문자였다.
-내일 오전 9시까지 무조건 군병원 현관 앞으로 날아갈 테니까 위병소 열어 두고, 레드카펫 깔아 놓고, 꽃도 좀 준비해 놓고 대기할 것.
박성민의 문자에서 거들먹거리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용을 보니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태수는 박성민과 신속대응센터에 진심으로 고개 숙였다. 아주 자그맣게 자리하고 있던 거절에 대한 불안감을 훌훌 털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는 여행 준비에 분주했다.
환자와 함께하는 여행이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게 많았고, 준비할 것도 다양했다.
응급 상황을 대비해서 챙겨 놓은 의약품만 커다란 가방으로 하나가 될 정도였다.
5층 간호사실 앞에서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준비한 걸 최종적으로 확인할 때였다.
공우혁이 다가와 태수에게 말했다.
“준비는 끝나 가?”
“얼추 끝났습니다.”
“그걸 다 가지고 간다고? 참 준비할 게 많기도 하네. 그보다 사라는 일시적이지만 컨디션을 끌어올린 상태야.”
밤사이 윤사라를 케어하느라 한숨도 못 잤는지 공우혁이 퀭한 얼굴로 말했다.
루푸스 환자는 내과에서 주로 다루는 환자였다.
수술은 태수가 집도한다고 해도 약을 다루는 건 역시 내과가 더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태수도 그걸 잘 알기에 공우혁에게 진심으로 인사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그건 그렇고, 사라가 밤 사이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그게 좀 걱정이야.”
“컨디션을 끌어올렸다면서요.”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공우혁이 바로 대답을 건넸다.
“흥분해서 못 잔 거지. 여행에 대한 기대가 아주 상당해.”
“실망시키면 난리 나겠네요.”
“사라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꼭 그 희망이라는 걸 찾아와. 그러면 된 거니까.”
공우혁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꼭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난 좀 쉬어야겠어. 잘 다녀와.”
“고생하셨습니다.”
태수가 인사하자 공우혁이 손을 휘휘 저으며 멀어져 갔다.
준비한 의약품에 대한 점검을 모두 마친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윤사라의 병실로 향했다.
승강기를 기다릴 때였다.
이선정 간호사가 등에 큰 가방을 메고 있는 태수에게 물었다.
“안 무거워요?”
“무겁긴 합니다.”
“좀 내려놓았다가 이따가 들고 가시지 그래요.”
“잠깐인데요.”
그때 두 사람에게로 이기준이 다가왔다.
“여행 간다며.”
“그렇게 됐어.”
“흉부는 필요 없어?”
“박 선배가 올 거야.”
태수의 대답에 이기준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정신없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여행이 재밌긴 하지.”
“섭섭해?”
“아니. 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은 영 꽝이니까. 그보다 이거.”
스윽.
이기준이 봉투를 내밀자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무슨 봉투?”
“흉부외과에서 몇 푼씩 모은 거야. 맛있는 거 많이 사 주라고.”
무심한 이기준의 눈빛을 본 태수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잘 먹일게.”
“그래. 조심히 다녀와.”
이기준은 볼일이 끝났는지 바로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그러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이선정 간호사가 나지막이 물었다.
“전 이 선생님이 저러는 게 왜 더 불안할까요?”
“그냥 이 순간만 즐기세요.”
“선생님도 완전히 믿진 않으시는 거죠?”
“글쎄요.”
태수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봐도 요즘 이기준의 태도가 너무 달라졌기에 아리송하게 느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