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25
00928 928화
그때 이선정 간호사가 뒤에서 다가왔다.
“어디로 가시나요?”
“소회의실로 갑니다.”
“안 주무세요?”
“거기서 눈 좀 붙였다가 사라 깨어나는 거 보고 가려고요.”
태수의 말에 이선정 간호사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같은 생각이니까…… 전 병실 보호자 침대에서 잘게요.”
“배신입니다.”
“이런 건 저에 대한 선생님의 배려라고 하는 거예요.”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사이 수술장 문 앞에 도착했다.
유병태가 걱정부터 보였다.
“설마 이 시간까지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을까?”
“아마도.”
“잠도 없나?”
“없겠지.”
태수가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자 유병태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알아서 잘 빠져나가.”
그 말을 끝낸 태수가 수술장 문을 힘차게 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플래시가 터졌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도 바로 이어졌다.
“수술은 어떻게 됐습니까?”
“윤사라 양은 지금 어떤 상황이죠?”
물어오는 그들의 질문에 태수는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이 시간까지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소리에 기자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응원이라.”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태수의 반응을 보니 수술에는 성공한 모양이다.
이내 황당함을 털어 낸 기자들이 인터뷰를 이어 가려 시도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시간까지 수술이 지연된 이유가 있습니까?”
기자들의 질문은 상당히 집요하게 이어졌다.
태수는 간단하게 몇 마디만 대답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수술은……. 나머지 이야기는 공우혁 선생이 회견으로 알려 드릴 겁니다. 정말 피곤해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태수는 정중하게 부탁하며 몸을 움직였다. 이미 이선정 간호사와 유병태는 모습을 감춘 후였다.
태수는 수월하게 빠져나가고 싶지만 집요한 기자들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기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수술장 문이 한 번 더 열리며 공우혁과 내과 보건의들이 의무병들과 함께 스트레쳐카에 누운 윤사라를 중환자실로 이송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윤사라다!”
“저기부터 찍어!”
기자들은 얼른 태수에게서 돌아서서 윤사라를 찍기 시작했다.
다행히 윤사라는 얼굴까지 이불로 덮은 상태라 신분이 공개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윤사라를 쫓아가고서야 태수도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6층 소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온몸이 정말 축축 처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였다.
태수는 어기적거리며 간이침대로 향했다. 통상 보호자들이 머무는 낮고 딱딱한 침대였다.
지금은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간이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운 후였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태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힘이 없어 웃음소리는 낮게 울렸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만 했다. 태수도 그만큼 자신하지 못한 수술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도 이젠 편안하게 떠올릴 만큼 수술 성과가 좋았다.
물론 윤사라가 중환자실에서 무사히 깨어나야 하고, 그다음 회복 경과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태수가 웃을 수 있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어려운 수술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수술을 집도한 태수에게 가장 큰 격려가 되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태수의 눈이 가물가물했다.
이제 와 느끼는 거지만 진짜 힘든 수술이었다. 어떻게 수술했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만큼 혼신을 다해 집중했으니 육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쳤다.
이대로 눈만 감으면 될 것 같다.
윤사라가 마취에서 깨어나면 공우혁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을 터였다.
그래도 그 시간까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눈을 거의 다 감았을 무렵이다.
번뜩!
태수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반동을 이용해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이제라도 기억해 낸 게 천만다행이었다.
태수는 아차 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야 할 사람이 있었던 탓이다.
수술하기 전날 소식을 알려 달라고 했던 박성민의 당부가 기억 난 탓이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수술 전에는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수술 끝난 후에도 연락하지 않는다면 미안한 일이다.
윤사라와 같이 여행을 다녀오고, 함께 고생하며 추억을 만든 박성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태수는 바로 박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박성민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여보시다. 너는 여보시냐?”
“네, 무지하게 여보십니다.”
“어쭈, 우리 태수가 이젠 나의 기똥찬 말발에 상당히 태연하게 반응해 주시네. 목소리에 힘이 쭉 빠졌는데 기분이 좋은 걸 보니까…….”
“좋은 걸 보니까.”
태수가 말꼬리를 잡자 박성민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밤에 체조했구나?”
“네? 아니, 선배, 그게 아니라.”
“알아, 나도 다 알아. 그래, 너도 슬슬 건강관리해야지. 내가 먼저 나이를 먹어 봐서 아는데 미리미리 관리해야 된다니까.”
“…….”
전혀 엉뚱한 추측을 하고 결론을 내는 박성민의 목소리가 태수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런 태수의 감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박성민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대수술을 앞둔 의사들은 특히나 자기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해. 그게 환자를 위해, 더 나아가 범지구적인 평화를 위해…….”
“선배.”
“그래, 그렇지. 이 선배도 위하고…… 는 아닌 거 같은데. 목소리는 갑자기 왜 깔아?”
횡설수설하던 박성민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태수는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일단 이야기부터 꺼냈다.
“수술 성공했습니다.”
“그렇지. 수술 성공했겠지. 내 밑에서 배운 태수가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좌우간 성공을……. 그런데 너 누구 수술 잡힌 거 있었냐?”
“말씀드린 거 같은데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마드무아젤 윤사라 양밖에 더 있어? 그리고 사라는 모래 수술한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박성민은 명확하게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태수도 그 기억력을 의심하진 않기에 이제야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아침에…….”
태수는 수술에 대해 기억나는 부분들만 간추려서 이야기했다. 솔직한 이야기로 어떻게 수술했는지 명확한 기억이 없던 탓이다.
그렇게 한참 태수의 이야기가 이어진 후였다. 박성민의 확 바뀐 억양의 말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아침에 급성 간경화로 응급 터져서 수술실 들어갔고, 조금 전에 나왔는데 수술은 성공했다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결과로는요. 더 정확한 건강 상태는 사라가 깨어난 후에 확인이 될 거 같습니다.”
“음, 다시 말하면 연락 좀 해 달라던 이 선배의 간곡한 부탁에도 너는 응급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그냥 쏠랑 수술실로 직행했다는 이야기인데…….”
“아니, 선배, 그런 게 아니라요.”
오해를 하는 것 같아 태수가 해명하려는 사이였다. 조금 가라앉은 박성민의 목소리가 한 박자 빠르게 들려왔다.
“그렇지. 우리 태수의 선조치 후보고 인생은 변함이 없어. 그냥 쭉 외길이야.”
“많이 섭섭하신 거 같은데, 그때 상황이 말입니다…….”
“쉿, 거기까지. 더 이상의 이야기는 이미 들었으니까 더 할 필요 없어.”
“…….”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다.
박성민이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윤사라와의 인연 때문에 그런지 그게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앞선 박성민의 말대로 더 이야기해 봐야 오해만 쌓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태수는 말없이 박성민의 잔소리만 기다렸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이 있었다.
예상외로 차분해진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했어.”
“네?”
“수고했고 장하다고, 인마.”
“선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좀…….”
태수가 쩔쩔 매자 박성민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너 지금 설마 내가 미리 연락 못 받았다고 그냥 툴툴거리면서 대충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까?”
“와, 우리 태수 사람을 뭐로 보고. 나 박성민이야. 신속대응센터의 에이스 박성민이.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누구보다 우선시하는 박성민이라고.”
박성민의 목소리를 들으니 짓궂은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았다.
태수가 가만히 있자 박성민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점점 격정으로 변해 갔다.
“새끼. 넌 인마, 에그 자식, 하하. 이 새끼.”
“선배.”
“진짜 수고했다, 수고했어. 빵 아저씨도 이야기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수술인데 잘 해냈다고.”
박성민의 목소리로 듣는 칭찬.
그 진심을 전달받은 태수의 마음이 뭉클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서요.”
“무슨 소리! 정민수, 그 자식이 수술했으면 내가 불안해서 한잠도 못 자겠지만, 너는 아니지. 니가 수술한 사람이 진짜 최악만 아니면 그 사람은 무조건 살아.”
“…….”
대답하지 못하는 태수의 얼굴에는 어느새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조건 산다.
그 말속에 깃든 믿음이 얼마나 큰지 느껴진 탓이다.
태수가 대답을 쉽게 내뱉지 못하자 박성민의 조금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말이 없어? 이 선배의 무조건적인 믿음에 혹시 눈물, 콧물 짜고 있냐? 야, 태수야, 너 진짜 그런 건 아니지?”
“안 웁니다.”
“에이, 너 우는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진짜 안 울었다니까요.”
“자식. 지금 네 뺨에 흐르는 눈물은 그럼 하품하다가 흘러내린 거냐?”
박성민은 목소리만으로 추측하는 내용을 마치 사실처럼 이야기했다. 이미 겪을 대로 겪은 태수는 그런 이야기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하품도 안 했고, 눈물도 안 흘렸습니다.”
“진짜 매정할 정도로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이럴 때는 인마, 흑흑, 우매한 제가 선배의 가르침을 이제야 이해하고 감동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해야지.”
“그건 민수 시키세요. 걔 그런 거 잘합니다.”
“넌 이 자식, 내려오기만 하면 좌우간 술독에 빠뜨려서 2박 3일 동안 푹 숙성시킬 줄 알아, 인마.”
박성민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지자 태수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좀 비싼 술로 숙성시켜 주시면 안 됩니까?”
“좋다. 까짓것 양주 까자. 안주도 아주 빵빵하게 쏠게.”
“기대해도 되는 거죠?”
태수의 은근한 물음에도 박성민은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럼 기대 안 하고 내려오려고? 기대 가득 채워서 내려와!”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대수술 끝내고 무지하게 피곤할 우리 태수는 이만 꿈나라로 직행하도록.”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냐.”
박성민의 기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났다.
태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마음이 편해졌다. 통화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박성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겁게 중심을 잡아 주는 이야기들.
그게 박성민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었다.
이야기를 끝내서 그런지 또랑또랑하던 눈빛이 다시 흐리멍덩해졌다.
이젠 진짜 자야 할 것 같았다.
풀썩.
태수는 쓰러지듯이 간이침대에 다시 누웠다.
천장의 형광등이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피곤한 지금은 그 빛이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다.
불을 꺼야 하는데.
생각은 그랬지만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밝던 형광등 불이 꺼졌다.
“자식, 아무리 피곤해도 옷은 좀 벗고 자야지.”
들려오는 건 귀에 익은 유병태의 목소리였다.
태수는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피곤해.”
“안 잤냐?”
“자려고……. 너는?”
“나도 자려고. 도저히 피곤해서 운전을 못하겠더라고. 잘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들어온 거야.”
“…….”
태수에게서 답이 없자 어두워진 소회의실에 유병태의 목소리만 울렸다.
“야, 자냐?”
“…….”
“자면 잔다고 말은 하고 자야지.”
“…….”
“치사한 자식……. 진짜 수고했다. 푹 자라.”
유병태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소회의실은 규칙적인 낮은 숨소리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