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51
00954 954화
태수는 한 일도 없이 죄인이 된 것 같아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도 얘 꼴이 이게 뭐냐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
“저도 얼굴이 반쪽인데요.”
태수가 억울한 마음에 반항해 봤지만 김동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뭐 그런 걸로 앓는 소리를 해.”
“더 혼내 주세요.”
이선정 간호사는 김동석에게 찰싹 붙어서 이때다 싶었는지 재촉했다. 그러나 김동석은 그런 이선정 간호사를 바라보며 장난기 그득 실린 윙크를 날렸다.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해.”
“벌써 끝이에요?”
“뼈빠지게 마음고생한 사람인데 적당히 해야지. 안 그런가?”
김동석이 미소 띤 얼굴로 묻자 태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밝게 대답했다.
“그럼요. 진짜 적절하셨습니다.”
“그래도 얘 얼굴이 많이 상하긴 했어. 최 선생도 그렇고 말이야. 참 소문이라는 게 무섭다더니.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최 선생 말고, 선정이 말이야.”
김동석이 농담을 던지자 태수가 순간 멍한 얼굴로 변했다.
그제야 박지석이 태수 옆으로 다가왔다.
“휴가 온 거야?”
“네……. 아차차, 같이 온 일행이 있는데.”
“저 아이 말이지? 우리도 알아. 아까 이장 형님도 말씀하셨고.”
“그러셨군요. 좌우간 편하게 좀 쉬러 왔습니다.”
끄덕.
태수가 대답하자 박지석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윤사라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웬일인지 까마득히 어린 윤사라에게 존댓말을 썼다.
“반가워요.”
“아, 네. 안녕하세요. 윤사라예요.”
윤사라는 낯선 어른들의 엉뚱한 분위기에 긴장하고 있다가 풀어졌는지 어색하게나마 인사했다.
박지석은 그 눈치를 챘는지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첫 만남이라 계속 존대를 해 줬다.
“여기 최 선생이랑 선정이랑은 워낙 친해서 하는 장난이니까 너무 놀라지 않아도 돼요.”
“…….”
윤사라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는지 빙긋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때 박성민이 슬쩍 나섰다.
“그런데 두 분,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저기 멀리서 오실 때부터 인사했는데 저는 아예 보이지도 않으시는 거냐고요.”
“그럴 리가 있나. 박 선생, 잘 지냈지? 듣자 하니 요리사 한다며.”
“그거 이장님이 말씀하셨죠?”
“어. 아주 눈물 콧물 빼 가면서 요리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 다만 위생상 장사는 글렀다고 하시던데.”
“진짜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전할 수가 있는 겁니까. 사실은 말입니다…….”
박성민이 얼른 진실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박지석은 슬슬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처음부터 다 잘하나. 요즘 요리사도 유명해지면 돈 많이 번다니까 열심히 해 봐.”
“저 의사라니까요.”
“의사 출신 요리사는 좀 신선하네.”
“저기, 아저씨, 제 말 좀 들어 주실래요? 제가 그러니까…….”
박성민이 갑갑한 마음을 토로하려 할 때 박지석이 끼어들었다.
“그래.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을 텐데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면서 듣자고.”
“그게 아니라니까요.”
“알았다니까.”
박지석이 귀찮다는 손짓까지 하자 박성민은 더욱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그러나 박지석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태수에게 향해 있었다.
“요리사까지 대동하고 왔으면 맛있는 건 많이 먹겠네.”
“모셔 오기는 했는데 도대체 기대가 안 되네요.”
“저 성격에 요리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정 먹을 거 없으면 우리 집으로 와. 그리고 그보다 이거부터 받아.”
턱.
커다란 비닐봉지였다. 얼떨결에 태수가 받아 든 순간 신선하다 못해 팔딱거리는 생선이란 느낌이 들었다.
미처 입도 열기 전에 박지석이 말했다.
“얼음 좀 넣어 놨으니까 금방 상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너무 오래 밖에 있으면 장담하지 못하니까 적당히 놀고 들어가.”
“아니, 얼굴 보자마자 이런 걸 주십니까?”
“시답지 않은 소리 말고. 내일 아침에 집 앞에 먹을 것 좀 가져다 놓을 테니까 괜히 장 본다고 나가서 헛돈 쓰지 말고.”
박지석은 태수를 향해 뚱하니 쏘아붙였다. 말과 달리 눈빛을 보니 아내인 이민경의 병을 봐주고 수술까지 해 준 걸 아직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수는 그 뜻이 담긴 눈빛을 봤기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주시려고요.”
“내가 배에서 내릴 때까지는 줘야지.”
“아저씨, 그건…….”
“쓰읍. 조용.”
“…….”
인상까지 애써 찌푸리는 박지석을 보니 태수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툭툭.
박지석은 태수의 어깨를 다독이며 다시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넘어가.”
“자꾸 이러시면 저도 당연하게 생각할 거 같은데요.”
“그러라고 이러는 거야. 하하. 자, 그럼 일단 인사는 했으니까 내일 보자고. 형님, 갑시다.”
박지석이 먼저 돌아서자 김동석도 이선정 간호사와 인사하고 같이 움직였다.
태수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박성민이 다가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정이 참 무섭긴 무서워.”
“마음이 뿌듯하네요.”
“저분들을 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절대 잘못된 건 아닌 거 같단 말이야.”
“그래서 더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더 열심히 해야지.”
박성민의 확 바뀐 말투에 태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이선정 간호사는 윤사라의 옆으로 다시 돌아왔다. 윤사라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 뭔가 느낌이 왔는지 나지막이 말했다.
“언니, 여긴 진짜 멋진 곳 같아요.”
“그렇지. 그래서 선생님들하고 나도 정말 좋아하는 마을이야.”
“저도 진짜 좋아질 거 같아요.”
정이 그리운 윤사라의 말에 이선정 간호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마을 사람들과 인사하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요새 아픈데 없으시죠?”
“팔팔해.”
“다행입니다.”
태수가 흥겨운 기분으로 말할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반갑게 맞이해 주고 윤사라를 반겼다.
다들 신문을 봐서 윤사라의 성장 배경을 알고 있는지 예민할 수 있는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피하기도 했다.
연륜이 준 선물이다.
시골사람들이기에 도리가 뭔지는 더 잘 알았다.
그날 저녁 메뉴는 박성민이 눈물 흘려 가며 준비한 양파가 잔뜩 들어간 샐러드와 바비큐였다.
“죽인다.”
“야 최태수. 이 선배님이 죽어라 한 요리야.”
“압니다.”
“남기면 내일 네 녀석 사진에 검은 줄 두 개가 새겨질 줄 알아.”
박성민이 짐짓 화난 척하며 경고했다.
박지석이 선물해 준 생선도 불판에 직접 구워 맛있게 먹었다.
태수는 먹는 와중에도 윤사라를 유심히 체크했다.
다행히 윤사라의 몸 상태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차로 이동하고 장시간 걸어 다녀서 피곤함을 느낄 뿐이었다.
낯빛까지 신경 써야 했던 저번 기억에 비하면 정말 근심을 덜어 낸 즐거운 여행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모두 내일을 기약하며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 오후.
태수와 일행들은 마을회관에 초대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조촐한 잔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어른들은 막걸리도 한잔 걸쳤지만 태수와 박성민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환자가 있는 탓이었다.
반면에 이선정 간호사와 윤사라는 마을 아주머니들 틈바구니에 끼어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많은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어색해하던 윤사라도 점점 미소를 되찾고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호호.”
쑥스러움을 잊은 듯 윤사라의 입에서 해맑은 웃음이 터졌다.
윤사라의 재롱에 마을 아주머니들은 더욱 즐거워했다.
태수는 내심 걱정했지만 잘 어울리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식사 시간이 상당히 길어졌지만 누구도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기남 이장이 살짝 벌게진 얼굴로 태수를 툭 쳤다. 깜짝 놀란 태수가 얼른 바라보자 이기남 이장은 어느새 일어나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의미인데.
어안이 벙벙한 얼굴도 잠시였다. 이기남 이장과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다. 윤사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 줄 수 있는지 물어볼 순간이기도 했다.
알아서 찾아온 기회를 잡으려 태수는 바로 이기남 이장의 뒤를 쫓았다.
마을회관을 나선 이기남 이장은 태수를 뒷마당으로 이끌었다. 다들 안에서 먹고 마시느라 뒷마당은 조용했다.
이기남 이장이 긴 의자에 앉아 담배를 한 대 입에 물며 태수에게 물었다.
“담배 핀다고 잔소리할 거냐?”
“말린다고 들으실 분입니까. 적당히만 태우십시오.”
“그래야지.”
만족한 얼굴로 담뱃불을 붙인 이기남 이장이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태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담배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데도 태수는 애써 만류하지 않았다.
고된 일에서, 또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는 해방구라는 걸 알고 있기에 분위기 깨면서까지 뜯어말리고 싶지 않았다.
다만, 많이 피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태수는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윤사라가 마을에 정착한 후의 일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에 바로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사이 담배 한 대를 모두 피운 이기남 이장이 꽁초를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던지며 태수에게 물었다.
“내일 돌아간다며?”
“네. 아마 점심 먹고 출발할 거 같습니다.”
“기왕 놀러 온 거 시간 좀 넉넉하게 받아 오지.”
“저희 일이 그렇죠, 뭐.”
태수가 멋쩍은 얼굴로 대답하자 이기남 이장이 묘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할 말 없어?”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부르신 거 아닙니까?”
“젊은 놈이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야.”
“무슨…….”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볼 때 이기남 이장이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라 말이야, 애가 참 밝아. 자라 온 환경이 좋지 않을 텐데 그러기가 쉽지 않지.”
“그렇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애가 옴팡지게 아팠다가 이제 막 낫기 시작했는데 혼자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나.”
“…….”
속 깊은 그의 이야기에 태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윤사라를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으러 이쪽으로 여행을 왔다지만, 무작정 부탁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기남 이장이 시선을 돌려 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쟤는 돌아갈 곳이 있나?”
“솔직히 마땅치는 않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고?”
이기남 이장이 먼저 묻자 태수는 멈칫하며 일단 말을 돌렸다. 대화의 흐름상 뭔가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탓도 있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먼저 말해도 되나?”
“말씀하십시오.”
태수가 정중하게 답하자 이기남 이장이 덤덤하게 말했다.
“두고 가.”
“네?”
“물론 사라한테도 물어봐야겠지만 우리들은 어제 결정을 내렸어. 최 선생 집도 있겠다, 밥도 잘 먹는 거 보니까 입맛 걱정도 없을 거 같고 말이야.”
“음.”
태수가 낮은 침음성을 흘리자 이기남 이장이 진중하게 물었다.
“왜, 우리가 저 애 하나 건사하지 못할까 봐 그래?”
“사실은 저도 여기로 데려올 때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입니다. 먼저 말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태수가 걱정을 내보였지만 이기남 이장은 오히려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웃고 있잖아. 사라의 재롱을 보면서 다들 행복해하고 있다고.”
“…….”
“마을에 이렇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다들 사라와 함께 지내는 게 좋다고 했고, 학교가 좀 멀지만 우리가 등하교시켜 주면 되고.”
“그거야 뭐…….”
태수가 말끝을 흐리자 이기남 이장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우리 마을 남자들 성격이 보통이야? 나이는 먹었어도 젊은 놈들 한두 명은 끄떡없어. 혹시라도 사라한테 찝쩍거리면 국물도 없겠지.”
“성격이 다들 보통은 넘으시죠.”
“그러니까 문제 될 게 없다는 거야. 마을에 애 목소리 들리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고. 다들 좋아하는데 더 말할 필요가 있겠어?”
이기남 이장은 이 자리에서 아예 확답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태수는 결정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