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85
00988 988화
그때 태수와 김혁권, 박성민의 시선이 닥터 오즈마에게로 향했다.
그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세 사람이 쉬고 있을 때 연락을 받았어.”
“…….”
“좌우간 적십자와 NGO에서도 유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정부군에서는 타머로 이동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입장이야.”
닥터 오즈마의 말에 태수가 어이없이 바라봤다.
“자국민을 치료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는데 그런 소리가 나온답니까?”
“…….”
“그리고 NGO에서는 이제 아무런 조치도 없이, 이렇게 모여 이야기하면서 제임스에게서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겁니까?”
태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닥터 오즈마는 그런 태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협상 결렬로 인해 정부군과 반군 모두 상당히 예민해진 상황이니까. 그래서 NGO 윗선에서도 타 지역으로 이동을 자제하란 권고까지 내려왔고.”
“그냥 안전한 곳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거네요.”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된 거지.”
닥터 오즈마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굳어진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그사이 태수는 자신이 진정 나설 때인지 다시 생각했다.
결론은 간단하게 나왔다.
자신은 ID카드도 발급받은 정식 NGO 의사다.
즉, 여기서 충분히 의견을 내도 되는 위치란 이야기였다.
태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닥터 미첼.”
“말씀하시죠, 닥터 최.”
닥터 미첼이 대답하자 낯선 NGO 의사들의 시선이 태수에게 집중되었다.
닥터 최라면?
“카슈미르의 영웅?”
“저 젊은 의사가?”
“제임스 앞에서 집도한 몇 안 되는 의사라던데.”
얼굴을 마주한 사이는 아니지만 여기저기에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태수는 그런 주변의 웅성거림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후속 조치는 어떤 게 준비되고 있습니까?”
“그건…….”
“설마 이대로 손 놓고 제임스와 그 안에 있는 다른 의료진들, 그리고 환자들도 방관하시겠다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틀립니까?”
태수는 일부러 확신한단 말투로 이야기했다.
닥터 미첼을 압박하기 위한 표현법이기도 했다.
태수는 그만큼 제임스의 소식과 건강상태에 온 신경이 집중된 상태였다.
태수는 이미 카슈미르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
빌어먹을 이념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도 숱하게 봐 왔다.
자신이 전쟁을 멈추게 할 순 없지만, 최소한 이유 없이 다치고 아픈 사람들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수는 강렬한 눈빛으로 닥터 미첼을 쏘아봤다.
김혁권은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박성민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말에는 순종하던 태수였다.
그런 태수가 의사 중에 의사라는 NGO의 의사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건 닥터 미첼을 포함해서 누구도 태수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태수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태수의 위상이 얼마나 격하되었는지, 또 김혁권이 그동안 왜 불만을 표했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김씨, 아니 혁권 씨, 내가 그동안 오해했습니다.”
“이 인간이. 이 중요한 순간에 왜 헛소리를 하고 있어.”
“오해해서 미안하다니까요.”
“이 양반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상황 파악 좀 하면서 사과해.”
김혁권이 인상을 벅벅 썼지만 박성민은 여전히 미안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작게 투덕거리는 사이 태수와 NGO 의사들 사이에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특히 닥터 미첼은 태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갑해진 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닥터 미첼, 진짜 후속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겁니까?”
“세운 게…… 없을 리가 없죠.”
“그게 뭡니까?”
태수가 나지막이 묻자 닥터 미첼의 표정이 더더욱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눈빛을 차갑게 빛냈다.
“우선 닥터 최, 지금부터 말씀드릴 테니까 좀 앉아 주시겠습니까?”
“…….”
스윽.
태수는 대답보다 행동으로 보였다.
그만큼 지금은 말 하나에도 신중함을 보였다.
그건 다른 NGO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수가 누군지 확인한 후로는 다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텐트 속은 많은 사람들이 자리했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때 닥터 미첼이 현황판에 걸린 시리아의 커다란 지도를 크게 뒤로 넘겼다.
그러자 일부 지역이 확대된 다른 지도가 모두에게 보였다.
태수는 지도 보는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카슈미르에서 라이언 중사가 입원했을 당시 부대원들에게 독도법에 대해 설명할 때 정확하게 들어 둔 탓이었다.
덕분에 훈련소에서 독도법 교육에선 최고 점수를 받기도 했다.
지도는 현재 NGO 캠프인 마단에서 제임스가 고립된 타머까지 가는 이동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닥터 미첼은 지도를 모두에게 보이며 말했다.
“다들 지금 설명을 들으셨다시피 마단에서부터 타머까지 간략하게 표시해 놓은 지도입니다.”
“…….”
“현재 NGO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중간 지점인 타르트만까지 차량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기 M4 고속도로에서 내려 강을 따라 타머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겁니다.”
닥터 미첼이 계획을 이야기하자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출발 인원과 지원 장비, 지원 인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선 출발 인원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
닥터 미첼의 심각한 목소리에 다들 긴장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괜한 공포감을 조성할 리가 없던 탓이다.
집중한 의사들을 둘러보며 닥터 미첼이 이어서 말했다.
“지원 장비는 차량 한 대, 지원 인력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걸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협상 결렬로 NGO에선 공식적으로 타 지역 이동을 자제하라고 권고하고 있다고요.”
“들었죠. 그건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말하자 닥터 미첼이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비공식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
“정부군에게 반군 지역으로 들어간다고 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반군들에게 정부군 지역을 지나갈 테니 배웅 나와 달라고 할 수도 없고요.”
닥터 미첼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듯 텐트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닥터 미첼은 약간의 여유를 둔 후에 이야기를 이어 갔다.
“최소의 인원으로, 최소한의 준비만 하고 조용히 이동해야 합니다.”
“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머로 가던 중, 혹은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변고를 당해도 더 이상의 지원을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닥터 미첼도 어려운 이야기라 억지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때 다른 의사가 슬쩍 손을 들며 물었다.
“시리아 정부군에 비밀리에 협조 요청을 하는 건 안 됩니까?”
“결국 반군들을 치료해 준다는 인식만 심어 주게 되고, 경계가 더 심해지겠지요.”
“반군들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거는요?”
“그들 자체가 고립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정부군의 경계가 강화된 만큼 반군들도 타머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고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닥터 미첼의 말에 다른 의사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결론은 사방이 적이란 이야기다.
모두 환자를 위해서 경제적 여유 등 모든 걸 버리고 NGO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속에 자신의 목숨은 해당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삶에 대한 애착은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 점이 모두의 발목을 잡았다.
각자 생각이 복잡한지 텐트 속은 또다시 고요해졌다.
상황을 모두 들은 태수와 김혁권, 박성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어떤 이야기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닥터 미첼이 말했다.
“이번 일은 누군가를 선별하지 않고 자원으로 인원을 모집할 겁니다. 출발 일시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
“이 자리에서 자원을 받지도 않을 겁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전 이 텐트에서 24시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닥터 미첼 또한 쉽게 자신이 가겠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도 생각을 깊게 해 봐야 할 일인 탓이다.
누구도 호기롭게 손을 들지 않았다. 회의가 끝났다는 걸 알기에 하나둘씩 텐트를 나설 뿐이었다.
태수와 김혁권, 박성민도 지정받은 텐트로 돌아왔다.
야전침대에 서로를 향해 걸터앉아 있지만 오가는 대화 소리는 없었다.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각자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수다스러운 박성민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태수는 문득 이 텐트 속이 갑갑하단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끄덕.
김혁권과 박성민이 고개만 끄덕이자 태수는 천천히 텐트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이제 막 어둠이 찾아오고 있는 캠프 내부를 걸었다.
난민들의 텐트가 있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쪽이었다.
의료용 텐트를 지나자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얼기설기 세워진 목책이 경계를 분명히 해 줬다. 이 목책을 넘어서면 NGO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단 뜻이기도 했다.
이곳 난민들에게는 이 경계선이 요단강과 다름이 없을 터였다.
태수를 포함한 NGO 의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카슈미르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기에 그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태수는 목책까지 다가갔다.
툭.
허리 높이의 말뚝에 손을 얹은 태수가 광활한 사막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 그런지 저 멀리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지랑이들이 뒤섞여 신기루 같은 환상을 만들어 냈다.
아니, 태수가 신기루라는 현상을 핑계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매형, 수현이.
먼저 가족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아스라이 사라졌다.
그다음으로 석정현 이사장, 하석준 팀장, 정민수 등등 그동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곡리 이기남 이장을 포함한 어른들과 주미성, 주영수, 윤사라도 떠올랐다.
그렇게 머릿속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보던 중이었다.
카프레네, 스미스.
마지막으로…….
제임스.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태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묵히고 묵혔던 첫마디가 밥 타령이었다.
태수는 자신이 한 말에 어이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진짜 궁금했다.
밥은 먹었는지, 부상당했다면서 치료는 제대로 받고 있는 건지, 혹시 그 몸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건 아닌지. 그 모든 걸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게 태수가 장장 하루란 시간 동안 비행기로 이동해서 이곳에 도착한 이유였다.
그런 태수도 이번만큼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카슈미르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PKO와 NGO가 뒤에서 지원해 줬다.
그리고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의 싸움이기에 양측 모두 민간인들의 희생을 줄이고 싶어 했다.
지금은 같은 국가에 소속된 양측 진형이 벌이는 전쟁이다.
내전.
말 그대로 안에서 싸우는 중이다.
정부군은 누가 반군인지 정확한 정보가 없기에 민간인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여길 터였다.
반군은 정부군이라면 이를 갈고 무차별 발포할 게 확실했다.
게다가 NGO의 지원도 없었다.
맨몸으로 어디서 날아올지도 모를 총알들을 뚫고 타머까지 가야 했다.
그리고 타머에 도착했다고 안심할 수도 없을 터였다.
언제 어떻게 정부군의 공격이 감행될지 모른다.
그런 아수라장에 뛰어드는 일이다.
태수도 목숨은 하나였다.
두렵지 않다면?
말짱 거짓말이다.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면?
안전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평생 마음속에는 사라지지 않을 멍울이 잡힐 게 분명했다.
그래서 더욱 갈등됐다.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이동하는 도중에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제임스가 부상을 당한 건 무려 5일 전.
그동안 어떤 조치도 받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는 진짜 힘들어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