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87
00990 990화
태수가 오히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안 싸우십니까?”
“안 말려?”
“싸우신다면서요.”
“그렇지.”
“싸우세요.”
태수가 거드는 손짓을 하자 김혁권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전에는 싸우지 말라면서요. 환자도 많은데 왜 환자를 또 만드냐고.”
“여긴 의사 많아요.”
“진짜 싸워요?”
“네. 시간은 계속 지나고 있습니다.”
태수가 다시 손목시계를 바라보자 김혁권과 박성민이 허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젠장.”
“칫.”
둘 다 기운이 빠졌는지 야전침대에 걸터앉았다.
태수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쉬는 시간 아닌데요?”
그 말에 김혁권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안 싸워요, 안 싸워.”
“저 자식이 은근히 고단수야. 차라리 싸우지 말라고 뜯어말리는 게 더 인간적이라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참 사람 기운 빠지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쟤가 이제 지도 전문의라고 저러는 겁니다. 딱 봐도 건방져 보이잖아요.”
박성민이 쏘아붙이자 김혁권이 공감하는 표정이다.
“저런 후배 두셨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지.”
“말도 마세요. 내가 아주 저놈 때문에 헬기를 몇 번을 탔는지, 꼽으려면 한 손이 부족합니다. 무슨 보건의가 심심하면 전화해서 헬기 띄우래.”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은 말을 주고받으며 태수를 욕했다.
태수야 좌우간 싸움을 말렸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태수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왜 싸우려고 하신 겁니까?”
“…….”
“…….”
두 사람 모두 태수의 시선을 피하고 얼굴까지 살짝 붉어졌다. 진짜 별거 아닌 모양이다.
태수는 알면서도 일부러 재촉해서 물었다.
“심심해서 싸우시려고 했던 건 아닐 거 아닙니까.”
“괜히 다리 떨면서 신경 쓰이게 하잖아요.”
“사람이 고민하면 다리도 좀 떨고 그러는 거지. 그쪽은 괜히 손가락 두둑두둑 관절 꺾기나 하고 말이야. 그게 더 안 좋은 거 몰라요?”
두 사람이 한 마디씩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운데 자그마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한 모양이었다.
태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러시면 남들이 얼마나 흉을 보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신속대응센터의 히어로인 이 박성민이가, NGO 의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이 박성민이가 여기서 간병인이랑 싸우는 게 말이 되냐고.”
“누가 간병인이야? 그리고 히어로? 나 참.”
“뭐야, 그 시답지도 않단 어이없는 표정은? 김씨 아저씨, 그동안 한국 사정을 몰라도 그렇지, 그건 아니지.”
“네네, 영웅이십니다. 네.”
김혁권이 대충 흘려 넘기자 박성민이 한 번 더 울컥했다.
“진짜 이 사람이, 내가 태수 앞이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내 손에 피떡이 되어 봐야 아, 이 떡은 먹는 떡이 아니구나, 할 거야?”
“네네, 피떡 많이 드세요.”
“아, 뒷골이야. 진짜 저 아저씨 오늘 사막에 한번 묻어 봐? 여기 묻히면 찾지도 못하는 걸 내가 직접 경험하게 해 줘야겠냐고.”
“저러다가 맞으면 덜 아픈가?”
“안 되겠다. 일어나. 진짜 일어나라고. 나 지금 진지해.”
두 사람이 또다시 티격태격하려고 했다.
태수가 중간에 끼어 있어 방금 전처럼 독기 서린 눈빛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어 투닥거리는 정도였다.
오랜 시간 이들과 함께한 태수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태수가 눈빛을 반짝였다.
마침 혼자 가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면 핑계가 좋았다.
두 사람은 위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태수의 바람이다.
그 마음을 꽁꽁 숨긴 그는 싸늘하게 으르렁거렸다.
“언제까지 계속 그러실 겁니까?”
“…….”
“진짜 여기가 한국이나 미국인 줄 아시는 겁니까? 아니면 제임스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신 겁니까?”
“…….”
두 사람이 대답이 없자 태수는 자신의 야전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풀어 놓지도 않은 짐을 들고 싸늘하게 말했다.
“두 분하고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을 거 같으니까,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니, 태수야.”
“닥터 최.”
두 사람이 놀라 불렀지만 태수는 이미 텐트 입구로 향하는 중이었다.
“진짜 이젠 지겹습니다. 그러니까 두 분 일은 이제 두 분이 알아서 하세요. 저 찾지 마시고요.”
휙.
태수는 텐트 가름막을 거칠게 걷으며 밖으로 나갔다.
밖에 선 그는 텐트를 바라봤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김혁권과 박성민.
태수가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간 이후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에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분명히 무조건 따라올 걸 알기에 사선으로 그들을 내몰 순 없었다.
물론 태수도 죽을 생각으로 가는 건 아니다.
다시 돌아온다.
꼭.
그 마음으로 그는 텐트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임스랑 같이 돌아온다.”
이내 돌아선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태수는 바로 닥터 미첼이 기다리고 있을, NGO 캠프에서 가장 큰 텐트로 향했다.
막상 움직이려고 하니 출발하기 전에 준비할 게 산더미였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닥터 미첼이 놀란 시선으로 태수를 바라봤다.
가방을 들고 온 모습을 보고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가신다는 거네요.”
“…….”
“알겠습니다.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닥터 미첼이 먼저 두 손 들자 그제야 태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태수가 반대편에 앉으며 닥터 미첼에게 말했다.
“타머까지 자세한 이동 경로부터 다시 듣고 싶습니다.”
“물론 그래야죠. 여기.”
닥터 미첼이 손을 들자 아랍 계열의 청년이 다가왔다.
의사 가운이 아니라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사무직원인 것 같았다.
청년 사무직원은 태수에게 다가오자마자 손부터 내밀었다.
“마훔입니다.”
“태수 최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난 후 태수는 닥터 미첼이 그를 부른 영문을 몰라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마훔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를 꺼냈다.
그 종이에는 태수가 가야 할 타머까지 이동 경로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여기 보시면…….”
마훔의 설명이 자세하게 이어졌다.
태수는 조금 놀랐다.
타머로 향하는 길을 정말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던 탓이다.
주변의 지형지물, 몸을 은닉할 장소, 정부군의 발길이 닿지 않을 거라 예상되는 지점까지.
그의 설명이 얼마나 자세한지 마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태수가 놀란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자 닥터 미첼이 말했다.
“2년 전에 타머에서 탈출한 청년입니다.”
“아…….”
그때 마훔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전 정말 운 좋게 NGO에 올 수 있었죠. 영어도 여기서 배운 거고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요. 고생은요.”
마훔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타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서글퍼지는 걸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묻기 전에 닥터 미첼이 말했다.
“내전으로 가족들을 모두 잃고 홀로 타머에서 탈출했답니다. 그 이동 경로도 마훔이 탈출했던 경로를 그대로 다시 그린 거고요.”
“음.”
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온 길이다.
마훔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겪었을 정신적 고통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마훔을 본 태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훔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신의 품으로 돌아갔으니까…… 행복할 겁니다.”
“…….”
“그런데…….”
마훔이 말끝을 흐리자 태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설명드린 대로만 가시면 될 겁니다. 탈출할 때도 괜찮았으니까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하셔야죠.”
“…….”
“제가 타머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누가 언제 다시 거길 들어갈지 기약이 없잖습니까.”
태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마훔은 타머에 들어가길 꺼려했다. 아니라면 지도를 건네는 게 아니라 안내를 맡았을 터였다.
그만큼 돌아가기 싫은 곳이라지만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훔은 크게 갈등하고 있었다.
태수의 말이 옳다. 누가 다시 목숨을 걸고 그곳으로 들어간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돌아간다?
내전이 끝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곳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복잡한 마음이지만 마훔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전 할 게 좀 남아서 이만.”
“…….”
마훔이 떠나가자 태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속내를 말하지 않겠다면 구태여 쫓아가서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때 닥터 미첼이 말했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할 말이 있다면 출발 전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잘 고민해 보라고 하세요.”
“그건 전하겠습니다. 운전도 그가 해 주기로 했으니까 차분하게 생각해 보라고 하지요.”
끄덕.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태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가져갈 의약품을 챙겨야죠.”
“일단 준비는 했습니다.”
닥터 미첼이 텐트 한쪽에 곱게 놓인 커다란 가방을 가리켰다.
태수는 가방을 가져와 그 속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주사제였다. 빈 주사기와 다양한 종류의 주사제만으로 가방의 반 정도가 채워져 있었다.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닥터 미첼이 그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야전병원이 어떤 상황인진 정확하게 몰라도 기본적인 의료 물품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빈 공간이 많은 거 같습니다.”
“그건 닥터 최의 가방을 넣을 자리입니다만.”
“제 가방은 앞으로 메도 되는 거니까 좀 더 약을 넣도록 하시죠.”
“그럼 무게가 상당할 겁니다. 장시간 이동하면 빨리 지칠 텐데요.”
닥터 미첼이 걱정을 보이자 태수가 슬쩍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이 근육이 풍선처럼 보이시는 건 아니죠?”
태수가 미소를 짓자 닥터 미첼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의약품 가방은 태수의 요청대로 몇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각종 상처에 바르는 연고나 알약으로 일정 부분을 채웠다. 열악한 의료 환경이라면 꼭 필요한 의약품이다.
카슈미르에서 지겹도록 경험했던 일이라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잠시 후, 태수는 더 중요한 걸 생각해 내곤 닥터 미첼에게 즉시 요청했다.
“IV세트하고 빈 수혈팩, 마취제와 진통제를 중점적으로 챙겨 주십시오.”
“진통제야 그렇다고 치지만 마취제요?”
“닥터 이작손에게 기본적인 마취에 대해서는 배웠습니다.”
태수 설명에 닥터 미첼이 진정으로 감탄했다.
“진짜 멀티플레이어시네요.”
“위기에 몰리면 다 하더라고요. 그리고 뭐든지 배워 놓으면 언제 어디서든 다 써 먹더라고요.”
태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열악한 의료환경이었던 카슈미르에서 정민수와 김혁권만 같이 다녔다.
마취의가 어디 있고, ECG가 어디 있을까.
아무것도 없이 수술해야 한 적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환자를 살려 내야 했다.
그래서 태수와 정민수는 필사적으로 수술에 필요한 모든 걸 공부해야 했다.
그중에 마취는 기본이었다.
태수의 제안으로 준비할 게 더 많이 늘어났다.
거기에 이동할 때 그가 먹어야 할 음식까지 더해져야 했다.
덕분에 태수의 널찍한 등이 모두 가려질 만큼 커다란 가방이 하나 만들어졌다.
무게는 대략 50킬로그램.
태수가 시범적으로 메어 봤다.
“영차.”
상당히 무거웠다.
물론 앞서 호언장담했듯이 태수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