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
KOI
용을 삼킨 마법사
1화
PROLOGUEKOI
레이먼드 가(家).
과거 이 가문을 부르는 이름은 많았다.
건국왕과 함께 대륙 북서부를 개척하고 나라를 건국한 개국공신의 명문.
왕국 최초의 공작가.
왕실의 든든한 우방 등…….
하지만 칠백 년의 세월이 흐르고.
드높았던 레이먼드의 명예는 모두 잊혀진 지 오래.
이제는 작위마저 붙지 않는 레이먼드 가를 부르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몰락 명가.
러셀은 바로 그 레이먼드 가의 유일한 후손이었다.
* * *
“프리랜서 마법사, 러셀……레이먼드?”
대륙에선 흔치 않은 흑발과 진홍색 눈동자. 그리고 꽤 날카로워 보이는 눈초리까지.
신분패에 적힌 레이먼드라는 성을 확인한 병사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것도 잠시.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이내 신분패를 돌려주며 통행을 허락하는 병사의 음성을 뒤로 하고, 스물다섯의 청년.
러셀이 성문을 통과했다.
‘여기가 왕도(王都), 카멜롯.’
대륙을 통틀어 유일하게 제국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엔디미온 왕국의 왕도.
때문일까. 카멜롯의 전경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깔끔한 건축물들과 잘 정리된 도시 전경, 그리고 그 위를 오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까지.
특이한 점은, 그 사람들 중 유독 로브를 걸친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이다.
‘그럴 만도 하지.’
왕도 사대 마탑의 일각인 백탑에서, 단기지만 프리랜서 마법사들을 잔뜩 고용한다는 공고를 낸 게 벌써 두 달 전이었으니.
시험이 며칠 남지 않은 지금, 왕국의 마법사들이 왕도로 모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고.’
고개를 한 바퀴 크게 돌리자.
왕도의 외곽, 동서남북의 방위를 따라 지어진 4개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왕도를 수호하기라도 하듯 우뚝 솟은, 나선과 탑을 합쳐 놓은 나선탑 형태의 건축물들.
‘저 나선탑들이 바로-’
왕도 사대 마탑이라 불리는 탑들이었다.
왕국 내에 존재하는 20개 남짓한 마탑 중 적, 청, 백, 황.
각기 4개 마탑의 정점에 위치한 것이 바로 저 네 개의 왕도 사대 마탑이었다.
‘한때는 저곳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도 있었는데.’
아니 저곳이 아니라 평범한 마탑에라도 들어가길 소망하며, 아카데미를 다녔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를 수 없는 꿈이 되었을 따름이라.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했으니까.’
아카데미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무섭게, 당시의 기억들이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
‘그 있잖아, 벌써 삼 년째 유급 중이라는 선배.’
‘아, 그 선배 말이지. 그런데 졸업반에서 몇 년이나 유급을 했는데도 아직 1써클이라면, 그건 그냥 노력을 안 하는 거 아냐?’
‘아니, 사실은 엄청난 노력파라고 하던데.’
‘그럼?’
‘마나로드 쪽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
‘러셀 레이먼드. 아카데미 최초로 세 번이나 유급을 한 학생.’
‘우리 아카데미에 네 번째 유급은 존재하지 않네. 러셀 군. 자네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이제 그만 우리 아카데미에서 나가줘야겠어.’
‘필기시험 성적이 아무리 합격권이더라도, 2써클조차 완성하지 못한 자네를 우리 아카데미에서 졸업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미안하네.’
하나 같이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 인상을 찡그린 러셀이 깊게 한숨을 뱉었다.
아카데미에서 졸업 조건으로 2써클의 달성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이유야 뻔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지만 어디 가서든 마법사라고 소개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졸업생들 중 뛰어난 몇몇은 3써클에 도달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퇴학을 당하고 몇 년.
한때는 명문의 귀족이었다는 명예마저 버리고, 프리랜서와 용병 일을 병행하며 떠돌길 몇 년간.
운이 아주 좋았던 덕일까.
아주 특별한 마법 둘을 얻은 덕에, 러셀은 비로소 2써클을 달성할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지나치게 늦어 버린 후였지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러셀이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영지와 귀족위를 상실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 대의 이야기일 뿐.
불과 십몇 년 전, 아버지 대만 하더라도 레이먼드 가는 백작의 작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작으나마 영지 역시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리 대단치는 않았어.’
그마저도 사실상 다 몰락해가는 와중이었으므로.
아버지는 그런 가문을 일으켜 보시겠다며, 영지의 사병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공을 세우기 위해서였지.’
말을 타고 병사들과 함께 영지를 나서던 레이먼드 백작의 등이, 러셀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왕실에서 파견된 평가관은 가문에 하사된 봉토와 작위를 회수해갔다.
더 이상 작위와 봉토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레이먼드 가에 전혀 희망이 없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세대가 거듭되며 점점 힘이 약해졌고, 마지막에는 영지와 작위마저도 회수되었다곤 하나 레이먼드는 개국공신의 가문.
그런 레이먼드 가는 다른 귀족에게 없는 특례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5써클의 마법사가 탄생하면 백작위를, 7써클의 마법사가 탄생하면 후작위를 회복할 수 있는 특례.’
하지만 유일하게 하나 남은 가문의 혈족이라는 자신의 재능이 이 모양 이 꼴이어서야.
‘씁.’
어쩐지 입맛이 썼다.
‘마법사로서의 수명을 갉아먹는, 이 지긋지긋한 천형. 이 천형만 완전히 해결할 수 있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을 것을.
‘마나로드 협소증이라니.’
선천적 마나로드 협소증.
러셀이 앓고 있는 천형의 이름이었다.
선천적으로 마나로드가 지나치게 가늘고 약한 탓에 일정 이상의 마나는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발출할 수도 없는 마법사들의 천형(天刑).
프리랜서로 떠돌며 얻은 두 개의 마법 덕분에, 처음에 비하면 조금 나아지긴 했다.
‘덕분에 2써클에도 오를 수 있었고.’
하지만 이 천형을 완전히 중화시킬 방법이 없는 한 마법사로서의 삶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후.”
결국 러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숙소부터 구하자.’
그 순간.
-.
문득 러셀의 시선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줄지어 들어선 왕도의 건축물들 중심에 삐죽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사각뿔 형태의 건축물.
‘루브리엄 박물관.’
엔디미온 왕국 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박물관.
아직 채용 면접까지는 며칠 정도 시간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왕 왕도까지 올라왔으니 견학을 통해 견문을 넓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운이 좋다면,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가능성은 낮지만, 저곳은 왕실 소유의 박물관이었기에.
‘온갖 종류의 기물들과 국보들이 전시되어 있을 거야.’
물론 태반 이상이 가품일 것이다.
도난이나 이런저런 문제들을 고려하면 진품은 대부분 왕가의 비고나 보고 같은 곳에 보관하는 편이 안전할 테니까.
‘하지만.’
가품이라곤 하더라도 아래에 적힌 설명까지 거짓이거나 허구이지는 않을 터.
“…….”
채 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시선은 박물관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고.
“가보자.”
이내 결정을 내린 러셀이 박물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치 무언가 운명의 이끌림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
.
“초행이시오?”
박물관 입구에서 검표를 하던 병사의 물음.
“볼거리가 많으시겠군.”
러셀이 그렇다고 답하자 그가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렇다면 하루 만에 다 보려 하는 것보단 구역을 나눠 보는 것을 추천드리지.”
“구역을 나눠서 말입니까?”
“그렇소. 하루 만에 다 보려고 욕심내 무리하다간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법이거든. 그럴 바엔 차라리 시간을 조금 들이더라도 제대로 보고 가는 게 좋지 않겠소?”
아무래도 박물관의 입구에서 다년간 근무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보았던 모양.
‘들어둔다고 나쁠 건 없겠지.’
러셀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가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오.”
그렇게 들어온 박물관의 내부는, 상당히 넓어 보였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단순히 외부에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지하 안쪽으로 몇 개나 되는 층들이…….’
경험자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조언대로 짜둔 계획에 따라 박물관을 관람하길 얼마간.
‘다음 관은……, 환상종인가?’
밝혀진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미지의 존재들이다.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관람을 이어가던 그 순간.
우뚝-.
러셀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의식하고 했다기보다는 본능, 혹은 운명과도 같은 느낌.
두근!
직후, 심장을 강하게 옥죄는 듯한 끌림이 느껴졌다. 휙, 러셀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을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엇인가를 마주했다.
‘이건, 돌인가?’
그것은 돌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주먹 크기의 돌.
혹은 다 말라비틀어져 수분감이 조금도 남지 않은 사과처럼 보이는 무엇인가.
그런데 왜 이 볼품없는 것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인지.
그것과 자신 사이의 거리는 십 미터 남짓.
러셀은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운명.
혹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감각이 전신을 휘감는다.
저벅, 저벅.
마침내 러셀과 그것 사이의 거리가 불과 몇십 센티 남짓으로 좁혀졌다.
그와 그것 사이에 남은 것이라곤 마법적 처리가 된 얇은 유리벽 하나뿐.
우우우웅.
속주머니 안쪽에서 격렬한 울림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그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고 강렬한 울림이었다.
‘이건…….’
그것은 반지였으며, 유품이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어린 자신에게 남긴 유품.
‘용의 눈을 흉내 내 조각한 보석이 박힌 반지.’
몰락했다곤 하나 어머니 역시 귀족가 출신. 그런 어머니의 가문에서 가보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 반지에 박힌 보석이 희미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심장의 두근거림, 돌덩이에서 느껴지는 운명 혹은 이끌림.
그리고 반지의 떨림까지.
그 셋이 공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기묘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가운데.
러셀이 천천히 반지를 제 손가락을 향해 가져갔다.
동시에 말라붙은 돌멩이 아래에 쓰인 글귀를 홀린 듯 읽었다.
“용종……의 심장?”
용종(龍種)이라 하여도, 진짜 드래곤 하트는 아닐 것이다.
애당초 진짜 드래곤 하트가 이런 곳에 전시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꽤 상위 용종의 심장일지도 모르지.’
어쨌건 간에 가품일 것이다.
혹여 진품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가까운 마력은 모두 소진되었고, 남은 것은 빈껍데기뿐일 테지.
분명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걸 아는데 왜 눈을 뗄 수 없는 거야.’
이성은 가짜라고 부정하고 있었지만, 심장의 떨림은 마치 이것이 진짜라고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반지가 손가락에 채워진 순간.
키이이이잉-!
이명이 사방을 뒤덮었다.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톱니바퀴에 금이라도 가듯, 러셀의 눈에 비친 세상이 어긋났다.
돌과 유품.
심장과 눈에서 흘러든 위대한 존재의 의지가 러셀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항거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정신파가 러셀의 의식을 뒤흔들고.
“큭!”
신음과 함께 허물어지는 러셀의 귓속으로 어떤 음성이 울려 퍼졌다.
『심장과 눈이 만나 또 다른 눈이 열리니, 새로운 신화의 초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라.』
『그 신화를 위해, 나는 그대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부여하노라.』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러셀의 의식이 끊어졌다.
허나 들려오는 음성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용신왕(龍神王)의 눈이 세계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전승자, 러셀 레이먼드의 상태창과 미션이 활성화됩니다.]처음과는 달리 어딘가 딱딱하면서도 가벼운 음성, 하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러셀은 그 말을 듣지 못했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러셀의 주변을 둘러싼 시간이.
째깍, 째깍-.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