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EPISODE.53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한 줄기 월광(月光)이 도도하게 밝히우고.
구부러져 나온 빛줄기가 창틈을 통해 흘러들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방이었다.
앞을 알아볼 수 있는 빛이라곤, 창틈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전부.
그 속에서 잿빛의 머리칼을 곱게 기른 노인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가각-.
그때마다 노인의 손에 들린 가윗날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의 앞에 놓인 분재의 가지가 이리저리 잘려 나갔다.
그러다 일순, 사각.
자라나던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낸 노인의 미간이 깊게 패어들었다.
“쯧.”
가위를 잘못 움직인 탓에 죽은 가지가 아닌 이제 막 자라나던 가지를 잘라내고 만 것이다.
방금 막 잘라낸 가지를 주워들며, 안타깝다는 듯 잿빛의 노인이 중얼거렸다.
“성미가 이리 급해서야. 아직도 기다려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았거늘.”
혹여나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지-.
노인, 비스마르크 대공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잘린 분재를 향한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일을 향한 말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얼마간 잘린 가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덜그럭, 덜그럭, 따닥-.
기괴하면서도 불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낡고 마모된 무엇인가가 맞부딪치는 소리.
대공의 집무실에 놓인 낡은 해골이 제 턱을 움직이는 소리였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해골의 텅 빈 두 눈동자에서 암녹색 안광이 흘러나왔다.
“녹색의 눈빛, 이번엔 카론(Χάρων)인가?”
히프노스(Ὕπνος)가 ‘깨어나지 못할 잠’이라면, 카론은 ‘명계로 흘러드는 강의 뱃사공’이었다.
아무리 본명을 밝히기 싫기로서니, 설마 옛 신족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할 줄이야.
‘시답잖은 사교도 놈들이…….’
서로 목적이 일치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놈들과 손을 잡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대공이 몸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내 비추던 차가운 낯빛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 카론. 이번엔 자네로군. 무슨 일인가?”
“마침 거래일이 되어서 말이오. 본래라면 당신의 거래자인 히프노스 놈이 해야 할 일이지만, 녀석의 일이 바빠 이번만큼은 내가 특별히 나섰다오.”
“거래일이라…….”
말꼬리를 흐리는 그를 향해 해골이 입을 쩍 벌렸다.
화아악-.
해골의 턱관절 안쪽에서 암녹색 광망이 명멸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녀석이 무엇인가를 뱉어냈다.
달그락.
그것은 크기가 주먹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자두처럼 생긴 보랏빛의 특이한 과일이었다.
“드실 때가 되지 않았소?”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었군.”
고개를 끄덕인 비스마르크가 손을 뻗었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앞에 떨어진 과일을 집어 들었다.
와그적, 와적.
과육을 모두 씹어먹기까지 필요했던 것은 고작해야 몇 입.
스륵-.
그러자, 자리에 남은 손가락 마디만 한 씨앗으로부터 흘러나온 암적색 기류가 대공의 전신을 부드럽게 휘감는다.
스으으읏-.
직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아앗-.
암적색 기류와 함께 대공의 손등에 피어나기 시작하던 검버섯이 확연히 옅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과 손등의 주름 역시 희미해지기까지. 변화가 일어난 것은 비단 손뿐만이 아니다.
“하아아아-.”
손을 비롯해 목은 물론 얼굴에 이르기까지, 족히 몇 년에 가까운 젊음을 되찾으며 그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중독될 것 같은 기분이로군.”
탐욕이 가득한 음성과 눈빛으로 대공이 읊조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제 기능을 다 하고 말라비틀어져 검게 죽어 버린 열매의 씨앗이라.
“이 좋은 걸 연달아 할 수 있다면, 불로장생도 가능할 터인데.”
“아쉽게도 정제 방식도 어렵거니와 부작용도 부작용인지라.”
해골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자, 비스마르크 대공이 곧장 혀를 찼다.
“쯧, 알고 있다. 그러니 5년에 하나로 참고 있는 것이고, 그보다-.”
손에 들린 씨앗을 미련 없이 내던진 그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그 꼬마 녀석이 붉은 협곡으로 향한다던데.”
“꼬마라면…….”
“블레인에게 망신을 줬다는 그 녀석 말이야.”
“아아, 그 태워 죽일 년의 제자를 말하는 거군.”
일순 해골의 암녹색 안광이 짙어졌다.
“수하의 망신은 자신의 망신이라, 그래서 그 꼬마 녀석을 죽여 달라?”
“허튼소리.”
카론의 말을 일축하며 대공이 쏘아붙였다.
“꼬마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첫째 제자라는 버밀리온까지 가는 마당인데 지금 거기에 소비할 여력이 있던가?”
5써클과 6써클 마도사의 동행.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이쪽 역시 6써클, 탑주급 마도사 둘 정도는 최소로 보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둘 모두 그 다리아의 제자였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의 한쪽 팔을 날려 버렸다는 소문이 진짜라면-.
“음, 당장에는……없지.”
그리 중얼거린 카론이 해골의 턱을 움직였다.
딱, 따닥, 따다닥-.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죽여 달라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말을 꺼내다니…….”
“내가 걱정하는 건, 아마조나 대수림(大樹林)에서의 일일세.”
“아마조나 대수림이라…….”
“그곳에서 벌이고 있는 일에 혹여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지, 그걸 묻고 싶은 것이지.”
아마조나 대수림(大樹林).
엔디미온과는 반대 방향으로 붉은 협곡과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남부의 따뜻한 기후 탓에, 소왕국 규모의 푸른 녹음이 펼쳐져 있다는…….
갖은 요정족들의 본거지.
그리고 대공과 사교도들이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 곳 또한, 아마조나 대수림이었던 바.
그의 걱정에 염려 말라는 듯, 카론이 대꾸했다.
“일을 벌이고 있는 곳은 협곡과 인접한 곳이 아닌 수림 안쪽 깊은 곳이오.”
달그락, 따다닥-.
그때마다 해골의 턱관절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굳이 찾아오지 않는 한, 고작해야 협곡까지만 가는 수준으론 절대로 찾아낼 수 없을 테지. 모든 일이 끝나고 ……가 열린 후라면 모를까.”
“음?”
고개를 갸웃하는 대공을 향해 카론이 대충 얼버무렸다.
“별것 아니오.”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여하간 대공이 걱정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1푼도 채 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소.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인근의 경계를 두 배로 늘리도록 하지.”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궁금한 점은 그게 끝이오. 그게 끝이라면……이제 슬슬 통신을 끊을 때가 되었군.”
안심하는 대공을 향해 카론이 해골의 턱을 움직였다.
“……다음 대화에는 내가 아닌 히프노스가 다시 찾아올 거요.”
마력이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해골에서 들려오던 음성이 급격하게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이어 음성이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암녹색의 안광 역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잘려 나간 분재의 흔적과, 썩어 문드러진 씨앗 하나뿐.
러셀과 버밀리온이 붉은 협곡으로 떠나고 며칠 후, 대공의 거처에서 있었던 대화였다.
* * *
“불꽃의 중위 정령이라면, 냄새를 통해 땅의 하급 정령인 노움(Gnome)들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니.”
붉은 협곡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버밀리온이 중얼거렸다.
‘한두 마리라면 모르겠지만, 언더월드에는 대량의 노움이 거주하고 있거든.’
‘분명 페퍼라면 노움들이 발산하는 정령의 기척을 알아차릴 거야.’
며칠 전, 아멜리아 머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였다.
“사제가 있어 다행이로군. 덕분에 언더월드를 찾는 게 수월하게 되었으니.”
붉은 협곡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버밀리온이 러셀을 향해 말했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정확하게는 페퍼 덕분이겠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러셀의 무릎 위에서 뒹굴거리던 녀석이 몸을 뒤집었다.
갸륵-?
배를 드러내 보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손끝으로 배를 긁어주자, 녀석이 간지럽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댄다.
갸륵, 갸르르륵-.
본체를 드러냈을 땐 거의 황소만 한 크기인데, 평소의 모습은 고양이 정도라니.
“그렇지. 그 정령 덕분이지.”
동의한다는 듯, 껄껄 웃으며 버밀리온이 아공간을 열었다.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챙겨온 고기 중 두툼한 것 한 덩이를 꺼내 페퍼의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상이다. 마음껏 먹으려무나.”
갸르르륵-!
눈앞에 들이 밀어진 고깃덩이에 페퍼가 길게 울음을 터뜨리더니 입맛을 쩝쩝 다시기 시작하고.
“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러셀이 낮게 침음했다.
“왜 그러는가. 사제?”
“아니요. 페퍼에게 날고기를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항상 익힌 고기나 육포, 혹은 가공된 베이컨이나 소시지 따위만을 줘 왔으니.
“날고기를 먹을지는 잘 모르겠다는 거구만.”
“일단 입맛을 다시는 걸 보면 먹긴 할 것 같습니다만.”
갸륵!
직후 페퍼가 보인 행동은, 러셀은 물론 버밀리온의 상상마저도 초월한 것이었다.
짧은 팔을 뻗어 고기를 덥석 움켜쥐기 무섭게, 페퍼의 작은 손이 붉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어?”
“음?”
뒤이어 페퍼의 손바닥이 닿은 자리를 따라 고소하면서도 기름진 육향이 피어오르고, 캬아!
생고기가 어느 정도 익었음을 확인한 페퍼가 그 부분을 뜯어 먹었다.
캬악, 갸르륵.
그렇게 고기를 익히고 뜯어먹고, 익히고 뜯어먹기의 반복.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돌연 버밀리온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허. 이 녀석이 벌써 마이야르의 맛을 알아 버렸군.”
얼떨떨한 표정의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예.”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이런 건 또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어쩌면, 불의 정령이 가진 본능일지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물의 정령이 모든 음식을 물에 씻어 먹는 건 아닐 테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령의 생태에 흥미를 가지며 두 마법사가 이리저리 관찰하길 얼마간.
뜨겁게 달아올랐던 탐구욕이 조금씩 식어갈 때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정지했다.
“워, 워, 워어어-.”
마차를 끌던 말을 저지시키며 마부가 입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꽤 관광지화가 잘 된 도시였다.
온통 붉은색 바위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협곡(Red Canyon)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풍광과 감상을 내보인다던가.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 풍광과 감상에 매료된 관광객들과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지에 지어진 개미집처럼 우뚝 솟은 형상의 붉은 바위.
이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로 거대해 보이는 바위이니, 가까이서 본다면 그 실물은 훨씬 거대할 것인즉.
‘저게 시작일 뿐이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神祕)에 압도되길 잠시간, 이내 러셀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만한 신비라면, 실제로 용(龍)이 몸을 숨기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묘한 기대감에 심장인지 써클의 마력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러셀이 걸음을 내디뎠다.
“가시죠. 사형.”
앞에 마련된 관광 도시를 지나쳐, 붉은 협곡을 향해 발을 뻗었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