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EPISODE.59
따당-.
투박한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번쩍 튀어 올랐다.
직후 레이피어 한 자루가 눈앞을 향해 달려든다.
날을 밀어 버린 무딘 레이피어라곤 하나 직격당한다면 당분간 눈두덩에 푸른 멍 자국을 달고 살아야 할 테지.
그 순간 러셀의 손에 들린 철창이 빙글 회전했다.
라만차, 문자 그대로 풍차와도 같은 회전.
따다당-.
원심력이 더해진 일격에 달려들던 레이피어가 힘을 잃고 뒤로 물러선다.
그것은 그 주인 역시 마찬가지.
레이피어를 움켜쥔 왕녀, 헤카테 라트모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여. 지금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한 것인가?”
일견 연인 사이의 달콤한 속삭임과도 같은 말이었다.
“전장에서의 능력으로 겨룬다면 부족할지도 모르나, 나 또한 오랜 시간 검술을 수련한 몸.”
허나 정작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대는 나와 함께 이 시간을 보냄에 있어 한 치도 눈을 팔지 말지어다.”
그 말대로 왕녀, 헤카테의 검술 실력은 보통을 훌쩍 넘었다.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 놓고 보더라도 가을달성의 2급 기사들에 견줄 수 있을 수준이었다.
거기에 체내에 가지고 있는 오러의 양은 익스퍼드 급 오러 수련자와 비등할 정도니…….
온실 속의 화초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옛이야기 속의 여느 왕녀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실력을 쌓으신 것인지.
왕녀의 검술 실력에 러셀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단순히 우직하고 직선적인 검로를 가진 검술이 아닌, 레이피어 특유의 섬세함과 탄성을 한껏 살린 교검술(巧劍術).
한두 해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기량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적어도 십 년, 그 이상의 고련이 필요로 했을 터.
‘왕녀의 신분으로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던 것일까.
헤카테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가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아하니, 이날까지 열심히 검술을 수련한 보람이 있구나.”
물론 진짜 그럴 의도로써 검술을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러셀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으음?”
“왕녀 전하께서 이 정도까지 검술을 익히고 계실 줄을 몰랐거든요.”
러셀의 답변에 왕녀가 쿡쿡,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군왕의 덕목에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힘 또한 포함되어 있느니라.”
내뻗었던 검을 거두어들였다.
“왕족이라는 신분에 기대어 다른 이들에게 지켜지기만 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으니…….”
안전을 위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러셀과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궁정 기사들을 일견하며 말했다.
“-나는 바라노라. 이 노력이, 저들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기를.”
제가 했던 말이 조금 쑥스럽게 느껴졌던 것일까.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맺는 왕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어 그녀가 슬그머니, 러셀의 시선을 돌리며 손부채질과 함께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좋구나.”
무엇이 좋다는 말일까.
의아해하는 러셀을 향해 왕녀의 첨언이 이어진다.
“이렇게 그대가 종종 찾아오는 덕에 땀을 흘릴 수 있으니. 여느 연인들과 같은 만남은 아니나 그렇기에 이 순간이 각별하다.”
여전히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그런데 전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어쩐지 심장이 쿵쿵 뛰는 느낌.
‘적당히 좀 하자. 심장아.’
최선을 다해 심장을 타이르는 러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녀가 검을 고쳐 잡았다.
“적당히 호흡도 돌아온 것 같은데, 한 번 더 하겠나?”
“물론입니다.”
빼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것과는 달리, 헤카테의 체력은 러셀에 비해 조금 약한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러셀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전쟁에서 활약할 것을 상정하고 훈련하는 워 메이지였다.
게다가 아침마다 하는 체력 훈련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내 호흡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겠지.’
왕녀를 향한 러셀 나름의 배려라고 할 수 있었던바. 그렇다면 그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땀을 흘리는 지금의 상황이 연인 간의 달콤한 속삭임에 익숙지 않은 그를 향한 자신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준다면 좋겠지만.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그 순간, 왕녀의 레이피어가 공기를 갈랐다.
파밧-.
.
.
그로부터 수십 분 후.
널찍한 왕실 정원의 철제 벤치 위에 걸터앉은 채, 헤카테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찾아올 때마다 주기적으로 몸을 풀어주었더니 아주 개운하구나.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나의 개운함과는 별개로 내 몸에서 나는 땀 냄새가 그대에게 어찌 느껴질지로다.”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며 슬쩍 거리를 벌리는 왕녀를 향해 러셀이 손을 뻗었다.
마법을 시전하며 말했다.
“그 문제라면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두 개의 써클이 회전하며 마력이 준동하는 순간, 러셀의 손에서 흘러나온 파란 빛무리가 왕녀의 전신을 뒤덮었다.
“클린(Clean).”
같은 마법이라 해도 시전자의 수준이나 성취에 따라 그 위력과 효과가 조금씩 달라지는 법이었다.
클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탑주 급 실력을 지닌 러셀의 클린은 여느 마법사들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화악-.
가벼운 마법 한 방에 몸에 붙어 있던 모든 먼지들이 일거에 떨어져 나간다.
뿐만 아니라 말라붙었던 땀 기운이 사라지고 방금 막 씻고 나온 것처럼 뽀송뽀송하게 변하기까지.
방금 막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 깔끔한 모습이었다.
허나 정작 그와 같이 변한 헤카테의 얼굴은 뚱하기만 했다.
“음.”
침음을 내뱉는 그녀의 볼이 어쩐지 불퉁하게 부풀어 있었던 것은, 러셀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대라는 사내는 참으로 눈치가 없구나.”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흠칫하는 러셀을 향해 헤카테는 투덜거리며 하소연했다.
“이럴 때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다, 냄새는 나지 않는다-라고 말해주어야 하는 법이다.”
“……?!”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나를 생각해준 마음까지 고맙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이래서야 원.”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난감해하는 러셀의 얼굴을 보며 왕녀가 키득 웃었다.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말과는 달리 한껏 웃고 있는 눈꼬리, 그제야 농담임을 깨달은 러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깜짝 놀랐습니다.”
직후 헤카테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보다, 그대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노라.”
“예. 전하.”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전하’라는 말에 일순 눈가를 찌푸리길 잠시, 이내 신색을 회복한 그녀가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석 달 후, 식이 거행되는 날까지는 그대가 왕도에 머무르는 것을 알고 있노라. 그런데 그 후에는 달리 일정이 있는가?”
“음.”
여섯 달마다 외유 연구를 핑계 삼아 바깥을 싸돌아다닌 것이 벌써 이 년째였다.
왕녀가 그렇게 물어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아직 가야 할 곳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곳이 마지막이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반년을 주기로 외유 연구를 떠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말꼬리가 조금 흐려지긴 했지만, 실망하는 것 같은 어투는 아니었다.
도리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 그 고민의 끝에-.
“해야 할 일이 있는 이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결국에는 내가 참고 기다릴 수밖에.”
-헤카테가 입을 열었다.
“사정상 나는 그대와 함께하지 못하지만, 가능하다면 내 대신이라 여기고 이것을 가져가 주겠나. 그대여?”
자신의 가슴팍에 달려 있던 브로치 중 하나를 풀어 러셀에게 건넸다.
세 개가 한 쌍을 이루는, 황금을 이용해 만들어진 소라 모양의 브로치였다.
그 한가운데 박혀 있는 것은 핑크색의 다이아몬드.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야.’
손이 닿기 전까지는 러셀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은밀한 마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손이 닿은 직후 흘러 들어오는 마력은 또 얼마나 웅혼한지.
결단코 이 시대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쩌면 신대의 물건일지도.
그때 왕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본래라면 셋이서 한 쌍을 이루는 아티펙트니라. 완전한 한 쌍을 이룬다면, 하루에 한 번. 8써클 마법사의 공격조차 막아 낼 수 있다지.”
8써클 마법사.
지형을 뒤틀고 깎아내어, 지도 자체를 다시 쓸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들이다.
얼마나 드높은 경지였던지, 6써클에 오른 지금도 그 갈피가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는 아티펙트라니. 물론 헤카테의 설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셋에서 하나로 줄었으니 그만큼의 효능을 보이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대의 목숨을 한 번 정도 구해줄 터. 부디 나라고 생각하고 아껴주게나.”
“감당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어떠한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만한 물건을 거저 받다니.
러셀이 사양하자, 왕녀가 싱그럽게 웃었다.
빼지 말라는 듯, 러셀의 가슴팍에 브로치를 직접 달아주며 말했다.
“셋 중 하나를 준다 해도 내게는 둘이나 남는다.”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
“그대는 아직 자각하지 못한 듯 보이나, 크게는 그대 역시 왕실의 일원이며 몸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느니라.”
조금 억지가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정론이라고 할 수 있는 말.
“작게는 무엇입니까?”
러셀의 물음에 헤카테가 포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리 해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느니라.”
정론을 내세워 교묘하게 자신의 마음으로 덮는, 어찌 되었건 빠져나갈 수 없는 화법에 러셀은 결국 입맛을 다셨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예……?”
“이만한 물건을 주었으니, 나 또한 그대에게 한 가지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 말하는 헤카테의 얼굴은 어쩐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으로 범벅이 된 얼굴.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호기심에 질문하자 헤카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달싹였다.
“……는가?”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소리였다.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건, 헤카테와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던 러셀 단 한 사람뿐.
스스로가 말을 뱉어 놓고도 당황한 것인지, 화들짝 놀란 그녀가 주변을 둘러봤다.
혹여 궁정 기사들이 듣지는 않았을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주변을 일별하는 그녀를 향해 러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뒤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만한 물건을 받았으니, 조금 낯뜨겁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이만큼 놀림 받았으면, 아무리 왕녀 전하라도 한 번쯤 골려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함께였다. 이어 러셀이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헤카테.”
왕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귓불까지 달아올랐다.
고개 숙였던 헤카테, 그녀가 중얼거렸던 말은 바로…….
‘듣는 귀가 멀리 있을 때에는, 나를 전하가 아닌 헤카테라고 불러주지 않겠는가.’
였으므로.
.
.
그리고 시일이 흘러.
마침내 약혼식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