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EPISODE.68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또 어디까지가 농담인 건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러셀이 고개를 흔들었다. 짧게 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저는 이미 미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습니다.”
왕녀, 헤카테 라트모스.
마냥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처음과는 달리,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후론 그런 기색이 많이 사라진 후였기에.
러셀이 헤카테를 떠올리며 그리 답하자 무야호의 입꼬리가 삐뚤어지며 올라갔다.
“말했잖냐. 수컷.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이 몸은 두 번째도 괜찮다고.”
그녀의 말에 러셀이 입을 곽 다물었다. 농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이 아니라고 해도 문제였다.
지금의 자신은 축첩이 없는 것은 물론-.
‘부마(駙馬)는 애초에 축첩이 허용되는 자리도 아니니까.’
러셀이 대답하지 않자, 샐쭉하게 입을 내민 무야호가 투덜거렸다.
“뭐. 좋아. 당장 마음이 없다는 수컷에게 계속 징징거리는 것도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지.”
자신의 옆에 놓여 있던 거대한 호리병 속 술을 벌컥벌컥 비워냈다.
“캬아-!”
쿵-.
“언제든지 생각이 바뀐다면, 스스럼없이 말하라고. 나는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거대한 술 호리병 내려놓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려 퍼지고.
“……종의 한계를 초월한 나는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긴 수명을 가지고 있지. 그건 아마 수컷, 네 녀석도 마찬가지가 될 테고 말이야.”
마법사건, 그렇지 않으면 오러 수련자건 간에.
벽을 뛰어넘은 초인들이 일반인들 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월등한 신체 능력이란 단순히 근골(筋骨) 따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근골은 물론, 노화의 억제와 월등하게 늘어난 수명까지.
거기서 한 번 더 벽을 뛰어넘게 된다면?
이 시대의 평균 수명은 물론 100세를 훌쩍 넘는 나이까지도 장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야호가 보기에 눈앞의 러셀은 그런 싹수를 가지고 있는 수컷이었다.
그렇기에 이리 말한 것이었고.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리 말한 무야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하간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해. 수컷. 너는 우리 수인족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준 은인인 만큼,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 줄─끄어어어억!?”
속에든 가스를 뿜어내며 호기롭게 선언했다.
‘거하게 술냄새를 뿜어내면서 하는 말이라 조금 신용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웃겼던 것인지, 무야호가 손부채질을 하며 깔깔거렸다.
‘어쨌건 간에 상대는 수왕, 무야호.’
자신의 입으로 거짓을 장담하지 않음을 호언한 이다.
“원하는 부탁 말입니까.”
그렇기에 러셀은 의문스레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전이라면 신지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그곳에서 얻어야 할 것은 이미 모두 얻은 후였으니까.
‘그렇다면…….’
수왕 무야호에게 부탁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던 러셀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이어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
“아앙?”
러셀의 말에, 무야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컷.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는 게 어때? 이 몸에게 부탁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다른 것을 부탁하는 것이 어떠냐는 듯, 되묻는 무야호를 향해 러셀이 대꾸했다.
“예. 물론입니다.”
“흐응.”
어울리지 않게 가냘픈 콧소리.
“뭐, 좋아. 네 씨를 받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그것도 충분히 재미있을 테니.”
직후 무야호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내일부터 즐겨보자고. 수컷.”
왼쪽 송곳니가 절반쯤 드러난, 새하얀 웃음이었다.
* * *
투쾅-!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러셀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날아갔다.
쐐애애애액-!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표에 내팽개쳐지며 바닥을 구르기까지.
쿠구구구구-.
그 충격에 모래 먼지가 짙게 일어나고, 러셀이 신형을 바로잡은 것은 그로부터 몇 초가량이 더 흐른 후였다.
“큭…….”
내팽개쳐지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지표와 충돌했기 때문일까. 모래 먼지 사이로 슬쩍 드러난 러셀의 전신은 그야말로 흙투성이였다.
찢어진 옷차림 곳곳을 따라 찰과상과 멍 자국이 드러나고.
그런 가운데 러셀이 덜덜 떨리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입안이 터진 것일까.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스으. 스으. 스으.”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왜 그래? 벌써 지쳐 버린 거야?”
아직 다 걷히지 않은 먼지 너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무야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몸은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 지쳐 버리면 섭섭하지. 게다가…….”
한 손으론 자신의 애병(愛兵)인 거창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도발을 하듯 검지를 까딱거리는 모습.
“이걸 먼저 하자고 한 건 네 쪽이잖나. 수컷?!”
그 말대로 러셀이 무야호에게 요청한 것은 하루 한 시간씩, 40일가량의 대련이었다.
러셀이 이와 같은 부탁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외유 연구에는 그 정도 여유가 남아 있는 것은 물론…….’
무야호와의 전투는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맞닥뜨리게 된 무야호의 존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대했다.
전력을 다한 무야호의 위력은 전날의 것보다 무거웠으며 재빨랐고, 날이 서 있었으므로.
‘후.’
손바닥으로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킨 러셀이 침을 퉤 뱉었다.
바닥을 구르며 모래를 한 움큼 퍼먹은 것인지 입안이 까끌거렸다.
‘죽겠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난번과 달리 무야호가 빠른 속도로 몰아치지 않는다는 점일까.
물론 정령의에.
용인화도 사용하지 않고 무야호의 공격을 받아 내야 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죽을 맛이었지만.
“적당히 쉬었으면 다시 시작해보자고.”
말과 함께 무야호의 머리칼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강렬한 투기(鬪氣)와 더불어 그녀의 몸에 내재되어 있던 오러가 밖으로 뿜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리털과 똑같은, 무채색(無彩色)의 오러.
화아악-!
오러와 뒤섞인 머리칼이 마치 사자 갈기처럼 부풀어 오른다.
무야호가 말하길 자신은 일정 이상 오러를 끌어 올리면 항상 저런 모습으로 변모한다고 했다.
강렬한 위압감.
천근의 추를 어깨 위에 올린 듯한 중압감이 전신을 찍어 누르는 것을 느끼며 러셀이 마력을 개방했다.
화아악-.
러셀 레이먼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죽음의 마창(魔槍), 게이볼그(Gae Bulg)
‘5연발-.’
작열(灼熱)하는 창 다섯 개가 러셀의 등허리를 따라 떠올랐다.
선명히 그 형체를 갖추며 자신을 겨누는 것을 확인하며 무야호가 포효를 터뜨렸다.
기꺼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좋구나! 수컷! 아주 바람직한 자세야!”
그리고.
앞으로 뻗어나간 무야호의 오러와 게이볼그가 부딪혔다.
───────────!!!!!!!
.
.
“음.”
낯선……아니, 이제는 익숙한 천장이었다.
“아…….”
눈을 뜬 러셀이 천장을 알아보며 침음을 흘리자,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일어났는가. 메에에에에-.”
염소수염에 염소의 뿔을 가진, 새하얀 백의를 입은 노(老) 수인.
듣자 하니 이 늙은 수인이 바로 도시 ‘펜릴’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라나 뭐라나.
그의 물음에 러셀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예. 그런데 이번에는 몇 시간입니까?”
“음, 두 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 깨어났으니, 또 십 분 줄었구먼. 메에에”
“두 시간…….”
러셀이 그 말을 읊조렸다.
처음 대련을 치렀을 때만 하더라도 꼬박 한나절을 기절해 있었는데.
약 스무날 정도가 흐른 시점에서, 그 시간이 2시간가량으로 줄어 있던 것이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삐걱거리긴 했지만, 몸 역시 움직일 만했다.
‘어디 한 곳 부러진 데도 없고 말이야.’
물론 이는 무야호가 힘 조절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어쨌건 간에.
자신의 몸을 간단히 점검한 러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탁-.
이어 아공간에 넣어 두었던 염탑의 로브를 꺼내 겉에 둘렀다.
“메에에-.”
그 모습에 무엇인지 모를 약초를 으깨고 있던 의술사가 물었다.
“벌써 나갈 생각인가?”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침상에 누워있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새삼 실감하는 거지만, 대단한 회복력이군. 보통 사람이라면 족히 반나절 이상은 누워 휴식을 취하고 싶을 텐데. 메에에에-.”
혀를 내두르는 의술사를 뒤로 하며 빠져나온 러셀이 향한 곳은 도시 ‘펜릴’에 위치한 도서관이었다.
기본적으로 육체적인 강함을 좋아하는 수인족들이라지만, 그들 역시 책과 지식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대륙에서 수입해온 책들은 물론, 자신들만의 지식을 종이에 엮어 도서관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러셀이 흥미를 가지는 분야는 ‘주술(呪術)’이었다.
러셀이 주술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쌓아 올린 힘. 하지만 똑같이 마력을 이용하는 구조라니…….’
그 특이한 체계도 체계였지만, 발동 방식을 잘 연구해본 결과 익혀 둔다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엄밀히 말해 러셀은 ‘월력석’을 찾아준 수인족의 ‘은인’이 아니던가.
그 때문인지, 몇 없는 수인족 주술사들 역시 러셀을 꽤 반기는 편이었다.
“왔는가. 냐아아아-.”
“어서오라구. 음머어어어어-.”
갖은 동물 소리와 함께 자신을 반겨주는 수인족 주술사들을 향해 적당히 인사를 해 보인 러셀이, 어제 빌려 간 서적을 꺼냈다.
밤새 읽었던 부분을 펼치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이 주술의 기본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사이의 삼재(三才)나 사방(四方)은…….”
“그러니까 음양이라는 건 일원(一原)에서 기인해 삼재와 사방을 거쳐 육합(六合)으로…….”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처음에는 잘 받아주던 수인족 주술사들 역시 기한이 끝나갈 때쯤에는 러셀의 시선을 슬슬 피해 다닐 정도였다.
오전에는 무야호와의 대련을 하고, 오후에는 주술 체계를 공부하는 나날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고, 마침내. 러셀이 돌아가야 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
“음…….”
자신의 방에서 짐을 정리하던 러셀이 짤막하게 침음을 흘렸다.
대부분의 짐들을 아공간에 보관하긴 했지만, 혹시나 놓고 가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주술서들은 복사본으로 챙겼고…….’
그렇게 얼마쯤 짐을 챙기고 있었을까.
야음을 틈타 러셀의 방으로 들어오는 이 하나가 있었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에, 월광을 받아 잿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칼.
끼익-.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무야호가 자신의 방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을 마주친 무야호가 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내일이 돌아가는 날이었지. 수컷.”
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호리병 중 하나를 찰랑찰랑 흔들며 말했다.
“마지막 날인데,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나 좀 할까?”
용을 삼킨 마법사